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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도별 기념식 자료

    16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6주년 - (Session 4) 이상준 | 국토연구원 국토계획 / 지역연구본부장)

    본문

     


    1. 서론


    남북이 분단 된지도 70년이 되어 간다.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동안 남북한의 국토와 도시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7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큰 양측의 격차를 줄여가는 것이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이 함께 해야 할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대략 30년 정도의 개발 수준과 생활수준의 격차를 보이고 있는 남북한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격차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 시점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룩한 독일은 통일준비의 중요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은 1990년 10월의 통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교류와 협력을 해 왔다. 물론 분단 초기에는 동서독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1970년대 초반 이후부터는 큰 틀에서 교류협력의 흐름을 이어갔던 것이다.


    독일이 미처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통일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통일의 과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부터 뿌려졌던 교류협력의 씨앗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서독이 분단 기간과 통일 직후에 진행했던 도시교류의 경험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독일은 통일 이전부터 동서독 도시 간 자매결연과 교류가 시작되었고 통일 직후 이것이 대규모로 확대되었기에 신속하고도 성공적인 통합과 동독지역의 도시발전이 가능하였다.


    통일 이전부터 진행되었던 동서독 도시 간 자매결연이 독일의 통일효과를 극대화하고 후유증을 줄이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동서독의 도시 간 교류협력 사례를 살펴보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분단 당시의 동서독과 현재의 남북한은 여러 내외적 조건이 다르고 동서독의 사례를 그대로 남북한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유의미한 시사점과 교훈을 도출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2. 통일 이전 동서독의 도시 실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1949년의 서독 및 동독정부 수립을 통해 동서독은 40년에 걸친 분단기를 맞게 되었다. 동서독으로의 분단 이후, 서독에서는 시장경제에 기반 한 국토 및 도시발전이 이루어졌고,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기반 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시장경제와 지방자치제도에 기초한 서독과는 달리 동독은 ‘민주적 집중주의(demokratisches Zentralismus)’의 원칙에 따라 중앙정부가 경제개발과 도시개발을 주도하였다. 동독에서는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지 않았고, 이것이 통일 이후 통합과정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중세 이후 독일의 국토공간구조는 지방영주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규모의 정주체계가 형성되어 비교적 균형적인 국토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독의 경우 각 지역별로 북부의 함부르크(Hamburg), 남부의 뮨헨(Muenchen), 중부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M.) 등의 대도시들이 균형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석탄 산업을 중심으로 한 북서부지역이 서독경제의 성장을 주도했다면, 그 이후에는 자동차와 전기·전자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이 서독경제의 성장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지역적인 측면에서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반면에 동독의 경우에는 사회주의 시절에 사실상 동베를린(East-Berlin)의 일극 중심적 국토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수도 중심의 국토 및 경제발전은 사회주의체제를 갖고 있는 국가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동독 남부에는 드레스덴(Dresden), 라이프찌히(Leipzig) 등 일부 대도시들이 있었지만, 이들 도시들이 지역의 균형발전을 이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도시들이 갖고 있던 교역 등 고유의 발전 잠재력을 살리기 보다는 중화학 중심의 사회주의 산업발전이 강요되면서 사회주의 시절에 오히려 도시성장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동독은 수도중심의 불균형 발전을 해왔던 것이다.


    서독의 도시들은 도시성장에 따라 1970년대부터 이른바 교외화 현상이 나타났다. 외곽지역에 새로운 단독주택 중심의 주거단지가 형성되면서 통근자들이 발생한 서독과는 달리 계획경제의 틀 하에서 도시개발이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주민들의 주거이전의 자유도 통제되었던 동독의 도시들에서는 교외화가 나타날 수 없었다. 동독 도시들의 외곽에는 주로 대규모 공장들이나 집단농장들이 입지하였다. 동독의 사회주의적 도시공간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대규모 주거단지였다. 동독 정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대규모 주거단지를 적극적으로 건설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베를린의 마르쟌(Berlin-Marzahn)이다. 이 신시가지는 독일 최대 대규모의 신시가지로서(총 5만8,200호, 16만명 거주) 동독체제하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집단주거지는 중국의 베이징이나 북한의 평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독에서는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새로운 도시개발이 주로 외곽에서 진행되는 바람에 도심이 더욱 낙후되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통일 이후 대규모 도심 재개발 수요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회주의에서는 과거 시장경제에 의해 형성된 구 도심의 관리와 발전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회주의 체제의 상징처럼 내세우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물론 도심의 재개발보다는 외곽의 신개발이 비용측면에서도 유리하다는 점도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주의시기에 부실하게 건설된 대규모 주거단지들은 통일 이후 도시개발의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른바 ‘판형건축방식(Plattenbauweise)’이라고 하는 조립식 공법으로 탄생한 대규모 주거단지는 당시에 부실한 시공과 내부 설비노후로 커다란 개보수 수요를 야기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시절 지나친 성과주의 때문에 단기간 내에 대규모로 건설이 진행되면서 부실이 누적되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80년대 후반 동서독 도시교류가 시작되는 시점에 동독의 도시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 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19세기 말에 건설되었던 구 도심의 낙후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지역은 사실상 노후한 채 방치되었다. 둘째, 도시외곽에 조립식 공법으로 건설된 대규모 주거단지는 전향적인 ‘베드타운(bed town)’ 역할을 하였다. 도시 교외의 공장들이 배출하는 오염물질과 노후 주택의 석탄난방으로 도시의 대기오염문제도 심각하였다.


