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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세웅 신부, "정치든 종교든 모든 권력에는 악성이 있으니…" (프레시안)

    본문

    정치든 종교든 모든 권력에는 악성이 있으니…

    [김대중을 생각한다]<23> 그분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큰 나무를 지탱하는 숱한 뿌리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이사야 53,10)

    김대중 대통령의 한평생 고난의 길을 저는 이사야 예언서 "야훼의 종"의 이 네번째 노래 와 연계하여 묵상하곤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2009년 8월 23일 동작동 현충원 안장식 때 제가 올렸던 기도의 한 토막을 다시 상기하며 그분의 영원한 삶을 기립니다.

    하느님,
    저희는 김 전 대통령을 큰 나무에 비유하며 칭송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이렇게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 큰 나무입니다.
    이에 저희는 이 순간 그 큰 나무를 지탱했던 땅 속의 숱한 뿌리들,
    익명의 모든 민족민주통일 동지들과 은인들을 기억합니다.
    이 모든 익명의 은인들과 희생자들을 기억하시어
    이들 모두 주님의 은총 속에 영원히 살게 하소서. ……

    큰 나무는 그 우람한 둥치와 가지만큼의 뿌리와 숱한 잔뿌리들이 땅속 깊이 그리고 넓게 자리를 잡아 지탱됩니다. 큰 나무를 칭송할 때마다 우리는 땅속의 뿌리를 기억하는 아름답고 겸허한 자세 그리고 넓은 마음을 지녔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큰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 큰나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합니다. 생명의 첫 씨앗, 뿌리내리고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큰 나무의 참 가치가 확인됩니다.

    때문에 저는 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특히 어머니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마음깊이 되새깁니다.

    어머니는 존재론적으로 우리의 스승이며 종교와 사랑, 성스러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남산 중앙정보부, 그 뒤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고 1980년 5월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겸임하여 장악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지하 수사실에서 두어 달 고초를 겪을 때 김대통령의 가족사를 수사관들이 모욕적으로 언급하며 그 인격을 짓밟는 비참함을 힘없이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면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던 성모마리아를 떠올리면서 어두운 시대를 고민하며 눈을 감고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이제, 고통을 이겨낸 분들과 함께 영광을 확인하며 모든 어머니들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특히 뿌리로 상징되는 익명의 모든 동지들을 가슴에 모시고 보다 아름다운 내일을 노래합니다.

    첫 만남,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연대와 일치

    ▲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1973년 제가 연희동성당 보좌사제로 사목하던 중 그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고 8월 13일에 그분이 생환된 후, 저는 그분의 친척 수녀님과 교우들, 그리고 친지들과 함께 동교동 집을 방문하여 그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이후 그분의 큰아들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인권회복과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같은 신앙인으로 그리고 역사적 동반자로 고인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비체의 일원으로 일치와 연대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과 지학순 주교님 구속사건 이후 명동성당에서 거의 매 월요일 저녁에 인권회복미사를 봉헌했는데 그분께서도 가끔 미사에 오시기도 했습니다. 1975년 응암동 성당에서 사목할 때 그분은 비서인 김형국(요셉)씨의 세례 대부로서 미사에 오셨기에 자연스럽게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6년 3·1절, 명동성당에서 미사봉헌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으로 그분과 함께 저도 구속되어 감옥생활을 함께 하면서 더욱 가까운 동지가 되었습니다.

    1976년 3월 10일 밤 서대문 구치소에 도착하여 모두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각 방으로 헤어지는 순간 저는 바로 이곳에서 고통을 당하셨던 순국선열들을 떠올리며 성경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되새기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분은 "신부님, 그 성경을 제게 주십시오. 신부님께서야 성경을 다 아시잖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주춤하며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제가 품고 있던 제 심장과 같은 성경을 그분께 드렸습니다. 그분이 영적으로 더욱 건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께 가장 큰 선물을 드린 셈입니다.

