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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김대중 평가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프레시안)

    본문

    "김대중 평가요? 그런 쓸데없는 짓을… "

    [김대중을 생각한다]<10> 빈곤시대 젊은이들에게 김대중은?

    1. 내가 경험한 김대중 시대

    장 폴 뒤부아의 소설 <프랑스적인 삶>은 68혁명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 시대를 하나의 장으로 설정하고 있다. 지금은 5년 중임제로 줄었지만, 7년 중임제였던 프랑스도 대통령에 따라 시대가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교열이 직업이던 좌파 지식인이었는데, 사진 작가인 아들이 미테랑의 사진을 한 장 찍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진은 아들의 손에 한 번도 잡히지 못했다. 68세대, 정확히 말하면 그 시기에 고등학생이고, 시위대와 함께 자신의 아버지 가게에 불을 질렀던 주인공은, 벌벌 떠는 국립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사회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88만원 세대>를 준비하면서 가장 결정적인 모티브를 주었던 것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

    ▲ <프랑스적인 삶>(장 폴 뒤부아 지음, 햠유선 옮김, 밝은세상 펴냄). ⓒ밝은세상
    지금 와서 생각하면, 현실의 내 삶도 대통령이 누구였느냐에 따라서 심한 굴곡점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을 먼 발치에서나마 실제로 본 것은 1987년 대선 여의도 유세 때, 딱 한 번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인데, 2월생이라 한 살 먼저 들어가서 그 대선 때 나는 투표권이 없었다. 그래도 역사의 한 순간일 것 같아서 지금은 소설가로 아주 유명해진 김영하와 구경을 갔었고, 종로까지 진행되었던 시가행진에도 참여하였다. 그 때 할머니들이 손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벗어서 내어주는 장면을 보았다. 그 후에는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

    전두환 시대, 나는 언제든 감옥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부부 교사였던 부모와의 불화가 너무 심해져서 대학교 2학년 때 집을 나왔다. 노태우 시대, 경찰한테 쫓기다가 결국 부모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공부하러 떠나갔다. 감옥 뒷바라지 하는 것보다는 이게 싸다는 부모의 판단이 있었다. 김영삼 시대에는 시간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가난을 오래 버티지는 못했고 결국 재벌 시대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는 작은 연구소로 들어가게 된다. 3년만 기업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김대중 시대에는 정부기관으로 직장을 옮겼다. 워낙 게을러서 아침 6시부터 움직여야 한다는 청와대에서는 도저히 일할 자신이 없었고, 그 대신 이한동 총리 시절에 총리실 근무로 "뭘 좀 도와라"는 주변의 요청을 가름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올 때 대통령 인수위원회 움직이는 거 보면서 이 정부 진짜 아니다 싶어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오랜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녹색당 창당 작업에 나섰다. 이 시절에는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라는 주제로 시민단체 상근자로 지냈다. 그리고 이명박 시대, 장기하의 노래 가사처럼 "별 할 일 없이 산다", 그렇게 보내게 되었다. 진짜 내 경우도 대통령에 따라서 굴곡적 삶을 산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의 별세 소식은 경주의 문무대왕 수중릉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들었다. 영화 <평양성>에서 황정민이 신라왕으로 출연했는데, 그가 바로 문무대왕이다. 그날 나는 살아서는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에 정말 슬퍼졌다. 87년에는 아마도 그에게 투표했을 것 같은데, 그 때는 투표권이 없었고, 그 다음의 대선에서 전라도 친구들이 나에게 "이 번 한번만", 그렇게 부탁을 했어도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그 때의 마음의 빚도 있고, 이회창의 한국이 너무 보고 싶지 않아서 노무현 대통령 때에는 "형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후배들의 원성을 사면서도 노무현에게 투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대통령직을 곧잘 수행한 것 같고, 노무현의 경우는 그 정도로까지 형편없이 할 줄은, 정말 몰랐던 것 같다. IMF 한 가운데에서 김 대통령에게 직접 조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제도경제연구회라는 작은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나도 참여 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민주당 정책위원장이 된 박순성 교수와 고대 김균 교수, 그리고 나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 영국 캠브리지에 있던 시절, 바로 옆 집에 김균 교수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경로로 몇 가지 조언을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첫 번째 했던 조언은 IMF 한 가운데에서 폭동의 가능성이었다. 그런 논의를 거쳐 자활 프로그램이 생겨나게 되었고, 지금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의 첫 틀이 등장하게 된다.

