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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도별 기념식 자료

    16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6주년 - (Session 4) 김민환 |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본문

     


    1.들어가며


    1949년 진먼의 구닝터우(古寧頭)에서 전개된 전투는 진먼의 운명을 ‘냉전의 섬’이자 ‘열전의 섬’으로 바꿔놓았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은 중국대륙과 대만본섬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먼다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전 중국내전에서의 전투상황과는 달리 인민해방군은 구닝터우전투에서 국민당군에게 패배하게 된다. 구닝터우전투 패배 이후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은 재차 전쟁준비를 하였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진먼다오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군대가 한반도로 향하게 되면서 진먼다오에서 지상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1954년 9월 3일에 시작되어 1955년까지 이어진 9·3포격전, 1958년의 8·23포격전 등 지속적으로 진먼다오에 공격을 가하였다. 특히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인민해방군은 무려 47만발에 이르는 포탄을 이 섬에 쏟아 부었다. 1958년의 초기 포격전에서 200명에서 600명 사이의 군인 사상자와 140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58년 10월 6일 포격은 일단 멈췄으나, 그 다음날부터 1978년 12월 15일까지 홀수일에는 포격하고 짝수일에는 포격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포격은 홀수일 초저녁에 이루어졌는데, 진먼다오 주민들은 평상시의 삶을 계속하다 홀수일 초저녁이 되면 가까운 방공호로 들어가 몇 시간을 머물렀고, 그날 밤의 포격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방공호에서 나오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물론 이런 포격전에서 진먼다오의 대만군은 중국 푸젠성 샤먼에 주둔한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마찬가지로 ‘포격’으로 대응하였다. 이처럼 진먼과 샤먼은 냉전 시기 동아시아의 섬들 중 가장 격렬한 ‘냉전적 열전’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진먼과 샤먼은 서로 거리가 불과 1.8km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혈연적’으로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활권을 구성하고 있던 ‘형제의 섬’이었다. 무엇보다 16세기부터 동남아 여러 지역을 향해 갔던 중국인 노동력 이주의 ‘출발점’이었으며, 남중국과 동남아 지역의 해상무역과 교역활동 네트워크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두 섬 사이에 경계가 그어진 것은 두 섬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전히 중국대륙과 연계가 가능했던 샤먼에 비해 진먼은 대만과의 연계가 만들어지기 이전까지는 ‘양방향단절’ 혹은 ‘고립’의 상태에서 더욱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의 연계가 확립된 이후에도 1978년까지 지속적인 포격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군에 의한 시공간통제 및 소유물품통제가 일상화된 주민들의 “상처입은 생활경험”(江柏煒, 2007: 116)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것이었다.


    1979년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계기로 진먼다오와 샤먼 사이의 포격전은 중지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10년 이상 진먼다오는 ‘열전’만 없었을 뿐 여전히 가장 강고한 냉전적 ‘장벽’으로 남아 있었다. 1987년 대만본섬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되어 본격적인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만, 진먼다오의 경우, ‘적’과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지역이어서 1987년에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1990년을 전후로 해서 금문도에서도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는데, 마침내 1992년에 진먼다오에서도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이때부터 진먼다오는 ‘장벽’에서 ‘교량’으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2001년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대만독립’ 문제로 긴장이 높아졌지만, 진먼다오와 중국 본토의 푸젠성 샤먼 사이에는 소위 ‘소삼통(小三通)’(직항-通航, 교역-通商, 우편교환-通郵)이 실시되어 공식적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 ‘소삼통’의 경험 및 성과는 2008년 대만과 중국이 전면적으로 ‘삼통’을 실시하는데 있어 매우 소중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비록 공식적인 소삼통은 2001년부터 실시되었지만, 그 이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금문도와 샤먼 사이에는 이미 ‘밀무역’ 등 비공식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글은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장벽’에서 ‘교량’으로의 전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대만의 진먼과 중국의 샤먼 사이의 교류 양상과 경험을 살펴보고, 그것이 한반도의 상황을 성찰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삼통’이라는 생각의 출발: 1979년의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글(告臺灣同胞書)’


