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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주년 노벨평화상 11주년 기념 - 특별강연 - 게리 스파노비치 | 평화 연구소(WPI)소장

    본문

     


     


    제 이름은 게리 알랜 스파노비치 입니다. 오늘밤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도 노벨평화상 수상 제 11주년을 맞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Wholistic Peace Institute(WPI,홀리스틱 평화 연구소)의 소장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국제적 NGO(비정부기구)이며, 우리의 임무는 세계에서, 특히 전쟁과 대결행위에서 발생하는 인명의 손실을 축소하고 종식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로 세계적으로 평화 지도자로 인정하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사업을 추진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인의 피스메이커였으며, 또한 하느님의 거룩한 피스메이커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돌이켜 봤을 때, 그는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천국에서 그가 차지한 영광의 자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주님의 도움 속에 현생을 살았고, 또 지금 그의 영혼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간 김대중대통령이 보여주신 신앙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저와 우리 WPI연구소는 2008년 카톨릭 대학인 포틀랜드 대학에서 김대중 대통령께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실 때, 대통령과 존경하는 이희호 여사를 모시는 영광을 가졌던 바 있습니다. 이 대학이 김대중 대통령께 명예박사 학위를 드린 것은 그분의 생애와 타고난 성품을 기리고, 언제나 학생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고, 학생들 스스로의 인생에서 가능성을 찾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2008년 김대중 대통령은 3,200명의 학생들과 교수들 앞에서 하신 연설에서 대통령께서 하신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과 그와 관련된 하느님의 역할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김대중 대통령께 경의를 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하느님의 사람이며 동시에 국민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생애는 하느님과 국민을 위한 봉사”였다고 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두터운 신앙과 깊은 철학을 갖고, 수십년 동안 그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투쟁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메세지를 세계에 전달했습니다. 그는 강압의 역경과 망명 중에도 믿기 어려운 인내심과 용기를 보여줬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떠한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를 보여줬습니다. 그의 기도와 신앙은 납치, 사형선고, 암살 시도에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 믿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조국에 대해 무한한 애국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이 독재의 역사를 이기고 일어나 오늘날과 같이 세계의 당당한 민주국가들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은 놀랍게도 언제나 위협 때문에 침묵하거나 위축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창의적이며 혜안을 가진 지도자로서, 그가 사랑하는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해와 용서, 공동의식과 협력을 열정적으로 대변하였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안에서 뿐만 아니라, 상처와 축복을 함께 받는 이 지구의 여러 곳에서 강력한 신념의 언어로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 그리고 자유의사를 강조했습니다.


    여기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종교에 대한 신앙과 학문에 헌신하고 가족 간의 깊은 유대와 결속을 실천한 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삶을 산 김대중 대통령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용기, 인내, 품위를 가지고 평정심을 유지했던 대단히 용기 있고 관대한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고 합니다.


    2008년 김대중 대통령은 포틀랜드에 방문했을 때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탐 포터 시장과 그의 친구들은 현재 WPI위원회의 이사들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 축하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2008년 탐 포터 시장은 4월 18일을 ‘김대중 대통령의 날’로 선언했습니다. 이에 WPI에서는 매해 4월 18일에 민주주의, 인권,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의 인류애는 문명의 주춧돌의 하나였고, 그의 용서는 사람들이 갈등 없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기본 가치를 말해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용기 있게 햇볕정책을 만들었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용서와 이해 그리고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이 노력은 한반도에서 전쟁위협을 축소하였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는 또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고,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햇볕정책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까지 1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이솝우화 “북쪽의 바람과 태양”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우화에서 바람과 태양이 사람의 겉옷을 벗기는 경쟁을 합니다. 바람은 사람의 겉옷을 벗기기 위해 차가운 바람을 보냈지만 사람은 겉옷을 움켜쥐고 벗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태양은 따뜻한 햇살을 비췄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스스로 겉옷을 벗고 따뜻한 날씨를 즐겼습니다. 햇볕정책의 목적은 교류와 경제지원을 통해서 남한에 대한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솝 우화는 북한이나 북한에 대한 한국의 태도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 사는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햇볕의 따스함에 반응하며,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북방의 차가운 바람에 반응하며, 이에 맞서기 위한 보호수단을 강구합니다. 남과 북의 사람들은 진실로 햇볕정책의 햇볕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햇볕정책은 남과 북의 대화를 통해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교류에 기반을 둔 평화협력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북한만큼이나 한국도 햇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8년 4월 22일 하버드대학 케네디 스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력사용이나 냉전시대의 봉쇄로는 공산주의를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는 평화공존과 평화교류를 통한 안전 보장과 경제, 문화, 인적교류의 증진을 통해서 가능하다.”


