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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6주년 - (Session 3) 김준형 | 한동대, 국제정치

    본문

     

    1. 들어가며


    북핵 위기가 시작된 지 4반세기가 흘렀다. 6자회담이 교착된 이후 북한의 지속적인 핵무장 강화에 맞서 한미양국은 외교적 해법을 배제한 채 강대 강 구도만 고집해왔다.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장거리로켓 발사로 촉발된 유엔의 대북제재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고 말하지만 북한의 자발적 포기는 물론이고, 강제 굴복시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런 와중에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교환 가능성이 급부상했다. 북한이 2015년 하반기부터 제안했고, 특히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조건으로 미국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중국의 제안은 제재만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수 없으며, 결국 협상을 통한 외교적 해결밖에는 없다는 증언과 다름없다. 미국은 일단 수용했으며, 2016년 5월초 미 정보국장 클래퍼가 서울을 비공식 방문해서 한국정부의 양보 가능한 조건을 타진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비핵화-평화협정의 교환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2005년 9.19 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이었다. 다만 합의 직후 미국 내 보수 강경파들은 북한의 핵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생각했으며, 그 불만은 BDA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이후 2.13 합의와 10.3 합의 같은 실천 노력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미 한·미·일 3국은 비핵화를 평화협정의 전제조건화 했다. 북한은 반대로 체제보장을 위한 억지수단인 핵무기를 상쇄할 만큼의 안보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핵 포기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11년이 지난 2016년 상황이 크게 변했다. 핵실험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장거리로켓 발사 역시 실패했던 당시와 지금의 북한은 다르다. 그동안 4차례의 핵실험과 장거리로켓 발사를 성공했고, 2013년 헌법에 핵보유국 표시를 함으로써 법적 채비를 마쳤으며, 최근 7차 당대회에서 총화에서 ‘핵강국’으로, 결정서에서는 ‘동방의 핵대국’임을 선포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데, 자신의 핵보유는 더 이상 어떤 것과도 교환 등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김정은 정권의 선언이다. 한미 양국이 압박하는 선핵폐기론은 물론이고 중국의 병행론조차도 북한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핵무기는 북한의 이른바 ‘최종병기’임을 확인한 것이다.


    북한의 핵능력이 지속적으로 고도화되고 있지만 미국의 전략적 인내, 한국의 두 보수정부의 대북강경책은 외통수에 걸려있다. 서울, 워싱턴, 도쿄는 북한이 핵무기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협상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접지 않고 있고, 북한 역시 비핵화를 전제로 한 6자회담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이 7차 당대회 이후 남북대화 모드로 급격하게 전환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남북대화도 비핵화에 철저하게 종속시키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교환 매트릭스는 많은 잡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6자가 합의했던 사항이며, 재차 미중의 합의로 인해 실현가능한 옵션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참가국 사이의 엄청난 간극과 엇갈림을 노정하는 대표적 착시 사례가 되고 있다. 본 연구는 대북제재를 둘러싼 중미합의, 특히 평화협정체결과 비핵화라는 교환 매트릭스가 내포하고 있는 등가성 여부를 분석하고, 북미의 현재 입장이 교환가능한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2. 북한 핵문제 4반세기와 협상 매트릭스의 변화


    수많은 부침이 있었던 북핵을 놓고 벌인 지난 4반세기의 협상의 매트릭스는 크게 보면 3개의 전환기 또는 변곡점이 있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11년의 동일한 간격을 가진다. 먼저 1차 핵위기를 매듭짓는 합의였던 1994년 10월의 제네바 합의, 두 번째는 2차 핵위기 해소를 위한 합의였던 2005년 9.19 공동성명, 그리고 세 번째는 2016년 초의 유엔제재 2270관련 미중 합의와 북한의 7차 당대회로 표면화된 비핵화-평화협정 교환 매트릭스의 재등장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경제지원과 북한 핵프로그램 동결이라는 교환조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의 핵폐기와 체제보장의 교환이 핵심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그림1 참조). 후술하겠지만, 3번째 변곡점은 앞의 두 차례와는 달리 관련 당사국들의 교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라, 독자적인 각각의 조건을 제기해 놓고 기 싸움 중인 상황이라는 점이 다르다. 미완결이지만 그마나 불안정하게 작동하던 협상을 통한 교환매트릭스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중요한 변곡점이다.