    중국은 1979년 진먼에 대한 21년 간의 포격을 중지하고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글’(告臺灣同胞書)을 발표한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회 상임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이 글은 중국과 미국이 수교한 후 일종의 ‘정전 선언’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글에 “우리는 쌍방이 빠른 시일 내에 삼통을 실현하여, 쌍방의 동포가 직접 접촉하고 친족을 만나고 여행하고 학술문화체육의 행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삼통’에 대한 공식적인 첫 언급인 것이다. 이후 1981년 8월 26일의 덩샤오핑 발언, 같은 해 9월 30일 예젠잉(葉劍英)의 발언 등을 통해 삼통에 대한 지속적인 의지를 표명한다. 중국의 이런 발표에 대해 대만은 ‘삼불정책(불접촉, 불담판, 불타협)’을 고수하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의 삼통 제안을 ‘중공의 통전음모’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남종호, 2009: 284).


    이런 정치적인 선언과 함께 중국은 개혁개방을 천명하며 1980년 3월 광둥성 선전(深圳), 산터우(汕頭), 주하이(珠海)와 푸젠성 샤먼(廈門)을 4대 경제특구로 개방하고 홍콩, 마카오, 대만 자본과 외자, 해외 화교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자 하였다. 선전이 홍콩을, 주하이가 마카오를 향한 창이었다면, 샤먼은 명백하게 대만을 향해 열린 창이었다. 만약 중국의 삼통 제안을 대만이 받아들였다면 샤먼에 대한 대만자본의 직접 투자가 이루어졌을 테지만, 대만의 ‘삼불정책’으로 인해 대만자본은 홍콩을 경유하는 간접적인 대륙 진출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내내 이런 방식으로 대만계 기업들이 대륙으로 진출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양안의 간접적인 민간교류와 그에 수반되는 제반여건의 점증적인 확대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중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통해 값싼 생산요소의 제공처이자 잠재적인 시장으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1990년대부터 양안무역은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고, 마침내 2003년에는 5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미·일·아세안을 제치고 중국대륙이 대만의 최대 무역상대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2006년에는 양안무역의 규모가 1,0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2013년에는 1,9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1979년의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중국정부가 대만에 대한 입장을 기존의 ‘해방’ 대신 ‘조국 회귀’라는 말로 평화통일 문제를 말하기 시작한 공식적인 출발점이다(우쥔팡, 2016: 236). 그 이전까지 중국은 진먼에 대한 포격전을 통해 양안관계를 국제문제가 아닌 ‘국내문제’로 묶어두려고 했다면, 이 시기부터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중국이 이런 관계 전환의 상징적인 단어로서 선택한 단어가 바로 ‘삼통’이었다. 이후 이 단어는 양안관계 진전방향의 틀을 형성했다.



    3. 대만의 변화조건: 1987년의 계엄해제와 민주화


    중국의 삼통 제안에 대해 대만이 ‘삼불정책(불접촉, 불담판, 불타협)’으로 대응한 것은 양안관계에서 대만의 취약성에서 기인한다. 1970년대 초 이래로 대만은 지속적으로 국제관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어 갔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 이전까지는 ‘중화민국’으로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접근,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에 의해 기존 ‘중화민국’ 정부의 지위는 모두 박탈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외교관계에서의 고립은 대만 사회의 위기감을 고조시켰고, 대만에서 국민당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의문을 갖게 하였다. 요컨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대륙과의 관계에서 보면 ‘열세’를 면치 못했던 대만의 입장에서 포격전의 중지와 중국에 의한 삼통의 제안은 그 열세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대외관계에서의 열세와 함께 대만의 국민당은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만인들에게 도전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79년 발생한 ‘美麗島사건(혹은 高雄사건)’은 국민당 1당독재에 저항하는 대만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비록 국민당의 탄압으로 대만의 반(反)국민당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향후 반국민당 세력의 결집 및 새로운 세대 충원의 계기가 되어 결과적으로 1980년대의 활발한 대만 민주화운동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1987년 7월 14일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대만은 본격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된다.