    1998년 취임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공식 선언하고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제의했습니다. 그 후 2000년 6월 15일 최초로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평양시민 50만 명의 환영을 받았고, 그 방문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은 절대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북한정권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절대로 갖고 있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햇볕정책은 평화공존과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원칙아래 남북한이 다 같이 이기는 통일을 원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평양방문을 통해서 김대중 대통령은 북미관계 개선이 한반도 평화에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북미간의 중재를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진정으로 원했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2008년 포틀랜드 방문을 전후해서 12번을 만났습니다. 그 때마다 대통령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NGO인 우리 WPI연구소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마다 대통령께선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WPI는 북한 당국과 직접 협력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많은 미국의 NGO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면, 부시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그것을 보고 그 방향을 따르게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갈등관계에 있는 두 나라중 한 쪽이 대화를 거부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하면, 거기서부터 평화가 싹트고 한국전쟁도 종식시키고, 북미간에 대사 교류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강한 생각을 대통령께선 가지고 계셨습니다.


    2006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뉴스위크와 회견을 갖고 북핵문제의 해결과 그 당시 북한의 핵실험에 관해서 논의했습니다. 대통령께선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압력전술이 아니라 협상을 해야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지금도 미국이 ‘북한은 악이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대화는 필요하면 악마하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 닉슨 대통령은 중국에 가서 마오쩌둥과 대화를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은 악의 제국’이라고 부른 후에도 대화를 추구했다. 아아젠하워 대통령도 한국전쟁 중 대화를 했고, 그 결과로 한반도는 휴전이 되어 지난 50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상당한 책임을 져야하는 미국이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2008년 4월 18일 포틀랜드에서 행한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10시간의 대화를 가졌다고 밝혔습니다. 김정일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했고 북한이 핵을 개발한 것은 미국의 압력에 대처함과 동시에 대미관계 개선을 목표로 하는 협상용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조선 말기에 주권을 상실한 것을 기억하면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을 경계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생각에 김정일 위원장이 적극 동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똑같은 메세지를 전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한 당시 북한의 입장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권유했습니다. 클린턴은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지지하면서 기꺼이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의 권력 2인자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백악관에 초청했습니다. 그는 또 올브라이트 장관을 평양에 보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문제와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양국 간의 외교정상화에 대한 전망은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노력은 미국판 햇볕정책의 실현이었던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이 확고히 자리를 잡기 전에 클린턴대통령의 임기가 끝나 버렸습니다.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클린턴의 방식은 모두 반대하는 ABC(anything but Clinton)정책을 내걸고, 전임자가 이룩한 진전을 모두 후퇴시켰습니다. 따뜻한 햇볕의 날들은 차가운 북풍의 날들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부시 행정부 8년 중에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시설을 감시하고 있던 IAEA사찰단원들을 추방했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고 결국 2006년에는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북핵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1차 정상회담을 통해서 지대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한반도의 긴장은 크게 완화되었습니다. 남한은 북한에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관광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약 180만 명이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분단 50년 기간 중 이산가족은 200명만이 재회할 수 있었으나, 그 수가 이제 16,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남한은 북한에 매년 식량 45만 톤과 비료 30만 톤을 제공했습니다. 식량과 비료를 담았던 수백만장의 포대가 북한 방방 곳곳에 배포되었습니다. 이 포대에는 남한에서 왔다는 글씨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서 남한에서 식량과 비료를 보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한은 미국의 앞잡이로 북한을 혐오하고, 북침을 노리고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생각과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남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적대감은 우호적인 정서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남쪽 동포들을 부러워하게 됐고, 그들도 남한처럼 잘 살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런 정서의 변화는 문화적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북한주민들이 남한의 유행가, TV드라마와 영화까지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비밀리에 그랬습니다. 얼마나 거대한 변화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햇볕정책의 성공입니까?


