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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 중앙대 명예교수, "한일국교정상화를 지지한 그 용기의 비밀은" (프레시안)

    본문

    한일국교정상화를 지지한 그 용기의 비밀은

    [김대중을 생각한다]<9>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삶

    내가 김대중을 훌륭한 지도자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4.27대통령 선거 때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임을 마치고 1969년에 삼선개헌을 하여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데 야당인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선거일 열흘 전쯤인 4월 18일 장충단 공원에서 약 백만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김대중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그 때 그는 두 가지를 특히 강조하였다. 하나는 이번에 정권교체가 되지 않으면 선거조차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안정과 통일은 남북대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미중일소 등 4대국 보장에 의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틀 뒤인 4월20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규모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박정희 후보의 유세가 있어 여기에도 가 보았다. 그는 총통제 운운은 정치적 흑색선전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이번만 당선시켜주면 "다시는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이번이 대통령으로서는 마지막 봉사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3선에 성공한 다음 해인 1972년 10월에 유신헌법으로의 개헌을 강행하였다. 이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고 대통령은 사실상 관선이나 다름없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임토록 했다. 이렇게 선임된 대통령은 임기 6년에 연임할 수 있고 국회의원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국회 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갖도록 하여 입법 행정 사법 등 3권을 장악하는 영구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김대중의 말이 그대로 적중했으며 특히 그 때의 4대국 안전보장론은 남북 당사자를 합한 오늘의 6자회담과 같은 것이어서 그의 선견지명이 놀라웠다.

    그후 미국유학 중에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을 접했다. 그 때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연일 이 사건을 톱뉴스로 보도하였다. 내게는 한국에 민주화가 왜 필요한가를 절실하게 되새겨보는 계기였다. 그 뒤 1979년의 12.12쿠데타와 다음 해의 광주 민주화의거, 그리고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 등을 지켜보면서 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당시 중앙대 정경대학장으로서 학생들의 반정부 데모를 지지하고 데모에 참여한 학생들의 처벌에 끝까지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김대중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그로부터 한국은행 총재 임명장을 받을 때였다. 그리고 내가 한은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그 분을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김대중에 대한 전체 모습, 특히 그의 인간적인 면면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였다. 그의 자서전을 읽고 느낀 바를 여기 간추려 보고자 한다.

    김대중이 살아온 1924년부터 2009년까지의 시기는 한국의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혁과 발전의 시대였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나라를 찾았고 해방 후의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며 경제는 절대빈곤에서 선진화 단계로 이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은 모진 탄압과 박해 그리고 생명의 위험을 수없이 겪으면서 민주화와 인권, 평화와 남북통일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그가 겪은 파란만장한 경험과 비화를 담은 그의 자서전은 지나온 우리나라 격동기의 현대사이며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지침서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자서전을 읽고 하나의 자연인이 도대체 이렇게 모진 박해 속에서 살 수도 있는가, 그런 속에서도 어떻게 희망을 잃지 않고 그렇게 끝까지 뜻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따뜻하고 인간적인 성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이 죽음이라는 극한상황에 당면하게 되면 마음과 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김대중은 19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음이 정말 두려웠으며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기 전에 체중이 10kg이나 빠졌다고 했다.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 어느 날 보안사의 이학봉 대령이 와서 협력하면 형 집행면제 뿐 아니라 대통령 빼놓고는 무엇이든 줄 수 있다고 하였다는데 이를 거절하고 그대로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얼마나 고민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역사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어두웠던 시절 김대중과 뜻을 같이 했던 수많은 국내외 지식인과 종교인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그를 옆에서 지킨 사람들이 김대중과 함께 모진 박해와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이분들이 우리나라의 민주화 발전을 위해 바친 희생과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대중은 6.25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 때 공산군이 퇴각하면서 우익 수감자들을 총살하려고 집합시켜 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자동차가 고장 나서 다시 감방으로 되돌아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1973년 납치살해 미수 때는 몸을 세 군데로 묶고 두 팔에 쇳덩이 같은 것을 달아 물에 던지기 직전 예수님이 나타나고 납치범들의 상부로부터 어떤 지시가 내려와 살아났다고 했다. 차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또는 상부의 지시가 몇 분만 늦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김대중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지만 운도 따랐고 하느님의 가호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박해를 받고도 김대중은 집권하고 나서 이에 보복하기는커녕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큰 그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기를 그렇게 모질게 박해하고 탄압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공로를 인정하고 기념관 건립에 자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건립추진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자기를 구속하고 사형을 선고했던 전두환 대통령 등 신군부에 대해서도 화해와 용서로 다가갔다.

