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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도별 기념식 자료

    5주년 노벨상 5주년 기념 - 폰 바이체커 전대통령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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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前대통령님!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기념행사에 초대된 것을 깊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정치가에게 존경을 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김대중 前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5주년을 기념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구상 모든 이들의 평화를 증진시키는 것이 우리 인류의 목표이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은 가장 영예로운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벨평화상은 수상자인 김 前대통령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큰 영광인 것입니다.


    본 행사의 강연자로 초청받았을 때 저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아주 오랫동안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중요한 나라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저는 김 前대통령과 친분을 쌓아왔습니다.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의 평화'를 주제로 얘기할 수 있게 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더불어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경험을 통해 한국과 독일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인지, 분단 극복과 통일 그리고 안정 확보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독일과 한국은 오랫동안 역사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해 왔습니다. 한독 양국은 상호 문화 교류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문화 예술, 언어, 유럽과 독일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쇄출판술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개방적 사고를 존중하고, 또한 독어를 잘 하는 한국인을 존경합니다. 독일에서 학업과 연구를 계속하려는 한국인을 환영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의 병원과 대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 특히 경제부문에서 독일 사람들과 함께 일해 왔습니다.


    독일정부는 올해를 '한국의 해'로 지정했습니다. 이미 독일 사회 각계각층에서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훌륭한 행사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일인의 관심은 더욱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한국은 올해 프랑크프루트 도서전의 주빈국으로 초청돼, 문학, 언어, 문화 분야의 역량을 선보여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국과 독일 양국은 많은 깊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선, 양국 모두 전쟁 후 분단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독일인들은 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철조망과 무기로 무장된 장벽에 의해 가족들이 강제로 헤어지고 국토가 분단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더 나아가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Ⅱ.


    저와 김대중 前대통령은 몇 십년 전부터 친분을 맺어왔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공통 관심사를 통해 친구가 됐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김 前대통령의 결단력과 용기,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그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한국에 온 것은 세계교회협회 때문이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과 저는 협회 중앙위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와 제 일행의 방문 목적은 북한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감옥에 갇힌 목사들을 구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그 목사들은 서울 외곽의 가난한 동네에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난민들과 이주민들을 도운 죄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세계교회협회의 회원들은 한국관련 당국자들과 교섭을 시작했지만 대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김대중 前대통령과 만나게 됐습니다. 김 前대통령은 자신도 당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데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여러 차례 김 前대통령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동안 김 前대통령은 자택 구금에 이어 투옥을 당했으며 심지어 사형수로 지냈고, 나중에는 국외로 추방까지 당한 상태였습니다. 김 前대통령은 어처구니없이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김 前대통령은 절대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았고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민주화와 법치의 실현, 인권 신장, 사법부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했습니다. 김 前대통령의 굳건한 의지, 그의 헌신, 그의 흔들림 없는 낙관적 사고, 고난과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용기는 전 세계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김 前대통령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한국을 진정한 민주국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뜻에 따라 대통령에 선출됐습니다.


    한국에서처럼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져 모범적인 민주주의가 성립된 것은 전례없는 일입니다. 김대중 前대통령은 자신의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조국의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와 조국에 대한 헌신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어려운 과제에도 도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단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여러분의 노력에 대해 독일인들은 항상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어떤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독일의 경우와 항상 비추어보고 비교해 봤습니다.


    Ⅲ.


    물론 한반도와 독일 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한민족이 자신들의 문화를 어떻게 창출하고 지켜왔는지, 자국보다 훨씬 큰 이웃국가들이 어떻게 한국의 특성과 용기를 존중하게 만들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국의 역사적, 지정학적 상황이 항상 한국에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유럽과 동아시아의 상황이 상이한 여러 요인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과 한국민의 경험에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60년 전 독일인들은 한국민들과 함께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양국민들은 유사한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냉전 때문에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국토와 조국이 분단되고, 가족이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국 모두 열정적이고 대담한 정치인들이 분단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김대중 前대통령은 이러한 노력에 활발하게 앞장섰습니다.


    그는 세계 평화와 인권, 우호협력을 증진하는 유엔 헌장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김 前대통령은 먼저 조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화해협력과 인권을 단계적으로 증진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억압했던 세력에 대한 보복은 자제했습니다. 폭력과 이에 맞대응하는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진실성과 평화를 존중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과 결단력을 갖고 일반 북한 주민들의 상황 개선 방법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유명한 햇볕정책이 탄생한 것입니다.