    햇볕정책은 냉전의 특징이었던 힘의 사용과 대결을 배제하면서 대화와 교류, 협력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햇볕정책은 한반도에서 성공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갈등해결의 효과적인 모델임을 입증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포틀랜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필요한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경제 회복이다. 그리고 경제 회생을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미국의 협력 없이는 IMF차관이나 아시아개발은행의 지원도 받을 수 없다. 또한 미국의 도움이 있을 때만이, 북한은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실현하고 과거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보상으로 100억 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북한은 외국투자를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텅스텐, 자철, 금, 동, 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합니다. 북한은 세계 최대의 자철 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희귀 광물인 자철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제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입니다. 북한의 지하자원은 미화로 2조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북한이 이런 지하자원을 개발하면 경제적 궁핍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이 이런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도움이 없이는,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적절한 협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원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원을 가진 나라가 부유해 지는 시대입니다. 자원의 보유국과 자원 개발에 참여하는 국가는 크게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북한의 자원 개발에 착수 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같은 EU국가들도 부분적으로 나마 북한의 자원개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기다리는 것은 미국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북한이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포틀랜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와 맞서 50년간 냉전을 했었다. 그러나미국이 입장을 바꾸어 소련과 대화와 교류 및 협력을 추구하기 전까지 서방측은 성공하지 못했고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OSCE(유럽 안보 협력기구)조약, 소위 헬싱키 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조약국들은 모두 경제, 문화 및 인적 교류를 추진할 것과 동유럽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할 것을 합의했습니다.이 조약의 결과로 공산권의 국민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또 밖에서 공산권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산권안의 사람들은 그동안 공산권의 외부세계가 나쁜 사회라고 배웠으나 그런 외부세계에 대해서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지옥 같다는 느낌도 깨달았습니다. 결국 일반 대중의 정서가 바뀌고 이에 따른 내부의 동요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서방국가들은 냉전의 북풍으로는 공산주의의 겉옷을 벗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햇볕으로는 벗길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중국이나 월남을 전쟁 또는 봉쇄를 통해서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교류와 협력을 추구함으로써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인류를 위협하던 공산주의 제국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햇볕정책의 성과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시작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계승한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긴장을 현저히 축소하고, 전쟁위협을 대폭 줄였습니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정서도 과거의 적대적이고 보복적인 태도에서 우호적인 태도로 변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에서 보내는 식량과 비료를 담은 포대에 남한기업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지원을 해준 남한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008년 초기부터 남북대화에 차가운 북풍이 또 불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햇볕정책 대신 등장한 강경정책이었습니다. 그 결과 남북관계는 1953년 한국정전 이후 최악의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그 후 적대적 충돌과 도발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계속적인 핵 개발, 금강산 관광 중단과 수십 만 명의 관광객 차단, 피스메이커들의 북한방문금지, 개성공단 활동의 축소 등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현재의 강경책은 효력이 없습니다. 이제 강경책을 햇볕정책으로 복구할 때가 된 것입니다. 강경책은 세계와 특히 한반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후손과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도 햇볕은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항상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북핵문제는 관련 6자 당사국의 틀 속에서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그러면 세계가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달성 가능하며,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유도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세계평화 회의를 열고 한국전쟁의 종식과 대사교환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 보겠다는 우리 WPI연구소의 비전을 지지하셨습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남한, 북한, 미국의 장성들이 아니라 남북의 외교핵심부가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여러 명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협의해 봤습니다. 그들은 한국갈등해소 회의에 참석하여 해결방안을 강구해보겠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전 종식을 위한 노벨 평화 행동 계획”을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 WPI연구소는 김대중평화센터 그리고 다른 기관들과 함께 노벨수상자 회의 개최 추진을 위해서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회의 장소는 중국의 연변대학이 가장 적절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으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수많은 역경을 넘어 화해와 용서, 이해에 대한 그의 믿음들을 끈질기게 보여줬으며 신념을 지켜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간단한 이솝우화에서 하느님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과 같이 훌륭한 분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분과 함께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특권이었는지, 또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로서 그와 같은 사람과 함께 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릅니다. 오늘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대단한 찬사와 진심어린 존경의 마음을 그분께서도 알아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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