    셋째, 서독에서 발생한 교외화 현상이 동독에서는 발생하지 않았고, 동독의 도시 외곽에는 콤비나트(kombinat) 형식의 대규모 공업단지나 집단농장이 입지하였다. 넷째, 도시정비에 대한 투자부족으로 시설들의 낙후가 심화되었고, 특히 역사적인 건축물들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섯째, 도심에서의 생활에 대한 매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는데, 특히 소도시들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 심각하였다.


    이미 분단기간 동안에 동독 내부에서는 이러한 부실한 도시개발과 낙후된 생활환경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TV 등 미디어를 통해 서독 시민들의 쾌적한 주거환경을 간접경험하게 되면서 동독 주민들의 불만이 증대되기도 하였다. 동베를린이나 라이프찌히와 같은 대도시뿐만이 아니라 많은 중소도시들에서도 낙후된 도시환경에 대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특히 당시 도시계획 및 도시사회분야 전문가들이 내부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이 통일 전후의 동서독 도시자매결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80년대 말 동독의 사회체제와 연관된 도시의 열악한 상황들이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동의 근본적인 영향 요인 가운데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이후 1990년 1월 동베를린에서 동독 건축아카데미의 초청으로 동서독 건축 및 도시 계획가들이 처음으로 “사회의 개념과 도시발전”이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개최한 것도 동독시절 동독 전문가들이 갖고 있던 비판의식과 새로운 도시건설에 대한 갈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동서독 도시 간 상호협력 사례


    1) 분단 이후 1970년대까지의 동서독 협력


    분단이후 동서독은 베를린장벽의 설치(1961)와 같이 긴장이 고조된 시기도 있었지만, 서독에서 사민당(SPD)이 집권한 1970년대부터 협력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시 서독정부가 동방정책을 통해 동구사회주의권과의 화해를 추구하였던 것이 동서독 협력에도 긍정적인 여건을 조성하게 되었다.


    1949년 동서독 정부 수립 이후부터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기 이전까지 동서독 간의 경제교류협력은 서독의 강경한 대동독 정책에 따라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독 기본조약체결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교역을 중심으로 경제협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분단 당시에 동독 내에 섬처럼 위치하게 된 서베를린과 서독을 연결하는 도로 등 교통망의 확충사업이 추진되었고 동서독 접경지역에서 지자체간의 협력도 이루어졌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을 토대로 1972년 5월 교통 분야의 협력강화를 합의하였는데, 이에 따라 동독정부는 1974년 12월 서독과 베를린간의 왕복철도 및 도로의 확장을 제안했으며, 서독정부가 이를 수용하여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베를린지역의 고속도로 보수사업에 대해서도 서독정부가 전체 공사비의 64%인 2억 5,950만 마르크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교통망의 확충을 통해 서독은 서베를린의 안정적 유지를 강화할 수 있었고, 동독 측은 자국 내 교통망 현대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70년대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경제협력을 정치관계의 개선과 연계하는 이른바 ‘정경연계’를 추진하였다.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경제협력에 있어서 동독에 차관을 제공하는 반대급부로서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켰다. 그 주요내용은 민간인 상호방문인원의 확대와 동독입국 제한요건의 완화, 국경검문완화, 편지 및 소포검열의 대폭완화, 전화소통의 대폭개선, 인권문제개선 등이었다.


    한편 접경지역에서의 동서독 간 협력도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에 따라 ‘국경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주요 사업으로는 재난에 대비한 상호협력체계 구축과 자원의 공동관리 등이 있었다. 1973년 9월 양측은 국경지역에서의 홍수, 화재, 산사태, 전염병, 병충해발생, 환경오염 등에 대해서 서로 긴밀한 정보교환 체계를 구축하여 공동 대응키로 합의하였고 수자원의 공동관리도 합의하였다.