    청와대와 직접 일을 한 것은 몇 번 안 되는데, 장재식 산자부 장관 시절에 고유가 대책 등을 몇 번 보고 했었고, 실효성 있는 중요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이 뭐가 문제인지는 인식할 정도는 된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 전 대통령이나 그 후 대통령은, 사실 문제가 뭐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상사였던 장재식 장관이 바로 장하준의 아버지였는데, 그 시절에 나는 두 사람을 따로 따로 알면서도 부자지간인 것은 생각도 못했다. 부자와 같이 일해보는 건, 정말 진귀한 경험이다. 어쨌든 나의 상사였던 사람 중에 장재식 장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렇게 나쁜 느낌을 갖지는 않았지만,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많은 공무원들은 "지금 정부는 정부도 아니다"고 상당한 불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등산화가 가고 지팡이가 왔다"는 불만들이 많았다. 내가 긴 시간을 가지고 겪어본 낙하산 중에는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장현준 원장이 있었다. 그는 중앙일보 데스크에서는 유일하게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을 도왔던 사람인데, 그 공으로 에너지 쪽으로 왔다. 당연히 밑에서는 낙하산이라고 불만이 좀 많았는데, 그는 내가 살면서 본 낙하산 중에서는 가장 유능했고, 일도 열심히 했다. 연구원장이 되자마자 야전 침대를 원장실에 갔다 놓고 거기서 잤다. 한 번은 나도 연구원에서 같이 밤을 샐 일이 있었는데, 식사로 자장면을 시켜먹었고, 자기도 자장면을 먹었다. 직장에서 자장면 시키면서 하다못해 군만두도 없던 배달 자장면이 그 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그 기억이 신선했다. 주먹구구로 하던 20년짜리 장기 계획에 제대로 된 통계 패키지를 구입하도록 하고, 소속 연구원들을 장기 해외연수도 보내서 실제로 한국의 분석 능력을 높인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그 시절에 그렇게 키워진 사람들을 나중에 전경련 등에서 흡수해갔다.

    측근들과 낙하산만으로 본다면, 김대중이 내려 보낸 사람들은 작은 김대중처럼 일했던 것 같고, 그게 민주주의인지는 모르지만, 사명감은 가지고 있던 것 같다. 노무현이 내려 보낸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뭐 하는 사람들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정부라는 눈으로만 보면 김대중 정부는 다음 정권을 다시 가져갈 흐름을 현장에서 좀 만들어낸 편인데, 노무현 정부는 국민들의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부 내부에서는 "이들과는 같이 못하겠다"는 흐름이 팽배했다. 현장에 있던 나는 인수위원회 움직이는 거 보고, 이 정부는 망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얘기를 나중에 노무현 정부 사람들에게 했더니, 왜 자신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거나 잘 해 볼 기회를 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소리를 들었다. 현장 팀장인 내가 인수위원회 고위직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런 이런 문제점이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는 얘기인데… 정부도 조직으로서 절차가 있고, 상부와 직거래하거나 직보하는 일은 기본적으로는 하극상이다. 노무현 쪽 사람들에게는 아픈 얘기가 되겠지만,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김대중의 얘기는, 현장에서 보면 진짜로 그랬다. 보수적인 국장 이상의 상사들과 달리 내 또래의 서기관이나 사무관들은 민주 정부를 지킨다는 심정으로 생각보다는 열심히 일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을 노무현 중후반에 다시 만나면, "우 박사, 이 정부는 좀 아닌 듯 싶다", 그렇게 불만들을 토로했었다. 별로 이념적인 사람들은 아니고, 생활인에 가깝지만 그런 불만들이 쌓이고 쌓여서 정권이 다시 한나라당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어쨌든 김대중 시절에 나는 초고속 승진도 하고, 장관 특별표창도 탔으니, 공직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은 그 순간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에게 남아있는 아쉬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카드대란. 이건 정상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모피아를 정리하겠다는 IMF 초기의 다짐을 잊어버리고, 흑묘백묘 얘기와 함께 노쇠한 금융관료들의 손을 다시 잡은 게 이 사건이다. 이건 노무현 대통령 초기에 두고두고 경제 문제를 일으켰다.