    당시 저는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가장 어렸고 다른 분들은 40-60대의 연령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속된 지 2개월 후부터 1심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토요일에도 법정이 열렸던 시절이었는데 다른 모든 법정을 폐쇄하고 오직 우리 3·1사건 관계자들만을 위하여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특별재판을 열었습니다. 서대문 구치소에서 정동에 있었던 대법원 법정까지 호송버스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안부를 묻고 재판에 임하는 자세 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모두 함께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이때뿐이니 그 만남은 참으로 귀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님들께서 부인들과의 면회소식을 전해주시면서 부부 삶에 관한 담소를 하시던 중 다소 원색적 표현을 하시며 기쁘게 웃으셨습니다. 저는 못 들은 척하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때 그분은 "아니, 목사님들이 신부님들 앞에서 그렇게 무례하게 말씀하시다니 안되겠습니다. 목사님들 크게 반성하셔야겠습니다. 그 이유만으로도 감옥에 더 계셔야겠는데요!" 하시면서 어색해하던 저희 사제들을 위해 분위기를 확 바꾸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들은 "죄송합니다. 크게 잘못했습니다." 하고 모두 웃으셨습니다. 사제에 대한 신자로서의 그분의 아름다운 배려를 저는 지금도 가끔 웃으면서 기억합니다.

    변호인 반대 신문하는 어느 날에 저희는 피고인 자리에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적도 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저녁 8시까지 그분 혼자 진술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이 진술이지 그것은 법정에서의 정치 강연이었습니다. 특히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 참가했던 각 지역과 도시, 그리고 군중들, 사망자, 구속자 그리고 출동한 일본군경들의 숫자를 몇십만몇명, 몇천몇백 등 끝자리까지 숫자를 일일이 나열했습니다. 판사들은 물론 검사들까지 기가 막혀 얼을 빼앗기고 있던 터였습니다.

    점심식사 중 쉬는 시간에 하도 궁금해서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그 많은 군중의 수를 끝자리까지 다 외우십니까?" 그랬더니 그분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신부님, 이거 비밀인데요, 신부님께만 알려드리는 겁니다. 전들 어떻게 그 많은 숫자를 끝자리까지 다 외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웅변술인데 큰 수치만 외우는 거예요. 예를 들어 3·1운동 참가자가 2,023,098명인데 이 경우 이때 200만명만 외우는 거예요 그리고 연설할 때는 200만을 확실히 언급하고 그 다음 숫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아무 숫자나 열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압도당한답니다. 이것이 강연술이랍니다." 그날 저희는 놀라운 웅변술을 배웠기에 너무 기뻤습니다.

    법정에서는 판사들이 가끔 휴식시간을 취하는데 그때에는 저희도 잠시 쉽니다. 늘 같은 교도관들이 양 옆에서 둘씩 저희를 호송했는데 쉬는 시간에 한 교도관이 "선생님, 선생님께서 후에 대통령이 되시면 저희의 열악한 처지를 꼭 기억해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분은 "그래요 여러분의 어려움을 이렇게 직접 보고 있어요. 그 말을 꼭 염두에 두겠소."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과연 그분은 대통령이 되신 후 교도소 환경을 인권적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개선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끔 교도소를 방문하게 되는데 교도소 환경이 너무 아름답게 변해 이제는 호텔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개선입니다.

    우리는 1년 10개월만인 1977년 12월 말에 모두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분은 1년이나 더 감옥에 계셨습니다. 출소 후에 문익환 목사님, 김승훈 신부님 등이 주축이 되어 그분과 늘 같이 하시며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 5월 이른바 계엄령 전국 확대조치와 함께 우리는 모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고 그분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아 또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구명을 위해 전심전력했습니다.

    그 뒤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그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우리 사제들은 늘 그분과 뜻을 함께 하며 지내왔습니다.