    김 前대통령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화해와 데탕트 노력은 자유와 법치에 대한 현명하고도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 넣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독일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해 보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의 평화정착과정을 공유함으로써 비록 양국의 상황과 전제조건이 상이하지만 뜻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독일의 지정학적인 조건을 보면,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전형적인 내륙국가입니다. 독일은 9개 국가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이들 국가 가운데 강대국은 없습니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주변국과 대립하거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독일에서 먼저 시작한 경우도 있고 상대국에서 먼저 시작한 경우도 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잔혹한 세계 대전과 냉전을 겪고 나서야, 유럽 국가들은 공동제도를 통한 공동체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냉전기간 동안 베를린 장벽은 비자연적 분단의 중심이자 상징으로서, 적대적인 두 개의 정치체제로 나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대표했습니다.


    베를린과 유럽의 분단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독일 국민과 유럽인들에게 참으로 잔인한 조건이었으며 인권에 위배되는 조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동독에 대해 포괄적인 정책을 실시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먼 길을 걸어와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독 사회가 공산권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치적 차원에서 동독과의 접촉이나 교류, 교섭을 지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봉쇄정책으로 인해 결국 봉착상태에 이르게 됐습니다. 첫째, 외교정책 측면에서 어떠한 창의력과 융통성도 발휘할 수 없게 됐습니다. 둘째, 동독의 우리 형제, 자매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책 재조정을 결정했습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래로 서독의 대동독 정책은 더디지만 점진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우리는 동독인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동독의 공산정권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한걸음씩 나아가는 이 접근방식은 진척이 느리긴 했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분단 상황에서 동독과 서독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이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화해를 통한 변화를 꾀하는 대담한 개념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동방정책의 개념은 나중에 김대중 前대통령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대북 햇볕정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대동독 정책을 통해, 이산가족의 상봉과 방문이 가능해져 양진영의 시민간 접촉과 교류가 많아졌습니다.


    우리의 동서독간의 정책은 유럽 전체의 동쪽과 서쪽 간의 관계의 방향의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은 일촉즉발의 쿠바사태를 겪고, 데탕트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방진영의 동맹국들은 독일의 평화적인 공헌을 기대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스트 폴리틱(동방정책)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정책을 통해 동서진영의 화해를 꾀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오스트 폴리틱(동방정책)의 목표는 냉전중인 강대국들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공산진영의 과거 적국들 즉 폴란드, 체코, 구소련과 화해하는데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 서독은 동서진영 화해를 위해 미국 등 다른 동맹국들보다 더 주도적인 노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975년 우리는 헬싱키 정상회담에 참여하길 주저하던 미국을 설득해 참여를 이끌어내어 성공적으로 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구소련과 공산권 동맹국들 붕괴에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미국도 헬싱키 정상회담 결과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물론 오스트 폴리틱(동방정책)의 성과에 대해 서독 의회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일각에서는 오스트 폴리틱(동방정책) 때문에 공산권이 오히려 강화돼, 동서독의 통일 또한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는 옳은 길임이 역사를 통해 증명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공산권은 서방진영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은 부인할 수 없게 됐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공산권의 취약점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Ⅳ.


    이는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단계적인 평화조치가 없었다면, 분단된 우리 조국이 통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유럽대륙 전체의 통합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독일 통일은 2차 세계 대전의 4개 동맹국과 동서독간에 체결된 '2+4 협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구소련에서 독립한 동독의 과거 동맹국들이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유럽의 통합 절차가 마무리됐습니다. 이처럼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 과정의 일부입니다. 유럽분단의 축소판이었던 독일은 자국의 통일과 동시에 통합된 유럽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독일 통일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신속하게 이뤄졌지만, 내부적으로는 넘어야 할 장애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Ⅴ.


    의심할 바 없이, 통일과 통합은 어렵고 힘든 과정입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수반하고 분단 기간이 길수록 그 비용도 커집니다. 하지만 인류 평화와 복지 실현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 과정에서 우리는 통일에 수반되는 어려움에 대해 사전에 신속하게 대비하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 맞고 있는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통일 후 통합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가속이 붙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감을 갖고 전진해나가고 있습니다.


    Ⅵ.


    김대중 前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전례없는 엄청난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전 세계가 많은 기대 속에 6자회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핵무장은 여러분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평화와 인간 존엄성 존중 보장 등의 인간다운 조건도 번복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김 前대통령의 헌신과 신념 덕분에 한국의 민주화에 이어 한반도에 햇볕정책이 실현됐습니다. 따라서 햇볕정책의 목표는 한반도 전체에 민주화와 평화의 햇볕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목적이 통일에 반대하는 논거로 오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궁극적으로 민주화의 목적에 통일도 포함됩니다.


    6자회담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계속 발전해서, 세계화 시대를 맞아 동북아 안정과 번영을 위한 영구적인 협력 체제로 발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대중 前대통령이 뿌린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서 한반도를 넘어 주변국가, 주변 지역들,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평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함께, 인류 평화 실현을 위한 김대중 前대통령의 헌신과 공헌에 대해 존경과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젊은이들이 언젠가는 통일된 평화롭고 자유로운 한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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