    또한 접경지역에서 지하천연자원(갈탄, 천연가스, 칼리)의 공동개발사업도 추진하였는데, 대표적 사례가 서독 헬름슈테드(Helmsted)와 동독 하르브케(Harbke)의 갈탄 및 에너지 협력 사업이 있었다. 이 갈탄 및 에너지 협력 사업은 1976년 이후 총 1,500만톤(서독지역 550만톤) 규모의 공동갈탄개발사업으로서, 공해를 유발하는 동독 하르브케의 화력발전소를 폐쇄하는 대신에 서독 헬름슈테드에 새로운 화력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서독측은 동독으로부터 갈탄을 수입하고, 그 대신에 전력을 동독 측에 공급하였다. 이렇게 1970년대부터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다양한 교류와 협력은 동서독 간의 상호신뢰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고 도시교류를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도 형성하였다.


     

    2) 통일 이전의 동서독 도시교류


    (1) 도시 간 교류협력의 배경


    독일에서 도시 간 교류협력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유럽 최초의 도시간 우호협정체결은 836년 독일지역의 파더본(Paderborn)과 프랑스지역의 르망(Le Mans)간에 이루어졌다. 독일도시들간의 최초의 자매결연은 1925년 키일(Kiel)과 존더부르그(Sonderburg) 간에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과정에서 유럽의 도시들은 자매결연을 통해 서로 협력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본(Bonn)과 영국의 옥스퍼드(Oxford)였다.


    분단 이후 동서독 간의 자매결연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주도하는 측이 달라졌는데, 1950년대에는 동독 측이 도시자매결연을 적극 추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동독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독에 의해 이러한 시도는 무산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한때 서독 측이 도시자매결연을 주도하려고 하였으나 동독 측이 거부하였다.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는 서독의 이러한 시도를 당시에 동독의 체제불안을 획책하려는 의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통일 이전에 동서독 간에 이루어진 도시 간 협력은 앞에서 설명한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정치경제적 협력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서독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 냉전이 완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각 도시들 간에 자매결연을 통한 협력을 시도하게 되었다.


    (2) 도시 간 자매결연의 체결


    동서독 도시 간 최초의 공식적인 자매결연은 1986년 9월 서독의 잘루이스(Saarlouis 인구 약 4만 명)와 동독의 아이젠휴텐슈타트(Eisenhuettenstadt 인구 약 5만 명)간에 체결되었다. 이러한 자매결연 체결에는 잘루이스가 위치한 자알란트출신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의 역할이 컸다. 이후 서독의 부퍼탈(Wuppertal)과 동독의 슈베린(Schwerin)간에도 1987년 2월 자매결연이 체결되었다. 동독이 이러한 도시자매결연을 수용하게 된 것은 긴장완화 노력에 대한 대내외 압박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에리히 호네커의 고향에 대한 향수 등 감성적인 요인도 작용하였다. 동독의 드레스덴과 서독의 함부르그가 자매결연을 맺게 된 것은 드레스덴 출신 사회민주당 연방하원원내대표인 허버트 붸너(Herbert Wehner)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동서독 도시자매결연은 시장들이 자매결연을 하여야 한다는 강력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다수의 시민들이 원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자이트(DIE ZEIT)’는 이것을 “아래로부터의 외교”라고 묘사하였다.


    1985년부터 동독도시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했던 아헨(Aachen)은 1988년 5월 동독의 나움부르그(Naumburg)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외에도 주요 도시들 간의 자매결연으로서는 서독의 본(Bonn)과 동독의 포츠담(Potsdam), 뒤셀도르프(Duesseldorf)와 켐니츠(Chemnitz), 칼스루헤(Karlsruhe)와 할레(Halle), 브레멘(Bremen)과 로스톡(Rostock)등이 있었다.


    동서독 도시들 간의 자매도시 결정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결정되었지만, 비슷한 도시특성이 고려된 자매결연의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항구도시이자 상업도시인 동독의 로스톡과 서독의 브레멘의 자매결연, 동독의 스트랄준대와 서독의 키일이었다. 정치 및 행정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한 동독의 포츠담과 서독의 본의 자매결연도 비슷한 경우이다.