    1차 북핵 위기는 1990년대 초 냉전종식이라는 혼란의 물결 속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하면서 시작되었다. 1991년 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일단락되는가 싶었으나 북한의 핵개발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이후 IAEA 특별사찰을 거부하고 NPT를 탈퇴하였으며, 영변에서 핵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한반도의 이른바 1차 핵위기가 진행되었다. 이를 70년대 이래 공들여온 비확산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한 미국과 북한은 정면으로 대치했으며, 한반도는 전쟁까지 거론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1993년부터 개최된 북미고위급 회담이 1994년 10년 「제네바 기본합의(Geneva Agreement)」을 채택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제네바 합의는 북미 양자협상의 결과이며, 합의를 이끌어냈던 교환의 매트릭스는 핵프로그램 동결과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었다. 북한은 당시 핵개발의 명분으로 에너지 부족문제 해결을 내걸었다. 에너지 문제가 핵개발 은폐용의 성격도 있었고, 당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에 대한 자구책으로 핵개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체제보장의 수단인 것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 합의에 필요하고 동의한 부분은 경제지원과의 교환이었다. 이후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의 매트릭스 역시 경제적인 보상을 통해 북한 핵개발을 포기시키는 전략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핵개발중단-경제지원의 교환 매트릭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작동을 일으켰다. 애매모호한 「제네바 협정」 자체의 결함과 더불어, 협정체결 불과 한 달 만에 공화당이 미 의회의 다수당이 되면서 제네바 회담에 대한 미국 측의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IAEA 사찰을 둘러싼 논란이 발목을 잡았으며, 중유 공급과 경수로 건설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에 북한 역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결국 1998년 미사일 발사와 우라늄 농축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의혹이 일면서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de facto) 작동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부시의 네오콘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제네바 합의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9.11 테러사건, 그리고 연이은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으로 합의 이행은커녕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반테러와 정권교체(regime change)의 대상이 되면서 북미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결국 2002년 우라늄 농축여부를 놓고 벌어진 북미 간 공방 직후 제네바 합의는 공식적으로 파기되었고, 이른바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고 비난하면서 중유 공급과 경수로 건설을 즉각 중단하였으며, 북한은 이에 반발해 영변 핵시설 동결을 해제하고, IAEA 요원들을 추방했으며, NPT를 탈퇴해버렸다.


    북한을 밀어붙여 우라늄농축 개발에 대한 모호한 고백을 받아낸 부시 정부는 나쁜 행동을 보상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북한과의 양자협상을 거부했다. 하지만 북미 대결상황과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이 중재에 나섰고 한국이 적극 지원하면서 6자회담이 출범했었다. 협상에 소극적인 미국에 비해 북한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개진하였는데, 북한의 요구는 핵개발 포기의 조건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중단과 불가침 조약을 통한 체제보장이 핵심이었다. 반면 미국은 초반에 소극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2004년 2월에 개최된 2차 6자회담에서 북한이 먼저 핵개발을 포기하면 경제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소위 리비아모델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사실상의 선핵폐기론과 경제지원 중심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처음으로 핵무기 제조와 보유를 대외적으로 선언하면서, 이를 미국의 위협에 대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스텔스 전폭기를 파견해 무력시위를 하면서 한반도 상황은 다시 긴장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중국과 노무현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으로 북한은 6자회담으로 복귀했고, 2005년 9월에 열린 제4차 2단계 회담에서 6국의 합의안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극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제네바 합의가 양자 협상의 결과물이었던 반면 「9.19 공동성명」은 다자 회담의 결과물이었다. 문제는 각 국이 원하는 요구사항과 준수사항을 분명하게 규정하지 못한 체 합의를 선언해 버렸다.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각국은 서로 다른 해석을 했고, 이 때문에 실천과정에서 곧바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9.19 공동성명」에서도 「제네바협정」처럼 핵동결에 대한 경제지원이라는 교환매트릭스를 포함했으며, 이 때문에 경수로 제공의 시기를 두고 합의직후 흔들렸지만 북한은 이전 합의보다 안전보장 확보에 집중했다. 요약하자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를 전환하고, 북미 및 북일 수교를 실현함으로써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주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초기부터 난항을 보이면서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까지 갈 수 없었을 뿐 매우 중요한 요구사항이자 합의사항이었다.