    두번째, 새만금 사건. 동강으로 생태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던 그가 새만금 사건으로 반(反)생태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청와대에서 그를 만났던 시민단체 원로나 학계 원로들이, "그건 전라도 문제라서 이번 한 번만 봐주소", 그렇게 얘기했다고 전한다. 사실 그는 토건 쪽 원로들의 청을 물리치지 못한 것 같다.

    세번째. 다이나믹 코리아. 쇼비니즘을 끊고 국가주의를 좀 청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는 정치적으로 후반부에 다시 국가주의를 선택했고, 강력한 한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가 욕심을 조금만 접었으면, 한국이 팽배한 쇼비니즘을 좀 줄이면서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국가의 방향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잘 한 것은 무엇일까? 이건 후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적 문제와 연결되는 것인데, 그 시절에도 미국과의 BTI 논의가 있었는데, 한미 FTA 논의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풀어주고 시작한 4대 선결조건을 보면서 그는 BTI 논의를 아예 접어버렸다. 실무자로 정부에 참여하면서 본 것 중에서 미국 앞에서 당당한 외교를 했던 그가 놀라웠다.

    최근 문화 경제와 관련된 꽤 많은 지표들 분석작업을 하면서 1인당 문화지출 등 꽤 많은 지표들이 2002~2003년을 정점으로 그 뒤로 후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 소득이 높아지면 문화 지출과 함께 문화산업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게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이후로 실제로는 줄어들거나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게 시민의 정부이든, 민중의 정부이든, 한나라당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결국 김대중 시절의 국민의 정부의 공과를 승계하게 된다. 나는 그가 누구든, 김대중 시절의 생태와 문화, 두 가지의 긍정적 측면들을 계승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DJ 정신은 통일을 위한 노력, 그 한 곳으로만 가두어두는 것은 좀 아닐 듯 싶다. 친북과 반북, 그런 것은 김대중이 했던 일의 아주 일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 2003년 12월 춘사 나운규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故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2. 역사 속에서 길을 잃다…

    김대중 시절에 시민단체 등 지도자급에 속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사회 원로가 되었다. 그들은 세상을 너무 민주/반민주 혹은 친북/반북의 틀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박정희에서 전두환을 관통하던 시대라서 이해는 간다. 나는 그들과는 속해있는 시대가 좀 다르고, 통일을 하면 도움이 되겠지만, 북한도 우리가 관계하는 수 많은 나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 눈에는 친북/반북은 친미/반미만큼이나 우스꽝스럽고 와 닿는 바가 하나도 없는 개념이다. 할아버지들은 그게 진짜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전혀 와 닿지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 밑으로 내려가면 이젠 "통일 하지 말자"는 전혀 새로운 흐름의 새로운 세대가 있다. 직접 물어보면 처음에는 "통일 해야죠"라고 대답을 하지만, 사석에서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면서 솔직한 얘기를 시작하면, 취직이나 되면 좋겠다, 방송국에서 PD나 더 많이 뽑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들이 대세다. 그 때쯤 다시 통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정말 귀찮은 듯이, 안 되는 게 좋겠어요, 머리 복잡해요, 이렇게 대답을 한다. 할아버지들에게 그 얘기를 전해주면, 진짜 실망스러운 표정이지만, 그게 현실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경제 개편의 실패가 한국을 일본식의 격차사회로 이끌게 되었고, 인정하든 인정하기 싫든, 지금의 10대와 20대는 그 1차 피해자다. 그들에게 김대중의 통일 사업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입 아픈 얘기이고, 평가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관심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가 옳았냐, 틀렸냐, 그런 논의가 벌써 조선일보와 시민사회 원로 사이에서도 격론이지, 대중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거기에 아무 관심 없다. 그들이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전쟁기념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발표하던 순간, 전쟁의 공포를 직접 느꼈던 그 순간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다시 망각되는 데 1주일, 한국은 1주일이면 모든 것이 잊혀지는 나라 아닌가?