    대만의 민주화는 양안관계에 획기전인 전환을 불러 왔다. 1987년 중국출신으로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후퇴해 온 사람들에게 대륙의 친척방문을 허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친척방문의 과정에서 양안 사이의 ‘이질감’이 가시화되는 여러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큰 물줄기는 바꿀 수 없었다. 다만, 이 친척방문의 경우도 직항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홍콩 등을 경유하여 우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중국이 제안한 삼통의 직접적인 진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콩을 경유하는 양안 간의 기존의 물적 교류와 함께 본격적으로 인적 교류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양안교류를 질적으로 확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87년은 안보상의 이유로 미루어두었던, 푸젠성과 중국의 다른 지역의 철도연결이 이루어진 해이기도 했다는 점은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만약 국민당군이 대륙을 침공할 경우 그 상륙지는 당연히 샤먼과 그 인근 푸젠성 지역일 것이고, 따라서 푸젠성과 다른 지역이 철도로서 연결되어 있으면 국민당군이 대륙으로 신속하게 진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중국은 푸젠성과 다른 지역을 철도로 연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87년에 전격적으로 푸젠성과 다른 지역을 철도로 연결했다. 그 정도로 중국의 자신감은 날로 강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푸젠성과 마주보고 있던 진먼의 계엄은, 대만본섬과는 다르게, 해제되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었다.




    4. 진먼과 샤먼 사이의 교류


    진먼에서 계엄이 해제된 것은 1992년이었다. 진먼의 계엄은 저절로 해제된 것이 아니라 진먼 주민들의 반계엄 운동 덕분이었다. 진먼의 계엄령 해제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고도의 군사 통제에서 벗어나 지방자치를 통해 민주화를 완성한 것, 둘째, 냉전생태로부터의 회복, 셋째, 아마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바로 양안교류를 촉진한 것이다(鄭根埴·吳俊芳, 2015: 385-386). 진먼에서 계엄이 해제된 이후 비로소 진먼은 ‘장벽’에서 ‘교량’으로 그 역할을 바꾸게 되었다.


    1992년 계엄 해제 이후 진먼과 샤먼 사이의 교류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992년 계엄이 해제된 이후 2001년 소삼통이 실시되기까지의 비공식적 교류의 시기, 2001년 소삼통의 실시에서 2008년 삼통 실시 이전의 시기, 마지막으로 2008년 삼통 실시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가 그것이다.


    1) 1992-2000: 비공식적 교류 시기


    진먼과 마쭈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바로 그 해, 푸젠성은 ‘양문대개, 양마선행(兩門對開, 兩馬先行: 두 개의 門을 서로 개방하되 두 개의 馬부터 시자하자)’라는 소삼통 구상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양문’이란 중국 푸젠성의 샤먼과 대만의 진먼을, ‘양마’는 중국의 마웨이항과 대만의 마쭈항을 가리킨다(이종훈, 2009: 145-146). 푸젠성의 이런 구상은 당장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약 9년 뒤 현실화된다. 비록 진먼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공식적으로는 진먼과 샤먼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불법 삼통(밀수)”(우쥔팡, 2016: 239)이 이루어졌다. ‘불법 삼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품의 밀수이고 다른 하나는 ‘밀입국’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뉴욕 타임스의 기자는 진먼에서 소비되는 전체 물품의 약 60-70%가 밀수품인 것으로 추정하였다(Szonyi, 2008: 216).