    미국 내 보수 강경파들은 북한의 핵능력이 보잘 것 없는 수준임에도 미국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반발했다. BDA 사건은 이런 미국 내 정서가 표면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공동성명은 시간(time) 또는 순서(order)이라는 변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합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병행교환의 원칙이 있고, 실천에서도 행동대 행동 원칙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선후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민감해지는 구조였다. 미국의 부시 정부와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공동성명에 핵폐기 시점을 규정하지 않는 점을 거론하며 비핵화를 선행조건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에 북한은 한미의 비핵화 선행론은 「9.19 공동성명」의 행동대 행동이라는 병행론 원칙을 어기는 것으로 반발했다.


    9.19 합의가 해석과 실천에 난항을 겪게 되자 북한은 이듬해인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에 나서면서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맞게 된다. 당황한 미국은 대북 접촉에 적극 나서면서 「9.19 공동성명」의 실행방안에 관한 2.13 합의와 10.3 합의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교환의 등가성과 시점에 대한 각국의 해석 차이는 쉽게 해소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았으며, 결국 2008년 12월 시료 채취와 검증의정서 채택을 두고 북미 양국은 이견을 노정하며 결렬되었다. 북한은 곧바로 2차 핵실험과 장거리로켓 발사를 감행했으며 한·미·일은 대북봉쇄에 나서고 UN 안보리 결의안 1874에 의한 대북제재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후 북한의 태도는 크게 바뀐다. 6자회담 체제에 대한 미련을 거의 접게 되었고, 핵보유국의 기정사실화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향후 협상을 하더라도 경제지원-비핵화의 교환 매트릭스는 폐기해버렸고, 선행론은 더더욱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9.19 공동성명」 직후에는 미국 측은 자국이 지나치게 양보한 합의라고 여겼던 것이라면, 이번에는 북한이 자국이 더 손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식·비공식적으로 북한은 2012년까지 핵무기 보유국의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내비추기 시작했다. 대미 요구도 더욱 강경해졌는데, 핵포기에 상응하려면 대북 적대시 정책의 종료, 한국에 대한 핵우산 포기, 한미동맹의 종식을 요구했다. 한국이나 미국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조건을 내세우는 북한의 태도 변화가 확인되었다. 평화협정이나 북미관계정상화가 9.19합의의 최종 도달점 같은 성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북한이 핵포기의 전제조건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의 기정사실화는 목표대로 2012년에 본격화되었다. 2012년 2월 29일 북미 양국이 북한의 비핵화 재개와 6자회담 복귀 약속에 24만 톤의 식량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북한이 곧바로 장거리로켓 발사를 강행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북한은 2012년 4월 헌법 전문에 핵무기보유국 조항을 삽입하였고, 2013년 초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3월 31일 당 중앙위원회는 김정은 시대의 전략 노선인 경제건설-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을 발표했다. 또한 4월 1일에 최고인민위원회는 핵무기 사용 교리를 담은 <자위적 핵무력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이러한 조치는 북한은 핵보유국이므로, 핵무기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중단 및 폐기를 규정한 「9.19 합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법과 제도적인 완비와 더불어 실제행보에서도 거칠 것 없었다. 6자회담이 중단된 이후에도 북한은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해왔다.


    3. 대북제재 2270체제와 대화모색


    핵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채널은 교착된 상태에서, 2013년 봄과 2015년 여름에 이어 2016년 초 다시 위기 국면이 찾아왔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로켓 발사로 촉발된 후 남한의 초강경 대응으로 대결구조가 이어져왔다. 박근혜 정부는 남북의 마지막 남은 완충지대이자 대북 지렛대인 개성공단마저 전격적이고 일방적으로 중단했고, 북한은 5차 핵실험 위협과 동시에 탄도미사일을 수차례 발사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또한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키 리졸브와 독수리 연습은 사상 최대 규모로 실시되었으며, 핵추진항공모함과 스텔스기를 포함한 미군의 첨단전략무기들이 한반도를 누볐다. 2015년 마련된 작계5015에 의거해 북한의 주요시설을 선제타격하고, 평양을 최단시간 점령하는 작전과 함께 특수부대를 보내 북한 지도부를 참수하는 작전훈련까지 담고 있어 역대 가장 공세적이었다.