    신심 깊은 신앙인

    김대중 대통령은 참으로 대단한 분입니다. 상고 출신자이지만 그분의 해박한 지식에 모두들 경탄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때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분은 장면 박사를 대부로 모시고 가톨릭에 입문한 그리스도인으로 한평생 신앙을 잘 간직하며 실천한 분입니다. 특히 일본에서의 납치와 살해미수과정에서 예수님의 은덕으로 살아났다는 그분의 증언은 그 자체가 부활체험으로, 그분 미래 삶의 길잡이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의 흠을 꼬집어 낸다면 전문가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더 많이 듣고, 참고했으면 얼마나 더 훌륭하셨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인들과의 대화중 시대적 고민, 신앙적 체험을 나누는 자리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 약자를 돌보시는 분,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자원적 희생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신앙관을 열정적으로 피력하시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또 변호사들과의 대화에서도 법에 대한 일종의 강의를 하니, 김대통령을 만나고 난 후 자존심이 강한 법조인들은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우리 사제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무조건 높이 평가하고 사랑했기에 김대중이 바로 민주주의의 길잡이이며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라도 그분의 생각과 뜻에 반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경계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교회공동체 안팎에서 김대중의 든든한 보루로서 그분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그 후임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같은 지지를 보냈지만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송금에 대해 특검조사를 펼칠 때에는 강하게 반대했고, 이 때문에 우리 중 한 사제는 2003년 6월 10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에 첫 번째로 맞이한 6·10항쟁 기념사 중에 노무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언제나 떳떳하게 십자성호를 그으며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냈기에 이 점에 대해 저희는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70·80년대 유신체제와 신군부 독재 때 김대중 대통령은 공적으로는 가톨릭 주교들과 평신도 단체로부터 많이 소외당했습니다. 구체적 한 예로 가톨릭에 꾸르실료라는 단기신앙수련과정이 있는데 서울의 꾸르실료 간부진들이 모두 권력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라 김대중씨를 거부하여, 결국 유바오로 라는 분이 대전교구장 황민성 주교에게 간청하여 어렵게 대전에서 꾸르실료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꾸르실료 간부진들의 이러한 방해에도 상관치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신앙의 길에 늘 충실했던 분입니다. 이 점을 저희는 높이 평가합니다.

    평양방문에서도 가톨릭 신자로서 김대중 대통령은 아침식사 때 십자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를 바친 모습이 전 세계에 TV로 방영되었는데 이 점을 선교사들은 매우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꾸르실료를 받고 난 후 1980년 5월 장충동에서 대중연설 도중 그는 신앙열기에 도취되어 "예수님은 바로 나의 형님,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형님입니다!" 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전 언론이 이를 꼬집고 비웃으며 비틀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꾸르실료 단기수련과정은 3박4일 동안의 신앙강화특별교육으로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시계도 없이 일정표도 알려주지 않은 채 하루 24시간 교육과정을 따라 신심을 심화시키는 강력한 심리수련영성방법으로 "그리스도는 오직 당신만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당신만을 고대하십니다." 는 등의 강력한 메시지 주입과 함께 바로 그 자신이 선교의 중심, 세계의 중심, 교회공동체의 초석임을 깨닫게 하고 입력시키는 교육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 대해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맏아들로서 우리의 맏형이 되신다는 적극적 논리로 하느님 중심의 구원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그 구체적 근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로마서 8,29)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마르코14,36)라고 부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성과 평등사상을 지니셨던 그분은 이 교육과정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형님이 되신다는 대목에서 큰 감동을 받으셨고 이 신앙적 감동을 장충동 광장에서 대중연설 때 고백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물론 때와 장소를 구분치 못한 것은 흠이기도 합니다. 대중강연 때 그러한 고백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1980년 5월 계엄사 합수부 지하실에서 조사받을 때 수사관 한 사람이 느닷없이 "김대중은 나쁜 놈이오! 아니, 글쎄 예수님을 형님이라 부를 수 있소? 안 그래요?"하고 윽박지르며 제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꾸르실료교육 과정을 알려주면서 성서신학적으로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차분차분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사관은 "아니, 당신은 뭐든지 김대중의 말이라면 다 옹호하니 어이가 없구려. 아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지 형님이 뭐요?" 하고 제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끝까지 웃으면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우리 신앙인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분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신앙체험의 한 면입니다.