    포격전이 진행되던 때 진먼에는 최대 17만 명 평균 10만 명의 군인들이 주둔했었다. 그런데 계엄이 해제된 이후 진먼의 실질적인 탈군사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금문에 주둔하던 군대의 철수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1983년에 이미 1개의 사단이 대만으로 재배치되었고, 이후에도 4개의 사단이 유지되었지만 병력의 수는 계속 감축되었다. 1993년이 되면 금문의 병력은 31,000명으로 감소하였고, 1997년에는 4개의 사단이 하나의 여단으로 축소되면서 병력도 16,000명이 되었다(박배균·김민환, 2015: 91). 이런 급속한 군 병력의 감축은 계엄령 시기 군사경제 혹은 기지경제에 의존했던 진먼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다를 엄격하게 통제하던 군 병력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진먼과 샤먼 사이에 ‘불법적인’ 거래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1990년대는 샤먼이나 푸젠성의 다른 도시들은 아직 개발 중이어서 부유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중국의 위안과 대만의 달러 사이에는 환율 차이가 있어 밀수는 진먼과 샤먼 양쪽 모두가 이익을 얻는 행위였다. 진먼 주민들은 샤먼에서 음식과 생활필수품, 대리석 같은 건축 재료를 더 싸게 밀수할 수 있었고, 샤먼 주민들은 중국에서 파는 가격보다 비싸게 팔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의 밀수는 양쪽에서 배를 타고 와서 바다 위에서 이루어진 반면, 2000년에 진먼 해안 경비가 해군에서 해안경비대로 이관된 이후부터는 샤먼 사람들이 진먼의 해안가로 와서 거래를 했다고 한다(Szonyi, 2008: 216).


    이런 물품 외에 또 다른 형식으로 ‘밀수’한 것이 바로 부동산이다. 소삼통이 시행되기 전에 진먼 주민들 중 일부는 몰래 어선을 타고 샤먼으로 가서 부동산에 투자한 경우도 있었다. 이 밀항은 1시간 반이 걸리는 비교적 긴 여정이었고, 위험도 많았지만, 당시 개발 중이었던 샤먼은 도시 곳곳에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기에, 샤먼 부동산 시장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건물을 보지 않고 부동산을 구입한 사람도 종종 있었다. 1제곱미터 당 4,250위안으로 구입한 집이 지금은 1제곱미터 당 40,000위안으로 값이 뛰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2) 2001-2008: 소삼통과 ‘예외공간’적 특권의 시기


    ‘불법 삼통’이 거리낌 없이 실시되던 1999년 진먼 현장(縣長)인 천수이짜이(陳水在)는 “진먼 주민에게는 더 이상 전쟁 위험이 없다. 진먼이 양안의 평화적인 교류와 협상의 실험도(實驗島)가 되기를 바란다”(우쥔팡, 2016: 244에서 재인용)고 선언하였다. 마침내 2001년 1월 1일, 중국과 대만의 정부는 양안관계를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대만의 진먼과 마쭈, 중국의 샤먼과 마웨이 사이에 무역, 우편, 화물의 직접적 교류를 허용하는 소삼통 실시를 선언하였다. 소삼통은 1949년 이래로 진먼과 샤먼 사이에 놓여 졌던 장벽의 높이를 급격히 낮추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 관광객의 진먼 방문이 허용되었다. 이제 진먼은 대만 본토의 관광객 뿐 아니라 중국의 관광객 또한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소삼통을 통한 이러한 변화는 진먼이 냉전 시기의 고립과 영토적 단절의 상황에서 서서히 벗어나, 양방향을 향한 흐름의 경제로 재접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박배균·김민환, 2015: 92).