    또한 유엔안보리가 제재결의안 2270을 통과시키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을 압박했으며, 미국, 유럽연합, 한국은 별도의 독자제재까지 추가했다. 유엔제재안 2270은 15개 이사국의 만장일치와 55개국의 지지로 유엔 70년 역사상 비군사 조치로는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형무기를 포함해 무기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광물 교역을 금지했으며, 해운 및 항공 운송을 차단함으로써 금지품목의 거래를 봉쇄했다. 또한 북한당국으로 유입되는 대량살상무기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금융거래를 봉쇄했으며, 제재대상 단체 및 개인의 리스트를 확대했다. 기존 제재안들이 핵개발에 직접 관련된 분야와 불법적 행위에 한정하던 것과 비교하면 전면적이고 포괄적이다. 제재안 자체만 놓고 보면 사상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가 결코 과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긴박하고 강력한 국제공조를 통한 대북압박과 북한의 반발이라는 상황에서도 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국만 제외하고 미국을 포함한 유관국들이 제재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한국정부와 언론은 의도적으로 누락했으나 유엔안보리 제재안 2270호 역시 대북제재가 북한의 민생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과 대화유도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중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는데, 왕이 외교부장이 손에 들고 미국에 간 것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교환 매트릭스였다. 중국이 미국이 원하는 대북제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에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협정을 위한 대화에 적극 나서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중국은 제재만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수 없으며, 결국 협상을 통한 외교적 해결밖에는 없다며 미국을 압박했고, 미국은 일단 수용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2016년 2월 23일 중국의 외교부장 왕이와 협상을 한 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는 지속적인 응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테이블에 나오고 협상에 응한다면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변화가 엿보인 시점은 2015년 가을이었다.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 성 김이 9월 18일 비핵화를 대화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정책의 변화를 시사했다. 즉 미국이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탐색적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비핵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비핵화가 대화의 중심 어젠다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함으로서 전제조건의 의미를 약간 희석했다. 이러한 미국 측의 태도 변화가 북미의 뉴욕채널을 통한 접촉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은 북한의 안보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비핵화가 달성되기 어렵다고 주장해왔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치열한 내부 논쟁을 거쳐 북한이 붕괴되는 것은 중국의 전략적 이익에 큰 타격이 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따라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여전히 반대하지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시간을 가지고 설득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케리와 만난 왕이가 북한의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병행추진하자는 제안을 했던 배경이다. 중국이 적극적으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교환을 적극중재한 데는 전략적 고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이 북한 핵을 문제 삼아 한반도에 사드배치를 강행하려했기 때문에 이를 저지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왕이와의 협상을 매듭지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케리는 “아직 사드의 한국배치는 결정된 바가 없고 미국이 사드에 목말라있거나 그런 기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한국 등 우방국에 대한 핵위협이 사라진다면 사드를 배치할 필요성도 없어진다.”라고 함으로써 사드를 둘러싼 한·미·중의 신경전을 일단락 시켰다.


    북한 역시 유엔제재안이 통과한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일방적 제재보다 안정 유지가 급선무이고 군사적 압박보다 협상 마련이 근본적 해결책”이라며 국방위원회 담화를 통해 대화를 거론했다. 사실 북한은 2015년 가을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들고 나왔었다. 2015년 10월 1일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미국에게 제의했으며, 북한 외무성 대변인 역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10월 7일에 평화협정 체결을 공식 제기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왕이가 방미하기 직전인 2월 21일에 북한이 4차 핵실험 직전에 미국에게 평화협정을 논의할 것을 제안했지만, 비핵화 문제도 다뤄야 한다는 미국 측 요구를 북한이 거부해 결국 핵실험으로 이어졌다는 보도를 내놨다.(표 2 참조)


    편 한국은 미국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고집하며 일관되게 대북제재만 강조하고, 평화협정논의는 제재의 효과를 떨어뜨릴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북한은 계속 악마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북한과의 외교적 해결은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북한 4차 핵실험과 유엔제재 2270을 둘러싼 미중의 합의와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은 서로 예비적인 목적을 이루었다. <그림 2>가 나타내듯이 북미간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교환 매트릭스가 교착상태가 되자, 중국이 끼어들어 3자간 교환이 일어났다. 중국은 사드중지를, 북한은 평화체제,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제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은 이러한 3자 교환구조에서 배제되었다.