    ▲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김대중도서관

    감격의 대통령, 그러나 대통령애 대한 실망과 좌절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1997년 12월 19일 새벽, 저는 텔레비젼 앞에서 눈을 감고 하느님께 정성된 마음으로 기도 바쳤습니다. 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으리라 확신합니다. 눈물의 감사기도, 그 밤의 감격스러움은 바로 제2의 해방, 제2의 출애급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아름답게 확 바뀌어지리라 확신하며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 꿈이 너무 컸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꿈은 반쪽의 꿈, 그리고 또 헛꿈이기도 했습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원죄처럼 남아있습니다.

    김대중, 참으로 그는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와 희망의 상징, 아니, 민주주의 그 자체이며 우리 모두의 길잡이 그리고 선택의 기준이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우리 사제들은 두어 차례 청와대를 방문하여 그분과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두어번 모두 우리 사제들은 대통령께 대한 기본적 예의를 갖추며 매우 정중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현안에 대해 직언을 드린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청주교도소에서 사형수로 계실 때, 감방에서의 그 마음, 감방에서 하느님께 바쳤던 그 기도의 자세로 매일 매순간 모든 정치현안을 다루어주십사 청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개진하여 설명 드렸습니다. 집권 초기에 김중권 비서실장 임명, 야당 국회의원 빼가기, 박정희기념관 설립지원 약속, 민주인사들을 배제한 기존의 때 묻은 관료와 정치인 그리고 공직자들의 요직 임명 등 이러한 정치행태를 보면서 실망과 좌절 그리고 배신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외교정책과 무엇보다도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대화는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구제금융위기의 대처방안 등에 대해 우리 사제들은 크게 염려하고 있다는 점, 경제위기 극복이 오직 경제가 첫째라는 논리로 접근하니 이것은 오히려 인간을 경제에 예속시킨 자본주의의 비인간화 정책임도 지적했습니다. 경제도 민주주의에 기초한 인간을 위한 한 방법일 뿐입니다. 인간을 위한 경제라면 집권 초기에 무엇보다도 그 동안 만연했던 온갖 부정부패의 청산은 물론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체제하에서 국민을 억압하고 탄압했던 정치인, 관료들을 먼저 색출하여 잘못된 과거정치와의 분명한 단절과 역사적 청산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민주인사 탄압의 주역들이 김대중 정부 하에서 버젓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닙니까?

    이런 모습을 보면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친일세력이 오히려 미군정과 자유당정권에서 요직에 앉고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했던 사실, 곧 반민특위가 이승만에 의해 해체되었던 뼈아픈 그 과거와 너무도 똑같아 분노가 솟구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것은 이러한 비빔밥 같은 정권의 창출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께서 이룩하신 긍정적 업적이 물론 많습니다. 그것은 모두 정직과 진실을 바탕으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바로 정직한 정책 그리고 일관된 정책만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누더기가 된 인권위법, 아직도 표류 중에 있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의문사진상위도 그렇습니다. 한 법조인의 말에 의하면 의문사진상위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며, 참으로 만일 대통령이 진상규명의 의지를 갖고 있다면 검찰에 재수사 명령만 하면 된답니다. 그런데 수사권도 없는 의문사 진상위가 아무리 불철주야 뛰고 애써보아도 결국 명분뿐이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또한 정기간행물법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여당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면 됩니다. 올바른 법제정이 바로 언론개혁의 지름길입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대통령의 의지가 정직하고 사심이 없다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정치적 수완도 결국 정직과 정의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동진정책 추진에 대해서도 지역차별 타파와 화합은 바람직하지만 영남인사를 선택할 때의 기준이 모호합니다. 영남인을 선택하되 엄혹한 독재시대 민주주의를 위해 고난 받고 독재에 항거하여 싸운 인사들을 선임해야지, 독재정권에 동조 했던 분들을 기용하는 것은 대통령께서 살아오신 여정과 정신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호남 인사들을 기용하실 때에도 단순히 호남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인사들을 우선적으로 선임해야 하는데 대통령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호남인들은 대부분 제3공화국 이후 군부독재정권 때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더구나 호남인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호남인을 홀대했던 그런 분들이 이제는 호남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선임되었으니 이것은 모순입니다.