    <표 1> 동서독 유사특성 도시의 자매결연 사례

    특성

    동독도시

    서독도시

    정치적, 역사적 연관성이 높은 도시

    예나

    콧부스

    라이프찌히

    비스마르

    포츠담

    데싸우

    드레스덴

    나우엔

    퀘닉스 부스터하우젠

    에어랑엔

    자부르켄

    하노버

    뤼벡

    루드빅스하펜

    함부르그

    베를린 슈판다우

    베를린 첼렌도르프

    항구도시/상업도시

    로스톡

    스트랄준대

    브레멘

    키일

    종교적 관계(8세기부터 같은 교구)

    에어푸르트

    마인쯔

    2차 대전의 심한 전화

    게라

    노이엔베르그

    접경도시

    플라우엔

    호프

    철강/석탄의 중공업도시

    호이어스베르다

    딜링엔

    철강산업

    아이젠휴텐슈타트

    잘루이스

    대학도시(대학간 교류)

    할레

    칼스루헤

    고성 등 관광도시

    발렌슈타트

    크론베르그

    자료: 통일원. 1993. 동서독교류협력 사례집. pp.720-721을 수정보완.


    1986년 잘루이스와 아이젠휴텐슈타트의 자매결연 체결 이후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전까지 총 98건의 도시 간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 가운데 58건이 유지되었다. 동독체제 붕괴 직전인 1989년 3월까지 서독의 도시 등 기초지자체들은 총 800여건의 자매결연 신청을 동독 측에 할 정도로 도시자매결연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동독 당국은 당시에 이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까지 동서독 간의 전면적인 도시자매결연과 상호협력은 어려운 과제였다.


    동독 측은 도시자매결연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도시자매결연을 동독에 대한 체제인정의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동서독 간 자매도시의 선정은 주로 동독의 고위층들이 서독 측의 자매도시들을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상호주의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사된 것은 기본적으로 교류를 성사시키려는 서독 측의 인내와 포용적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자매결연을 통한 도시 간 교류협력의 내용


    자매도시 간 협력의 구체적 내용으로서는 각종 전문가협의회의 개최, 체육교류, 청소년 교류, 문화행사, 신문교환, 평화운동활동 등이 있었다. 자매결연 초기에는 일반 시민들 간의 접촉은 제한되었고 주로 공무원 중심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자매결연 도시들 간의 상호방문에 있어서도 서독 측 시민들의 동독방문에 비해 동독 측 시민들의 서독방문에는 제약이 많았다. 예를 들면, 1988년 7월에 예정되었던 동독 글라이프스발트(Grefswald)의 청소년 방문단의 서독 오스나부룩(Osnabruek) 여행 계획이 동독 측 국영여행사의 일방적인 취소로 무산된 사례가 있었다.


    분단기간 동안 가장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사업 가운데 도시행정에 대한 경험의 교환을 위한 전문가협의회도 있었다. 1988년 할레(동독)와 칼스루헤(서독)간에 ‘도시계획, 건축, 도심개발, 유적보존에 대한 경험교환’을 위해 개최되었던 회의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지방 도시행정에 대한 경험 전수는 통일 이후 동독지역에서 지방자치제도가 정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통일 이전의 경험전수와 더불어서 통일 직후 이루어진 도시교류도 동독지역 도시들에게는 자치행정기반 구축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접경도시들인 서독의 호프(Hof)시와 동독의 플라우엔(Plauen)시간의 교류사례에서는 주택, 기반시설 정비 등 전문분야의 자문과 함께 스포츠, 청소년 교환방문, 예술단체 교환공연 등 다양한 교류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표 2> 서독의 호프시와 동독의 플라우엔시 간의 자매결연 합의문 내용

    항 목

    내 용

    자매결연의 목적

    양 도시는 주민들의 생활을 서로 이해하기 위해 모든 사회계층 및 사회집단에 속한 주민들의 우호적인 접촉과 만남, 관계를 조직화하고 지원한다. 특히 양 도시 청소년들 간의 접촉에 중점을 둔다.

    주요 협력사업

    양측은 아래와 같은 주제에 대해 정기적인 정보 및 의견교환에 합의한다.

    - 도시개혁, 도시정비, 주택문제, 유적관리

    - 상하수 처리시설, 근거리교통, 보건․사회분야를 포함한 도시서비스행정

    - 여가활동, 휴양, 스포츠

    - 청소년 지원

    - 예술과 문화

    - 환경 및 자연보호

    실천계획 및 사례

    이 합의서에 의해 양측에 부여된 임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연간 실행계획을 작성한다.