    4. 북한 핵능력 고도화와 교환 매트릭스의 변화


    미국의 유연성 발휘와 북한의 대화공세, 그리고 중국의 중재의 결과로 비핵화-평화체제 교환매트릭스가 일단 부활했다고는 평가할 수 있지만, 실현되기 힘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교환등가성에 대한 인식차가 과거보다 훨씬 더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식차이는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교환 매트릭스에 갇혀있다. 비핵화 없는 평화협정 또는 평화협정 선행론을 주장하는 북한과 평화협정 없는 비핵화 또는 비핵화 선행론을 주장하는 한미일의 입장이 팽팽하다. 여기에 중국이 병행론 또는 조건 없는 대화라는 중재안을 내놓고 있으나, 지난 25년의 불신의 경험으로 인해 병행론조차 합의가 어렵다.


    교환등가성을 위해 우선 따져봐야 하는 것이 바로 북한의 핵능력이다. 제네바합의와 「9.19 공동성명」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오판과 더불어 평가를 유관국들이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향은 한·미·일이 아직도 북한이 경제지원이나 체제보장의 약속만으로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보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재도 마찬가지다. 경제제재의 효과를 믿는다는 자체가 바로 북핵에 대한 경제적 효과를 믿는다는 역설적 방증이다.


    북한체제 특성상 핵능력에 대한 정량적 판단은 어렵다.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의 숫자나 핵물질의 보유랑은 물론이고, 운반수단에 대해서도 정확한 통계를 획득하기 어렵다. 또한 북한정권이 필요에 의해 과대포장하거나 은폐할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축적된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정성적 판단은 내릴 수 있다. 적어도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북한은 2012년 말 장거리로켓 발사와 2013년 3차 핵실험 이후 핵개발 프로그램에 엄청난 가속을 붙여 왔다. 특히 2015~16년은 핵무기의 파괴력 강화(수소탄실험), 다종화(우라늄, 플루토늄), 소형화를 이루었으며, 투발수단의 다양화(SLBM, 대출력 로켓엔진, 고체연료, KN-08)를 이루었다고 북한관영언론들은 전한다. 특이한 것은 대외적으로 중계방송하다시피 공개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내적 결속과 김정은정 권의 견고함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과장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핵능력의 고도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한의 객관적인 핵무력 증강도 중요하지만, 북한이 그런 인식과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2016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36년 만에 개최된 7차 노동당대회는 김정은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는 것인 동시에 지난 4년간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7차당대회는 핵보유국 선언과 같이 간다. 총화보고에서 ‘핵강국’으로, 결정서에서는 ‘동방의 핵대국’임을 선포했다. 핵보유는 더 이상 어떤 것과도 교환 등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김정은정권의 선언이다. 한미 양국이 압박하는 선핵폐기론은 물론이고 중국의 병행론조차도 북한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핵무기는 북한의 이른바 ‘최종병기’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제는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부정하는 것은 대내외에서 북한 체제를 부정하는 일이 된 것이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제안하고는 있지만 이는 교환의 매트릭스로서가 아니라 북한이 원하는 조건과 상황이 되면 별개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식이다.


    또 여기에는 미국이 1970년 이후 공을 들여온 비확산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 담겨있다. 북한이 원하는 방식의 교환을 하지 않을 경우 북한인 이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는 말이다. 6자회담의 5자가 주장해온 북한 비핵화는 물론 수용불가일 뿐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넘어 세계 비핵화를 강조하는 이유다. 결정서에서 “자주의 강국, 핵보유국의 지위에 맞게 대외관계 발전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핵보유 선언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미국의 『핵태세보고서(NPR)』의 핵심주장과 상당히 유사한 주장을 담고 있다. 오바마는 노벨상을 수상하게 만든 2009년 체코 프라하에서의 세계 비핵화연설을 기초로 2010년에 NPR을 개정·발표했다. 핵심내용이 핵무기의 선제 불사용, 핵군축 의무 이행, 세계 비핵화 등을 담았는데, 역설적인 것은 이란과 북한을 '예외국(outliers)'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7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이 핵심사항 3가지를 자기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성공 여부와 미국의 수용 여부가 관건이지만 북한은 미국의 핵전략에 정면 도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부분은 북한은 지난 25년간의 경험으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핵폐기가 가지는 비가역성의 불리함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협정은 언제든지 파기하면 그만이지만, 북한 핵개발의 포기는 복원이 훨씬 더 어렵다. 부시행정부 이래로 한미양국이 견지하고 있는 원칙인 완전하고(complete), 검증가능하고(verifiable),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의 소위 ‘CVID’ 비핵화였다. 그러나 한미양국이 제공하는 보상에 비해 북한의 비핵화는 되돌리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서 상호조치가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동시적이거나, 또는 등가적일 경우 북한 측으로서는 수용할 수가 없다. 핵보유국을 과시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비가역성의 상대적 불리함을 감수할 이유는 더욱 적어졌다.