    무엇보다 ‘소삼통’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던 시기에 실시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컸다.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서 국민당에 대항하는 정당으로 출현한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은 1980년대 말부터 ‘대만독립’의 노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여기에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당의 리덩후이(李登輝)는 개인적으로 ‘대만독립파’로 입장을 선회해서 국민당 내외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1996년 미국을 방문해 대만과 중국은 별개의 국가라는 ‘양국론’을 제기했는데, 이는 대만해협의 ‘미사일 위기’로까지 이어졌으며, 1999년 총통선거 국면에서 국민당을 탈당하고 ‘대만독립파’ 진영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의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이 승리하였다. 민진당 정부는 2002년 ‘일변일국(一邊一國)’을 제기하여 독립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니까 소삼통이 실시되던 2001년 전후는 대만에서 독립론의 기운이 급격하게 치솟던 시기였고, 여기에 대해 중국은 ‘미사일 위기’에서 ‘반국가분열법’으로 대응의 수위를 높여 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양안 사이에 ‘합의’된 소삼통은 소중한 ‘숨통’이었다.


    소삼통이 현실화되는 데는, 양안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근원적으로 존재했던 정치적 난관을 ‘실용적으로’ 우회한 유연성이 돋보인다. 중국과 대만의 대화·협상에서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하여 대만을 대등한 정부로 인정할 수 없었고, 대만은 독립적인 정치실체로서 대만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는 정치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중국과 대만은 각각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兩岸關係協會, 해협회)’와 ‘해협교류기금회(海峽交流基金會, 해기회)’라는 민간법인을 설립하여 협상을 전담시킴으로써 “실사구시적 접근”을 할 수 있었다(정은미, 2016: 303). 이 두 법인은 이후 ‘해협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 등 양안 사이의 협상의 주체로서 계속 기능하고 있다.


    소삼통은 양안 교류에 크게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우선, 기존의 홍콩 및 마카오를 경유하던 방식에 비해 소삼통 항로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또, 대만인들과 직접 연고가 있는 푸젠성으로 바로 들어가는 루트이기 때문에 홍콩 및 마카오를 경유하는 것보다 지리적으로 접근이 용이했다. 따라서 이 시기 소삼통 항로를 이용해 양안을 오고 간 사람은 2001년 25,469명에서 2011년에 151만 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증가했던 것이다. 또, 양안 간의 물류도 소삼통 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소삼통이 실시된 진먼과 샤먼, 마쭈와 마웨이는 전체 양안관게에서 보면 일종의 ‘예외공간’적인 특권을 누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소삼통은 진먼과 샤먼 사람들의 관계도 매우 밀접하게 만들었다. 특히, 진먼 주민들의 샤먼 부동산 투자는 장기적으로 진먼 주민들이 샤먼에 정기적이고 장기적으로 체류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최근에는 반대로 샤먼 사람들이 진먼 부동산에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2005년 샤먼정부의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진먼 주민이 샤먼에서 최소 4천 개의 부동산을 구입했다고 한다(우쥐팡, 2016: 244). 마찬가지로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대륙에 부동산을 매입한 진먼 주민이 적어도 1만 명은 된다고 한다(저우양산, 2016: 263). 또한 인구 12만 명의 ‘시골’인 진먼 사람들이 ‘도시’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인구 360만 명의 대도시 샤먼에 가서 쇼핑 및 ‘시티투어’를 즐긴다.


    중국 시장의 잠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진먼의 정책입안자들과 관광업 종사자들은 중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진먼 현 정부는 2002년 중국의 단체 관광객에 대한 관광업의 접대관리법을 발표하였고, 2006년 2월까지 18개의 여행사가 영업허가를 받아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시작하였다(江柏煒, 2007: 142). 그리고 중국 관광객들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진먼과 마쭈의 전쟁 관련 박물관과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이 싫어할 수 있는 민감한 정치적 설명문을 수정하기도 하였다(Zhang, 2010: 399).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소삼통 초기에는 중국 관광객으로부터의 경제적 이득은 그리 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일부 상인자본과 투자자들은 진먼을 떠나 중국 대륙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진먼의 관광업에 대한 소삼통의 기여가 예상보다 작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여전히 중국과 진먼 사이의 이동과 흐름을 제약하는 갖가지 장벽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단체 관광 이외의 개인 관광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매일 최대 허용되는 중국 관광객 수가 60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하나의 단체 여행단은 최소 15명, 최대 24명까지 이루어지도록 제한되었다. 또한, 2006년 9월까지도 진먼으로의 관광이 푸젠성 주민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진먼현은 관광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러한 규제를 차차 완화하였는데, 2006년 9월에는 푸젠성 주민에만 허용되었던 진먼 관광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하여, 정부기관, 공안 계열, 법원, 검찰원 등 공공기관의 공무원을 제외한 만18세 이상의 모든 중국 공민들에게 금문 관광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江柏煒 2007, 142). 이런 노력은 이후 중국인 관광객 증가라는 성과를 낳게 되었다.