    김대중은 6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생활에서 한 가지 좋은 것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희호 여사는 약 6백 권의 책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토인비와 러셀의 역사, 칸트와 데카르트의 철학, 논어 맹자의 윤리, 톨스토이와 도스도엡스키의 문학 등 안 읽은 고전이 없을 정도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름만 듣고 읽어 보지는 못한 책들이다. 김대중의 연설과 글을 접할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지식과 경륜이 넓고 해박할 수 있는가 하고 감탄한 바 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이 모두 감옥의 덕이었고 탄압과 박해의 덕이었으니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위기와 불행을 자기발전의 기회로 역이용한 그의 슬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한 6.3사태 때 겪은 김대중의 고난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애국정신과 용기를 말해준다. 야당과 학생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한일 회담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촉망받는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은 그가 소속한 정당의 당론에 반하여 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국가 간의 관계는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어서는 안 되고 미래지향적이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대일관계의 정상화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한미관계 등 한국의 대외관계에도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군사정부의 앞잡이라는 몰매를 맞으며 따돌림을 당했고 심지어 자녀들까지도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지나고 보니 역사의 앞을 보는 혜안과 당리보다 국익을 앞세운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김대중은 평생 탄압받고 여기에 저항해온 정치지도자여서 감정이 메마르고 성품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미 넘치고 따뜻한 성품의 평범한 아버지이고 남편이었다. 밤에는 도깨비가 무서워 밖에도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렸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첫사랑을 느낀 여학생을 만나려고 그 학생이 다니는 먼 길로 돌아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수줍어서 오랫동안 말을 못했다고 썼다. 1972년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흠모를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1981년 김 대통령이 청주 감옥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때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던 큰아들 홍일로부터 축하 편지를 받고 가슴이 떨리고 회한이 벅차 몇 시간 동안이나 편지를 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희호 여사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은 이 자서전의 구석구석에 사무친다. 이 여사는 겨울에도 남편을 생각하며 냉방에서 살았다. 그리고 감옥의 남편에게 털옷과 털장갑을 손수 짜서 속옷과 함께 사랑의 향수를 뿌려 넣어 주었다. 김대중은 그 향수가 달아나지 않도록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 여사가 털장갑을 짤 때 장갑을 낀 채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검지에 구멍을 내준 것을 보고 김대중은 감격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자서전을 마치면서 아내 없는 삶이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썼다.

    1997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 다음날 아침 일산 자택 앞에 모인 군중들 앞에 나타나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답례하는 김 대통령 내외분의 사진은 그 동안의 모든 고난과 박해를 모두 녹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무거운 것이었다.

    IMF외환위기를 맞아 나라경제는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이러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뼈아픈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해야만 했다. 30대 재벌 중 14개, 33개은행중 20개만 살아남고 은행원의 42%를 해고하는 뼈아픈 경제수술을 통해 그는 1년 만에 경제를 살려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기업과 은행들은 빚을 털어내고 튼튼한 체질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뒤 많은 세계적 경제위기에서도 우리 경제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처럼 인터넷이 고속화되고 널리 보급된 나라가 없다. 이렇게 한국을 IT 강국으로 만든 것도, 기초생활자 보호 등 복지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그리고 그렇게 어려움이 많았던 의약분업을 밀어붙인 것도 모두 김대중 정부에서 해낸 일이다. 특히 남북관계를 대결관계에서 평화협력 관계로 바꾸어 놓은 것은 김대중 정부의 큰 업적으로 꼽힌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막혔던 남북 간에 사람과 기차와 자동차가 왕래하도록 했다.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시작되고 경의선과 동해안의 철도가 반세기가 넘어 다시 연결되었으며 개성에는 지뢰가 제거되고 남북협력 사업으로 개성공단이 문을 열었다. 분단 한국사에 큰 전환점을 그은 것이다. 특히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비화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읽는 것 같았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이러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2000년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으며 2009년 9월 <뉴스위크>지는 그를 중국의 덩샤오핑,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등과 같이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열한사람 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불우한 시대에 섬마을에서 서자로 태어난 그가 이러한 역사의 거인으로 성장한 비장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투철한 역사관과 소명의식, 확고한 애국애족 정신, 깊은 신앙심 그리고 그칠 줄 모르는 정렬, 이런 것들이 모두 그를 거인으로 성장시킨 힘이 되었을 것이다. 김 대통령이 퇴임한 뒤 나는 여러 차례 그를 만난 일이 있었다. 나는 그가 서거하기 직전까지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의 불길 같은 정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경제현안에 대해 설명을 할 때면 마치 초등하교 학생처럼 진지하게 듣고 메모하고 캐묻는 탐구욕은 그 나이에 그가 아니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김대중처럼 사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따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이것은 가장 값진 삶일 것이다. 모든 것을 타고 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이다. 그래서 그러한 삶은 백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살아서보다는 죽어서, 그리고 죽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을 받고 빛이 나는 삶일 것이다.

    * 필자 박승은 1936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은행을 거쳐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대 정경대 교수와 학장, 대학원장 등으로 일했으며 금융통화운영위원,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 건설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document.onload = ini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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