    5. 미국의 고민 vs. 한국의 딜레마


    이러한 북한의 핵무력 강화를 통한 전방위 공세는 미국에게 각각 어떤 함의를 가질까? 일각에서는 7차 당대회 직전 4번의 탄도미사일발사 실패를 거론하며 여전히 북한의 허장성세로 일축하고 있지만, 미국의 위협인식은 상승 전환하고 있다. 현재의 속도로 간다면 가까운 시일에 실전 배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특히 북한의 전반적인 행보가 지역 긴장을 고조시키고 유관국, 특히 중국과 미국의 무능력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몸값이 크게 높아졌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 즉 미국의 글로벌 비확산레짐에 대한 도전이 동반될 경우 파급효과는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8년간의 전략적 인내는 방치를 넘어 적대적 무시(hawkish neglect)와 전략적 활용을 함으로써 북한의 핵무력 증강을 부추겼다는 비판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스스로도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미국 역시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할 수 없다. 북한의 핵군축회담 제안이나 평화협정체결을 비핵화 약속 없이 북한 요구대로 들어주기 어렵다. 미국이 공들여온 NPT 체제를 북한으로 인해 흔들 수는 없다. 이유는 또 있다. 북한의 핵위협은 오바마의 재균형 전략을 정당화해주고, 특히 중국에 대한 견제와 공세를 가속화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는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과 아시아 전략은 동시병행하기 어려운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의 대북전략의 양쪽 경계선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한쪽 경계선은 평화협정으로 인한 문제해소를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쪽 경계선은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로 인한 미국의 안보와 비확산레짐을 위협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국의 이러한 모순적 양다리 전략이 북한의 소위 약자의 전횡(tyranny of the weak)을 가능케 하는 주요 원인이다.


    이런 맥락으로 인해 미국이 중국의 병행론을 일단 수용했던 이유인 동시에, 너무 과장된 해석은 위험하다. 잠정적인 수용일 뿐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본 전제를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2016년 5월 3일 다니엘 러셀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전략문제연구소(CSIS)의 심포지엄 기조연설은 이런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은 비핵화에 집중할 때이고 평화협정 논의는 한참 뒤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는 북한이 주장하는 선평화체제 후 비핵화는 물론이고, 중국이 주장하는 병행논의와도 차이가 크다.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비핵화는 없다고 말한다. 북한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평화협정은 비핵화와 등가적 교환조건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미국은 평화협정의 논의자체를 북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간주할 정도로 인식 차이가 크다.


    미국이 고민의 수준이라면, 한국은 그야말로 딜레마의 수준에 처해 있다. 대북제재만 강조하고, 현 시점에서 평화협정 논의는 제재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입장만을 고집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잘못된 희망적 사고에 의한 모든 레버리지를 내팽개치고 북한의 붕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국내정치적 필요에 의해서도 북한은 계속 악마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북한과의 외교적 해결의 모색자체가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보수정부의 8년간의 대북강경노선은 무력했고, 북한의 핵능력은 고도화되고 있으며, 충돌위기의 압력은 지속적으로 상승시켰다. 현재의 북한과 같은 정도의 핵능력을 가진 국가를 제재나 압박을 통해 비핵화를 시킨 전례가 없었다.