    ※ 추진사례(1988년 연간 실행계획)

    - 플라우엔에서 평화와 안보를 위한 세미나 개최

    - 호프시의 도시발전사에 관한 전시회를 플라우엔시에서 개최

    - 플라우엔의 사회문화적인 발전상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호프시에서 개최

    - 호프시 교향악단 연주회를 플라우엔 시립극장에서 개최

    - 플라우엔 시립극단 교향악단 공연을 호프시에서 개최

    - 호프시 노동자들이 노동문제 토론회에 플라우엔 대표단을 초청

    - 30명 규모의 청소년 여행단을 조직하여 상호방문

    - 호프시와 플라우엔시에서 각각 한 종목의 체육경기를 개최

    비용문제

    - 양측이 합의한 사업은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추진

    - 방문단과 그 일원의 행사비용(교통비 포함)과 사례금 등은 방문단을 보내는 측에서 부담

    - 방문단과 그 일원의 체제비는 초청자측이 부담

    - 양측의 도시활동과 발전상에 관한 정보는 무료로 제공

     

    자료: 통일원. 전게서. pp.711-713.

     

    항구도시들인 서독 브레멘(Bremen)과 동독 로스톡(Rostock)의 교류에 있어서는 학술교류가 물꼬를 텄다. 1987년 8월 자매결연을 한 양 도시의 교류협력을 위해 같은 해 12월 서독 브레멘대학교의 헤르만 코데스(Herman Cordes)교수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로스톡 대학을 방문하였다. 교류초기 당시 동독은 서독 측의 도시들을 방문했던 방문단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관련분야의 전문성이나 관련성 보다는 정치적 측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서독 도시 방문 후 확실하게 귀환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만 보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 이전의 도시교류는 본격적인 교류를 위한 토대마련에 그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3) 통일 이후의 도시교류


    1990년 10월 3일 통일 이후 서독지역의 건축 및 도시계획제도를 그대로 도입하게 된 동독지역의 도시들은 개발에 필요한 법적인 계획도 없었고, 이러한 계획을 수립할 행정인력과 전문인력도 없었다. 이것이 시급하게 도시자매결연을 서두르게 된 요인이 되었다. 통일 이전까지는 서독 측 도시들이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데 비해서 통일 이후에는 동독 측 도시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시 간 교류를 원하게 되었다.


    베를린장벽이전에 100건에도 미치지 못했던 동서독 도시자매결연은 통일과 함께 1000건이 넘게 되었다. 1992년 독일도시평의회(der Deutscher Staedtetag)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937개의 서독지역 도시들이 823개의 동독지역 도시들과 1,084건의 자매결연을 하였다고 한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0년 10월의 독일통일을 통해 동서독 도시들은 긴밀하고 전면적인 협력을 추진하게 되었다.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도시들이 새로운 시장경제체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서독지역 도시들의 협조와 지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통일 이후 도시교류는 세 가지 목적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동독지역 도시들에서 민주적인 자치행정체계를 구축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동독지역 도시들에서 서독지역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여건을 창출하며, 양 지역 도시들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통일 직후 동독지역의 도시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는 새로운 자치행정체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각 도시들은 자치행정의 경험이 없었다. 이 때문에 통일 이후 자치행정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기에 현지 공무원들의 역량은 크게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네트와 레취러(Bernet/Lechler)는 동독지역 플라우엔시의 사례조사를 통해 행정공무원들의 전문적 수준이 너무 낮고, 이들이 행정절차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동독지역 지자체들이 과다한 인건비 지출을 하고 있었던 점도 문제였다. 불필요한 인력은 많고 필요한 인력은 부족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동독지역 도시들은 통일 초기에 엄청난 행정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동독지역 지자체들의 재정적 여건은 서독지역에 비해 극히 취약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을 위한 사회복지 부문의 지출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독지역 자매도시들의 물질적인 지원은 동독지역 도시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1987년에 자매결연 하였던 동독의 로스톡과 서독의 브레멘은 자금과 물자의 이전, 인적 지원, 지식과 정보의 이전 등 세 가지 영역에서 긴밀한 협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을 주도한 것은 서독 브레멘이었다. 브레멘시는 1990년에 협력 및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5백만 마르크(25억원)를 로스톡에 지원하였고 1991년에는 3백만 마르크(15억원)규모의 지원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브레멘의 시민들은 통일 초기에 도시를 방문한 로스톡 시민들의 임시 체류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사회통합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015년 많은 동독지역 지자체들은 통일 25주년 기념과 함께 자치행정 25주년 그리고 도시자매결연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통일 이전부터 자매결연 하였던 지자체들은 자매결연의 연역이 25년을 넘지만, 대다수의 동독지역 도시들은 통일 직후에 도시자매결연을 맺었던 것이다. 동독시절 폐지되었던 동독 도시들의 자치행정체계가 통일 이후 복구되는 데에는 동서독 도시 간 자매결연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통일 이후 전개된 도시 간 협력사업의 추진에 있어서 중요한 구심체가 되었던 것은 도시들의 연합체인 ‘독일도시회의(Deutscher Staedtetag)’이었다. 이 단체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7개월 만인 1990년 6월 13일 전독일 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동서독 도시들 간에 구체적인 협력 사업을 체결하고, 도시 간 교류협력의 경험들을 회원도시들에게 전파하자는 제안이 채택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도시 간 협력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독일도시회의’는 서독지역의 주정부들이 동독지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권고하였는데, 11개의 서독지역 연방주들 가운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헤센, 바덴-뷰르템베르그, 바이에른, 라인란트-팔츠 등 5개 주가 가장 활발한 지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지원은 특히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서독지역)주와 브란덴부르그(동독)주와 같이 자매결연 한 주정부 간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독지역의 도시 및 게마인데에 대해서는 서독 측의 인력지원이 이루어졌는데, 연방정부는 동독지역으로 파견되는 공무원들의 이사비용과 별거수당, 여비보조금 등을 1993년 말까지 전액 부담하였다. 이렇게 해서 1994년 말까지 동독지역 지자체의 행정인력지원 보조금으로 총 4억 6천만마르크가 지출되었다. 연방차원의 지원 외에도 지방단체장연합회 등이 “동독지역의 자치행정구축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1,400명의 서독출신 자문역들을 동독지역 지자체에 파견하였고 정기세미나의 개최 등을 통해 지원하였다. 로젠(Rosen)에 따르면 1992년 말과 1993년 초 사이에 약 1만 명의 서독인들이 동독지역의 지방행정기관에 장기간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동독지역이 동유럽 국가들보다 비교적 빠르게 자치행정체계를 구축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독지역으로부터의 인적, 물적 지원 때문이었다. 다만 서독지역으로부터 경험이 적은 젊은 공무원들이 파견되어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발생하였던 약간의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과에 비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통일 후 25년이 지난 지금 독일 내 도시간의 자매결연 활동은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독일내부의 자매결연보다는 국제적인 도시자매결연이 보다 활발하다고 할 수 있다.