    성균관대의 서중석 교수는 한국인의 2중적 구조를 지적하면서 도대체 이 세상에 이런 정부, 이런 정당이 어디에 있는가 하며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그 구체적 정치현실의 예로, 전 세계 정치 역사상 한국과 같은 정당정치 형태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폭압의 대명사인 중앙정보부장 출신과 그로부터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민주인사들이 한 정당 안에서 동거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이념도, 철학도, 그 어떤 정치적 도덕기준도 없이 총재 하나에만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는 이런 정당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박정희기념관 건립 추진 등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항변한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로 일본이 우리를 비웃을 일입니다.

    이제는 대통령이 되셨으니 좀 껄끄러운 일이 있으셨더라도 김상현 의원 등 옛 민주화 동지들을 과감하게 껴안고 손잡아 함께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물론 잘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큰아들 김홍일 국회의원의 역할과 두 아들 또한 친인척들의 처신이 더욱 신중해야 함도 조심스럽게 언급했습니다.

    우리 사제들의 직언에 대해 김대통령은 자민련과 공조한 정권창출의 태생적 한계와 민주인사들의 실무행정 부족 등을 핵심적 이유로 꼽으며 좀 언짢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여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날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한계와 권력의 속성을 새삼 체험하며 이제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할 때임을 깨달았습니다.

    2007년 가을경으로 생각되는데 김대중 도서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행적평가에 대한 토론회에 논평자로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발제자와 토론자 등 모든 분들이 하나같이 김대중 대통령의 행업을 칭송하고 더구나 영성적으로도 매우 뛰어나다고 외국인 교수도 몇 가지 사례를 들며 높이 평가했습니다. 저는 그날 모든 분들의 긍정적 평가를 다 전제하고 논평자로서 악역에 충실하기 위해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1987년 이른바 양김 분열, 김대중ㆍ김영삼 두 후보자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역사적으로 엄청난 죄였음을 지적하고 이 점에 대한 김대통령의 진솔한 고백과 성찰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둘째, 독재자 박정희를 용서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김대중 대통령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과 연계되는 것은 역사적 큰 과오임을 지적했습니다. 박정희로부터 살해당한 분들의 가족과 자녀들, 박정희로부터 탄압받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개인과 가정, 공동체의 삶의 터전을 잃고 심적, 외적 큰 상처를 받은 그 숱한 익명의 희생자들, 그분들의 몫을 김대중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가로챈 것임도 지적했습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주도한 신현확이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밝혀야 할 뿐아니라 유신독재치하에서 목숨을 잃고 고통당한 익명의 모든 시민들과 논의를 해서 결정할 역사적 민족적 과제를 김대중 대통령은 지나치게 단순화, 사사화(私事化)했음도 지적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용서와 기념관 건립이 숱한 익명의 민주시민, 선의의 민초들의 마음에 못을 박은 일임을 역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하느님의 영역, 종교적 영역임을 되새기면서 근원적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셋째,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구시대, 독재시대의 인물들을 기용한 점과 5·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들에게만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춘 배상법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넷째, 정권말기에 거론된 옷 로비와 두 아들의 비리와 관련 구속된 사실을 열거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행업은 이 모든 것과 연계하여 더욱 냉철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사실 저는 2007년 2·28대구학생의거행사에 참석하여 여러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그중 몇 분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대구와 경상도에도 민주화의 새바람이 불어오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독재 때의 인물들, 이용택, 엄삼탁과 같은 사람들이 중용되고 있으니 이것은 기막힌 모순입니다. 저희는 40여년을 기다려왔는데 민주인사들은 계속 외면당하고 불의한 독재정권의 아부자들만이 판을 치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저희는 너무 실망했고 이제 희망의 불씨마저 다 꺼져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제 가슴은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민초들의 이러한 마음을 김대중 대통령은 과연 헤아리고 계셨을까? 라고 생각하니 제 마음 깊은 데서 분노와 슬픔이 겹쳐 솟구쳐 올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우리 사제들은 정치현실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하며 우리 사제들의 역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교회공동체 내부의 쇄신과 회개를 위해 더욱 힘을 모으고 특히 북한동포돕기와 환경보존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에 불거진 두 아들의 구속사건을 대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고 또한 부끄러웠으며 더욱더 정치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의 화신(化身)인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퇴임 후인 2004년 9월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창립 30주년 행사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졌는데 이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께서 함께 오시어 축하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30년을 함께 살아온 민주화 동지와 또 같은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날 이후 우리 사제들은 다시 김대중 대통령을 눈여겨보았으며 특히 그분이 선종하시기전까지 모든 모임에서 늘 남북의 일치와 화해, 오직 북한과의 일치만을 역설하시는 모습을 보며 "참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고 다시 칭송했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 신앙을 말하듯 그분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언제나 어떤 모임에서든지 남북의 일치와 화해만을 말씀하시고 오로지 북한을 돕자고 하셨습니다. 이점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전과 역사적 평가는 훨씬 더 뒤에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확 바뀌리라는 저의 생각과 바람은 그저 한낱 꿈이었음을 깨달았고, 권력이란 종교든 정치든 그 자체로 악성을 지니고 있음도 뒤늦게 확인했습니다.