    3) 2008-현재: 삼통의 전면화와 새로운 모색의 시기


    2008년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당의 마잉주 정부는 ‘신삼불정책(不統, 不獨, 不武, 중국과 통일하지도 않고, 독립하지도 않으며, 무력사용도 하지 않는다)’이라는 대륙정책의 기본원칙을 표방하고, 실리적 차원에서 중국과 교류 및 협력을 확대하는 양안정책의 기조를 추진해 나갔다(정은미, 2016: 304). 이러한 기조의 정점이 바로 삼통의 전면화였다. 2008년 11월 4일 중국의 해협회와 대만의 해기회는 회담을 통해 삼통의 전면적인 실시에 전격 합의했다. 두 차례의 회담을 통해 직항 전세기 운항 및 중국인들의 대만본섬 관광 허용, 항공운송, 해양운송, 우편 및 식품안전 등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2001년 소삼통이 시범적으로 시행된 지 불과 8년 만에 대삼통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정은미, 2006: 305). 이후 2010년 6월 양안 간 자유무역협정이라 할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하게 된다.


    삼통의 전격적인 실시는 진먼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위기는 이전의 ‘예외공간’적인 특권을 더 이상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찾아왔다. 소삼통 항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숫자는 줄지 않았지만, 전체 양안교류에서 소삼통 항로가 차지하는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 2011년 최고조였을 때 양안의 인적 교류에서 소삼통 항로가 차지하는 비율은 11%였는데, 2014년의 경우에는 5% 아래로 떨어졌다. 이는 양안 간 직항 항공 노선의 대폭적인 증가로 인한 것이다(저우양산, 2016: 258). 이제 양안의 사람들은 홍콩이나 마카오, 혹은 소삼통 항로를 이용하지 않고도 바로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 중국이 2009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하이시시안경제구프로젝트(海峽西岸經濟區計劃)’의 경우도 소삼통 권역을 포함하고 있지만, ‘여러 개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이전과 같은 독점적 지위가 이 지역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위기는, 소삼통의 실시가 양안관계의 긴장 속에서 ‘숨구멍’으로 기능한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삼통 실시 이후 대만경제의 중국 종속 심화 및 이로 대만자본의 이탈, 이로 인한 계층적 불평등의 심화와 세대 간 격차의 증가 등의 문제가 소삼통 지역, 특히 진먼의 모색에 제약이 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다(장용석, 2016: 321). 대만의 중앙정부와 진먼 사이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생길 여지가 매우 크다. 가령, 비공식적 교류와 소삼통을 거치면서 샤먼과 하나의 생활권이 된 진먼의 경우, 전기 및 물의 부족을 샤먼으로부터의 공급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대만의 중앙정부는 안보적인 관점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대만 중앙정치의 상황이 중국과의 ‘밀착’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강해진다면, 진먼의 이러한 시도는 좌초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중앙정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진먼 지역 사회 내의 균열도 전면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갈등적 상황은 진먼과 샤먼을 연결하는 진샤(金廈)대교 건설을 둘러싼 논의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진먼과 샤먼을 육로로 연결하자는 아이디어는 중국 칭화대 吳之明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1998년 11월 제1회 ‘台灣海峽橋樑隧道建設學術研討會’에서 양안전문가들이 초보적인 검토를 진행하였는데, 여기서 북선, 중선, 남선을 포함한 총 3가지 루트를 구상했고 만약 개통된다면 진먼과 샤먼 사이를 왕래하는데 5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강조되었다. 이후 대만과 중국의 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진먼과 샤먼 사이 교량건설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고, 2003년 12월, 양안의 100여 명의 학자들이 샤먼에 집결하여 대교를 건설하는 방안을 토의하였다. 