    ▲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친북/반북의 잣대로 가르게 된 사건,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당시.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은 빨갱이다, 전라도 깽깽이다, 이렇게 소리치는 종이신문들도 20대는 거의 구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서, 통일의 일꾼이며, 남북화해를 이끌어낸 사람이라고 외치는 시민단체, 이런 데 회원도 거의 가입하지 않는다. 박정희에 관심 없는 것만큼이나 김대중에게도 관심 없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묵은 지역감정도 한국의 20대에게는 별로 관찰되지 않는다. 그들이 아는 것은 서울이냐, 아니냐, 즉 인서울이라는 용어와 지잡대로 싸늘하게 나누어지는 경계선 밖에는 없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김대중에 대한 평가도 친북/반북에서 놓아줄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그의 시대도 조금 더 문화정책이나 복지정책, 그런 세밀한 것들의 시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 같다. 통일을 빼면 김대중에게 뭐가 남는가? 채로 탈탈 털어서 남은 게 있다면 그건 그가 잘 한 것이고, 남지 않은 것은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원로는 좌우 막론하고 10대와 20대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아무래도 할아버지들이 질 것 같다. 김대중 시절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할아버지들은 지금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는지, 도통 감을 잡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의 20대 내에도 통일파가 있고, 주사파들도 있다. 그리고 민중파도 있다. 주사파든, 민중파든, 아니면 시민파든, 그들 역시 자기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렇게 고립되어 있는 건, 대학생 뉴라이트 조직도 마찬가지이고, 강성 교회파도 역시 고립되어 있다. 좌든 우든, 정치조직이든, 종교조직이든, 취직과 스펙을 한치라도 벗어나는 얘기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고사의 길로 가는 게 냉정하지만 지금의 현실이다.

    10년만 지나면, 지금의 원로들은 사라질 것이고, 지금 내 또래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지만, 실제로 한국의 현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좌나 우나, 서로 혀를 끌끌 차는 바로 지금의 20대가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하기에는 아직은 좀 이르고, 10년 후에는 진짜 냉정한 평가가 나올 것이다. 그들이 과연 뭐라고 할지 궁금하시지 않은가? 내가 이해하는 바가 맞다면, 10년 후에는 이런 책을 준비하고 기획하자는 말도 꺼내기 어려운, 또 다른 벽을 만나게 될 것 같다. 과연 그 때까지 종이 책이라는 이런 양식 자체가 살아있을지도 불투명한 게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 원로와 20대 대중은 만날 일도 없고, 볼 일도 없고, 서로 관심도 없다. 누군가는 길을 잃은 것인데, 지도자와 대중, 둘 중의 한 쪽이 틀렸다면, 이 때는 지도자가 틀렸다고 가정하는 게 내가 학문하는 방식이다. 지금의 경우는? 물론 지도자들이 틀렸고, 10대와 20대는 이상한 역사의 피해자일 뿐이다. 통일/반통일, 이건 젊은이들에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날 선 듯이 보이는 친북 논쟁과 통일 논쟁, 모두 5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 얘기에 불과한 게 2011년의 한국이다. 분단시대가 한 때 한국을 가르는 키워드였다면, 지금은 빈곤시대, 이게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수 년 전부터 우리는 저축률 자체가 마이너스로 돌아갔고,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계산해보면 가구당 평균 부채가 5000만 원이 넘어가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런 판국에 분단시대가 사람들에게 안 먹히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내가 김대중 시대를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2011년 한국이라는 공간 특히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는 공간에서는 김영삼이든, 김대중이든, 그런 논의 자체가 서 있을 곳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원망할 수도 없고, 또 원망해서도 안될 것 같다. 대학생들에게 김대중 시대의 평가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고, 의견들을 좀 내보라고 부탁했다. 그들에게 들은 진짜 정답은 간단한 하나의 문장이다.

    "선생님, 요즘 먹고 사실 만한가 보네요, 그런 쓸 데 없는 일을 다 하시구요."

    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김대중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는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시대의 평가인 셈이다.

    ▲ 2008년 노벨상 수상 8주년 기념강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우석훈은 1968년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대환경연구원(1996-1999), 에너지관리공단(1999-2003), 초록정치연대(2003-2005)에서 일했다. 지금은 2.1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document.onload = ini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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