    이제 저는 사제로서 교회구조의 권력, 곧 그 악성을 제거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아나키즘에 더욱 매력을 느낍니다.

    일체의 체제와 제도,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은 그 자체로 신선하며 하느님의 성령과 상통하는 초월적 가치임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존재인지라 과연 체제와 제도, 권력을 넘어 살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저는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 논리로 접근하여 종합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그분의 삶이 아름다운 대전제(thesis, 명제)였다면, 그분의 대통령 집권기간은 우리에게는 반명제(antithesis)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이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분이 몸 바쳐 추구했던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한 열정을 저는 아름다운 종합(synthesis)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가 있게 마련인데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은 그분 생애의 금자탑이라 칭송하고 싶습니다. 저의 개인적 염원은 그분이 사형수로서 감옥에 계셨을 때의 그 순수한 지향으로 대통령 시절에 그보다 훨씬 더 잘하실 수 있었고 또 마땅히 더 잘하셨어야 했는데 그 점에 미치지 못한 큰 아쉬움을 늘 마음에 안고 살고 있어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이 점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금 4대강을 불법적으로 파헤치며 온갖 비상식적 반인권적 정책을 펼치고 있는 이런 대통령과 함께 살아야 하는 근본원인도 따지고 보면, 결국 전직 두 분 대통령이 분명한 정의의식과 역사관 그리고 공동체와 공동선에 대한 철저한 책임의식을 체화시키지 못한 한계와 우리 모두의 시대적 책임임을 함께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실천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히 이제 우리는 모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두 분을 능가하는 창조적 가치를 되새기며 더 아름답고 참신한 후대 정치인의 출현을 꿈꾸며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창조성을 노래합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리스도인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론상 불가능하겠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가능하다고 그 앞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창의적 개방성, 무한한 잠재력, 바로 여기에 인간 존재의 힘과 의미 그리고 뜻과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창조적 존재가 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필자 함세웅은 1942년 서울 출생으로 유년기에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됐다. 1965년 가톨릭대학을 수료하고 바티칸으로 유학을 떠나 1968년 사제 서품,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신학석사, 1973년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연희동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응암동성당 주임, 1974년부터 가톨릭대학 교수로 일했다.

    1974년초 지학순 주교 등 각계 인사들이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대거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창립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76년 명동 3.1구국선언으로 구속되는 등 군부독재 하에서 2차례 옥고를 치렀다.

    1987년 6월민주항쟁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으로 일했고 1989년에는 평화신문ㆍ평화방송을 창립, 초대 사장을 지냈으며 장위동성당 상도동성당 제기동성당 주임신부로 일했다. 2004-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청구성당 주임신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document.onload = initFont();

    /함세웅 가톨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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