     


    4) 동서독 도시교류의 평가


    (1) 통일 이전의 도시교류에 대한 평가


    동서독의 도시 간 교류협력은 통일을 전후로 하여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서, 그 평가도 시기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먼저 통일 이전까지의 교류는 전체적으로 볼 때, 다분히 형식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통일 이전까지 진행되었던 동서독 도시간의 교류는 동독 측의 소극적인 자세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고 상징적인 교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도시 간 자매결연에 대한 양측의 의도는 서로 크게 달랐다. 도시주민들 간의 선린우호관계를 도모하고자 하였던 서독 측과는 달리 동독 측은 동독이라는 존재를 국제적으로 공인받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자매결연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서독측이 도시주민들 간에 광범위한 접촉을 원했던 반면 동독측은 ‘통제받지 않은 대중들 간의 접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도시주민 간 접촉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동독 측은 이러한 도시 간 교류협력을 통해 동독의 정치적 노선을 서독 도시들에 선전하고자 하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독 측의 정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서독 측의 포용적 자세 때문에 도시 간 교류협력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처럼 동독은 도시자매결연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서독측이 원하던 실질적인 교류는 사실상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동독은 주민들 간의 자유스러운 접촉을 제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서독 측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동독의 이러한 소극적 자세 때문에 도시 간 교류에 대한 서독 측의 평가도 냉담한 편이었다. 1986년부터 시작된 도시자매결연 성과에 대한 1988년도 설문조사에서 서독의 32개 도시 가운데 14개 도시만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던 것이 이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도시교류를 통해 양측 주민들이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분단 상황 속에서도 도시 간 협력을 시도하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 직후의 신속한 교류확대를 가져오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독정권 말기에 이루어진 도시 간 교류에 있어서 서독 도시들을 방문했던 동독 시민들이 귀환을 거부함으로써 동독정권의 붕괴가 촉진된 측면도 있는데, 1989년 여름에 동독의 비스마(Wismar), 슈베린(Schwerin), 글라이프스발트(Grefswald)의 방문단들이 서독 도시들에서 동독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도시교류가 통일을 앞당기는 데에 기여한 측면도 있는 것이다.