2004년 11월, 진먼현이 林同棪建築事務所에 ‘金嶝大橋’(진먼과 중국 샤먼 쪽의 다덩다오(大嶝島)를 연결하는 대교) 건설 방안에 대한 연구를 위탁하면서 학자들 사이의 논의를 벗어나 정치-행정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劉大年·顧瑩華·史惠慈·周諺鴻·王淑美 2009, 262). 2008년 8월 대만의 마잉주 총통이 진샤대교 건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적 의제가 되었다. 이후 대만본섬 및 진먼에서 진샤대교 건설에 대한 다양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개진되면서, 양안관계 진전의 중요한 바로미터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진샤대교 건설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에는 대만과 진먼에서 다양한 지리적 스케일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영역성과 이동성의 모순적 상호작용 과정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진먼의 로컬한 차원에서 보게 되면, 진샤대교는 진먼의 로컬한 행위자들의 이동성을 급격히 증진시켜 새로운 경제적 기회와 이득을 제공해 주는 측면이 있다. 劉大年·顧瑩華·史惠慈·周諺鴻·王淑美(2009, 264-267)에 따르면, 바다에 둘러싸여 샤먼과의 교통이 해운에만 의존하는 진먼에 있어 진샤대교는 중국 대륙으로의 연결성을 획기적으로 증진시켜서, 1) 운수 서비스의 안정성을 높이고, 2) 중국 주민들의 수요를 증진시켜 진먼의 관광업 발전에 기여하며, 3) 고량주와 같은 진먼 산업의 수출이 확대될 것이고, 4) 진먼과 샤먼을 하나로 연결하는 진샤생활권이 형성되어 진먼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며, 5) 중국 본토로부터 진먼으로 자원과 에너지 등을 조달하는 것이 용이해지고, 6) 중국 푸젠성에 투자하는 대만 기업과 상인들이 진먼을 중요한 전진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제공한다. 진먼 지역에서 진샤대교의 건설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이동성 증가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강조한다.


    그런데, 진샤대교 건설에 진먼 주민 모두가 지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진먼은 오랜 동안의 군사적 영토화와 고량주 산업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형성된 장소고착적 사회복지 시스템을 바탕으로 독특한 장소성이 형성되어 있는데, 진샤대교의 건설이 이러한 장소적 특성을 위협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지역사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진샤대교로 인한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劉大年·顧瑩華·史惠慈·周諺鴻·王淑美(2009, 268-271)도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1) 진샤대교의 연결로 인해 경제적 규모가 훨씬 큰 샤먼으로의 경제적 쏠림현상이 심화될 것이고, 2) 진샤 여행권이 형성되면서 관광으로부터의 이득이 진먼에 남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3) 샤먼의 경쟁력 있는 업체들에 밀려 진먼의 서비스업이 도산할 가능성이 크고, 4) 유동인구가 증가하여 진먼의 문화, 생태, 관광적 특색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우려는 2014년 1월 진먼 현지조사 때 실시한 현지인들과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났는데, 진먼 주민들은 진샤대교의 개통으로 인한 경제적 기회의 증가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물가상승, 치안문제의 증가, 교통 혼잡과 주차문제의 발생 가능성, 역사문물과 고적(古跡)의 훼손 가능성, 소음과 쓰레기 등 오염문제의 발생 가능성 등과 같이 그간 지역사회가 지켜온 안정된 질서가 흔들리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진샤대교의 건설은 경제적인 문제와 진먼의 정체성 문제, 양안관계라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 이해관계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진먼 사회 내부의 분열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전기 및 수도를 샤먼으로부터 공급받는 문제와, 강도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구조인 것이다.