     

    (2) 통일 이후의 도시교류에 대한 평가


    통일 이후의 도시 간 협력은 보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전까지의 교류가 ‘형식적’이었다면, 통일 이후에는 보다 ‘실질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독지역 도시들의 인적, 행정적 지원을 통해 동독지역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자치행정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고, 체제전환에 따르는 행정적, 재정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점은 커다란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긍정적 성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독지역 전체의 지자체 공무원들 가운데 서독으로부터 파견된 인력의 비율은 7%에 불과하였지만, 이러한 인력파견이 동독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서독인들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경험이 적은 파견공무원들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파견인력들이 신속한 도시행정의 재편과 안정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통일 이후 거둔 도시교류의 성과는 분단기간 동안 꾸준히 이루어진 동서독 교류의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독일사례의 시사점


    독일의 도시교류 사례로부터 우리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남북관계가 도시교류를 시작하던 동서독의 당시 상황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 발전적 남북관계를 상정해보면서 몇 가지 시사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도시교류 배경 및 착수과정의 시사점


    동서독이 도시 간 자매결연을 시작한 것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서독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양독 교류의 형식과 내용을 보다 다양화하면서 교류에 있어서 이니셔티브를 확보하고자 하는 연방정부의 의도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연방제하에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주도적인 정치력과 경제적 지원능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 큰 배경이 되었다. 동독으로서는 1980년대 들어서 정치경제적인 내부 상황의 악화에 대응해 체제의 안정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도시교류를 수용하게 되었다. 동서독 양국의 동상이몽 속에서 도시교류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엘리트들의 결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1970년대 초반부터 10여년에 걸쳐 축적된 교류협력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교류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일의 도시교류에 있어서 서독 측의 인내가 협력관계를 유지․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동독 측은 초기에 정치적 의도와 경직된 자세로 도시 간 협력에 임하였다. 이 때문에 서독 측의 유연한 대응이 없었다면 도시 간 협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남북한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우리의 포용력이 도시협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조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당시의 동서독은 현재의 우리 상황과 같이 북핵문제라는 국제화된 안보이슈가 없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 당시의 서독처럼 유연한 대응을 하는데 제약요인들이 많다는 것이 도시교류추진에 있어서 커다란 한계인 것이다.


    당시 서독이 자매결연도시의 선정 및 교류사업 선정과정에서 동독 측의 요구를 수용하였던 것처럼 우리 정부가 유연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최소한의 여건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도 자매결연도시의 선정과 협력사업의 선정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북한측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보다 합리적인 합의방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교류협력 내용의 시사점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동서독 도시들은 도시행정, 문화체육 등 일반적인 교류협력의 분야별로 다양한 협력을 추진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 방문이나 학술교류 등 정치적 부담이 적은 이슈부터 협력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도시가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협력추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을 공유한 도시들 간의 환경, 교통측면의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항만도시 또는 대학도시 등과 같은 특성을 반영한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공무원 등 도시행정가뿐만 아니라 교수, 시민활동가, 학생 등 다양한 시민들이 교류의 내용을 채워갔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우리의 도에 해당하는 연방주들 간의 자매결연이나 교류도 도시 간 교류에 중요한 환경을 조성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남북한의 경우에도 유사한 특성과 조건을 가진 도시들 간의 자매결연과 교류를 추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교류 사업에 있어서는 독일의 경우처럼 서로에게 큰 부담이 없는 체육교류, 문화행사 등으로부터 시작하되 북한 측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교류활동에 있어서도 역사․문화․환경 분야 등 민감하지 않은 부문부터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교류 협력에서 공무원, 도시전문가들과 NGO 등 시민단체의 다양한 협력을 통해 교류의 내용을 양적, 질적으로 확대 심화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도시협력에서 시민들의 주도적 역할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협력의 기본적 틀을 구축하고 재정적 지원과 협력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관련 전문가와 행정당국의 참여가 중요하다.


    동서독의 경우처럼 남북한의 도간의 자매결연도 도시 간 자매결연과 병행해서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의 도와 비슷한 성격의 주정부 간에 자매결연이 있었고, 이러한 주정부간 자매결연이 도시 간 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교류의 내용에 있어서도 현재 북한의 도시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분야와 과제들을 파악해서 협력을 제안하는 접근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와 함께 통일시대까지 내다보면서 필요한 과제를 검토하여 교류를 제안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남북한의 도시들은 서로 상이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발전해왔다. 1948년의 정부수립 이후 70년에 가까운 긴 분단의 세월이 이렇게 서로의 모습을 바꿔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분단으로 단절되고 왜곡되었던 남북한 도시들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 차원에서 도시교류를 추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표 3> 남북한 도시 및 도시개발의 특징 비교

    구 분

    북 한

    남 한

    도시인구비율

    50-60%

    90%

    도시개발의 사회경제적 배경

    중공업우선적 경제개발, 도시성장 억제 농촌발전유도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급속한 도시화

    도시개발의 추진력

    국가의 계획 및 자원배분

    시장의 힘

    도시개발의 목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발전에 기여

    도시경제의 발전 및 생활환경의 개선

    도시개발의 특징

    공간구조

    단핵적(단순화된) 공간구조

    토지이용

    높은 공업용지 비율

    주상공복합적 토지이용

    조방적 토지이용

    도시교통

    대중교통 중심

     

    자료: 이상준. 2001. “남북한 도시개발의 과제”. 도시문제.의 내용을 수정 보완.

     

    남북한의 도시들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서로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는 남북한 도시들 간의 교류협력을 추진함으로써 상호이해와 신뢰의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화관광도시의 특성을 갖고 있는 개성과 경주, 원산과 강릉, 그리고 공업도시의 특성을 갖고 있는 포항과 김책, 수도인 평양과 서울, 거대 배후도시들의 관문이자 항만도시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는 인천과 남포 등, 서로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는 도시들간에 자매결연 하고, 현안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협약을 맺어 교류협력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선적인 협력추진은 접경지역 도시들로부터 추진하는 것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리적 인접성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 등 유사점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접경지역의 남북한 도시들 간에 도시의 역사성 회복과 관련한 교류협력 사업이나 환경관련 협력사업 등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자매도시 간 역사문화자원을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작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과정을 통해 도시간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체적인 협력 사업으로서 도시 내 열악한 주택 및 생활기반시설의 개선을 위한 협력사업, 도시 내 대기 및 수질오염 개선 및 자연생태계 보호를 위한 협력사업 등도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류협력 성과 및 문제점들이 주는 시사점

     

    독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교류의 목적은 양 도시의 이질성을 줄이고 통합성을 강화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통일 직후 본격화된 인적 교류와 물적 지원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도시행정의 통합과 관련한 교류의 중요성이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기반 한 도시행정체계를 갖고 있어서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우리의 도시발전 성과를 북한 측에 전수하고 이것인 북한 도시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도시행정의 통합을 위한 교류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통일 상황에 이르게 되면, 그 중요성은 매우 커지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서독의 경우처럼 분단기간 동안에도 관련 공무원이나 기술자들의 교류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향후 북한 측이 필요로 할 것으로 예상되는 도시 내 환경처리 기술이나 관련 관리시스템 구축 등은 우선적인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5년 3월 심양에서 개최되었던 원산관광특구 투자설명회에서 북한 측은 원산시의 하수처리시설 개선의 시급성을 공개한 바도 있다.

     


    5. 결론


    독일은 통일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완벽한 통합을 이룩하지는 못하고 있다. 여전히 동독지역은 서독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이 사실이고 전체적으로 70%수준으로 보는 것이 현지의 시각이다. 하지만 20-30% 수준에서 70%에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전후에 함께 노력한 결과이다. 동서독 도시 간 자매결연이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동독지역이 오늘날의 성과를 거두게 된 가장 큰 요인이 연방정부의 재정이전인 것은 분명하나 서독지역 도시들이 동독지역 자매도시들을 위해 물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큰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남북한이 도시교류를 통해 동질성을 확대해 가고 제대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려고 한다면,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북한주민들의 생활개선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도시교류가 필요하다. 북한 주민들의 민생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춘 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깨끗한 물과 연료 그리고 식량이 시급히 필요하다. 노후한 주택의 개선도 시급하다. 평양 등 일부 도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시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민생 개선에 초점을 맞춘 도시교류를 시도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남한의 도시 및 지역 간에 고유 특성을 감안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중복적인 사업추진 등의 부작용을 사전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도시 간 무분별한 경쟁을 지양하고 서로 협력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교류협력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들 간의 협의체 구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도시교류의 추진에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남북한 도시시민들의 인적 역량의 차이이다. 북한의 도시들은 우리와 다른 제도하에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도시들을 관리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인식도 우리와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처럼 자치행정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고 당국의 협의 없이 자발적으로 시민단체들을 조직하여 우리와 민간차원의 교류를 할 수 있는 역량을 북한 시민들이 갖고 있지도 않다. 현재로서는 북한의 중앙정부를 상대로 우리의 도시정부와 민간단체가 접촉을 해야 하는 형국인 것이다. 따라서 남북 간의 도시교류에 있어서 이러한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한 접근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일의 도시교류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는 우애와 연대(Solidaritaet)였다. 우리의 경우에 도시교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민족적 동질성 회복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사례가 전해주는 가장 큰 교훈은 인내심을 갖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점진적으로 만남과 대화를 추진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보다 차분하게 긴 호흡으로 도시교류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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