    중국과의 연결성 강화를 두려움과 소외감으로 바라보는 대만 사회의 인식이 강해질수록 흐름의 경제에 복귀하고 있는 진먼의 고민도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과의 연결성 강화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을 대만의 다른 지역보다 먼저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먼의 역할 및 가능성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삼통이 실시되기 전 소삼통을 먼저 경험함으로써 양안교류의 긍정적인 지점을 선취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양안교류의 부작용을 먼저 고민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진먼이 찾아낼 지도 모른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양안 교류의 경험을 진먼과 샤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남은 문제는 이 경험 속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남북문제 전문가가 아닌 필자의 처지에서 이 문제는 가장 치명적이고 어려운 문제이다. 상식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세 가지 정도를 조심스럽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평화와 관련된 ‘예외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흔히 ‘예외공간’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설정하지만, 그래서 온갖 종류의 ‘경제특구’를 떠 올리지만, 진먼과 샤먼의 교류에서는 경제적인 관점 이외에 평화와 교류, 생활권(圈)이라는 다른 관점이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평화적인 예외공간에 대한 이런 상상은 당장 현재화되지는 못하지만, 상상하는 그 순간 ‘물질적 힘’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뒤집어 말하면, 상상되지 못하는 것은 결코 현실의 힘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런 평화적 예외공간에 대한 상상을 상당히 진척시켜 왔다. 그것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대한 구상이다. 또, ‘개성공단’은 경제적인 관점 이외에 다른 관점이 결합된 예외공간이(었)다.


    다음으로 ‘예외공간의 보편화’와 관련된 문제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양안의 교류에서 소삼통의 실험이 삼통으로 확대되면서 진샤생활권의 ‘예외성’은 양안 전역으로 보편화되었다. 분명 국가의 한 부분인 예외공간을 국가전체로 확대하는 방향의 이런 보편화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적 예외공간들을 연결하는 방식의 보편화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령,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대한 상상력을 ‘평화의 섬 제주도’ 구상과 연결하고, 다시 그것을 오키나와의 ‘쿠로시오 로드’ 비무장지대 구상 및 초국경헌법안과 함께 생각하고, 마침내 생태·환경·문화를 강조하는 평화로운 진샤생활권까지 연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의 진먼의 상황을 보았을 때 후자 방향의 보편화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중앙 정부 차원에서 교류가 막혔을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다른 주체들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주체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혹시 지방자치체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이 발언이 2001년 소삼통 실현에 과연 얼마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1999년 진먼 현장(縣長)인 천수이짜이(陳水在)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싶다. “진먼 주민에게는 더 이상 전쟁 위험이 없다. 진먼이 양안의 평화적인 교류와 협상의 실험도(實驗島)가 되기를 바란다.” 소삼통은 실질적으로 진먼과 샤먼 주민들이 경계를 넘는 그 순간 실현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김민환, 2014, “경계의 섬과 포격전의 기억: 단절과 이동의 변증법과 대만 金門島의 냉전 및 탈냉,” 『사회와역사』 제104집, pp. 45-76.


    김민환·정현욱, 2014,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의 쟁점과 대만 사회 갈등구조 변화”, 『아태연구』 21권 3호, pp. 5-35.


    남종호, 2009, “중국 양안의 삼통발전과 정치·경제적 고려인수”, 『중국연구』 제46권, pp. 279-300.


    박배균·김민환, 2015, “단절과 이동의 변증법과 금문 지역경제의 변화: 고량주 경제를 중심으로”, 『문화역사지리』 27권 2호, pp. 79-102.


    우쥔팡, 2016, “소삼통 이후 ‘진샤생활권’의 복원”, 박명규·백지운 편,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진인진.


    李筱峯, 김철수 외 역,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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