    유엔제재와 관련해서는 미국과 중국의 콘도미니엄 체제가 구축되어 상황을 안정시켰기에 망정이지, 북핵을 포함해 사드배치를 놓고 대치했더라면 우리로서는 훨씬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핵 및 사드배치문제가 해결보다 상황관리를 위해 잠정 연기되었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재발가능하다. 미국은 대중견제를 위해 동북아 MD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이고, 사드는 그 핵심이기에 포기하기 어렵다. 또한 남북이 대결로 치닫는 것을 원치 않았고 중국이 강한 유엔제재에 찬성한다는데 미국이 구태여 판을 깰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사드를 일시연기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었다.


    사실 중국이 수행했던 중재역할을 한국이 주도했어야 했다. 한국이 미국을 설득해 당근을 가져오고, 미국의 당근을 이용해 중국의 채찍을 이끌어내 북한 설득에 나서야 했다. 결과적으로 대결 일변도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중국이 앞장서 한반도의 상황을 일단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봉합한 것은 다행이지만, 그 가운데 한국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사드논란에서도 한국은 미국보다 앞서 강경하게 나갔지만 오히려 미국이 유연성을 보임으로서 한국의 입장만 곤란하게 되어버렸고, 향후 대중관계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후라도 그간 중국의 역할을 한국이 승계하면서 상황을 주도해야 하지만, 한국정부가 압박으로 중국을 굴복시켰다는 식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한 문제는 계속 꼬일 수밖에 없다.


    6. 결어와 제안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비핵화-평화협정체결 교환 매트릭스는 최근의 재점화된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유관국들이 등가성을 공유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다. 「9.19 공동성명」까지는 불만 속에서도 맞춰볼 여지라도 있었지만, 현재는 엇갈림이 더욱 깊어졌다. 한미양국 정부는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북 경제지원과 체제보장이 북한에게 여전히 교환조건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북한이 평화협정을 원하지만 비핵화와의 연계는 거부한다. 북한이 현재 말하는 체제보장이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통한 적대관계 청산은 맞지만, 그 목표로 가는 최우선 방법은 핵무력 증강이다. 게다가 김정은 정권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순서의 교환을 하지 않을 경우 한반도의 비핵화뿐 아니라 미국의 비확산체제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시위한다.


    한반도의 전략적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으며, 미중 관계가 봉쇄와 협력의 양면적 성격을 가짐에 따라 외교적 해결을 향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접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은 역설적으로 평화에 대한 절박함을 더욱 요구한다. 미국도 북한도, 그리고 중국도 아닌 한국판 평화체제안을 마련하고 대화국면을 주도할 필요성이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우선 교환의 등가성을 잃어버린 비핵화-평화체제 교환 매트릭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 집착으로 인한 선행론 또는 입구론은 포기하되, 실현가능성을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교환 매트릭스를 낮은 단계로 잡아야 한다.


    일단 북한 핵프로그램의 동결이 답이다. 예를 들면 북한의 핵실험 유예-한미군사훈련 축소, 핵동결-군사훈련 중지 또는 연기, 핵동결-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 시작 등을 우선적으로 또는 병행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북한은 2015년 초부터 이런 낮은 단계의 교환을 꾸준히 제안하고 있다. 훼손된 남북의 군사적 신뢰를 우선적으로 복원하고, 북핵이나 NLL, 주한미군 철수 같은 민감한 사안들을 우회하고 일단 낮은 수준의 교환을 통한 군비통제를 진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러한 신뢰구축 과정을 상당기간 진행 한 후에 시기와 교환조건에 관한 협의가 가능하고 상호수용이 가능한 한 시점이 오면 한꺼번에 패키지 딜로 해결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다.


    북한은 2015년 1월 9일에 한미가 합동훈련을 잠정적으로 연기한다면, 북한 역시 핵실험을 유예할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한미 양국은 늘 그렇듯이 앞뒤를 따져보지 않고 북한의 진정성 없는 기만책으로 취급해 거부했다. 북한은 이 제안이 거부된 이후에 한발 더 나아가 핵실험뿐 아니라 위성발사, 핵물질 생산도 유예하겠다고 했다. 한미 양국에 원하는 것도 군사훈련의 완전한 폐지가 아닌 규모만 축소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미 양국은 북의 제안을 일축했었다.


    우리에게 핵문제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핵문제에만 올 인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북핵문제가 남북관계는 물론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매듭처럼 꼬인 한반도의 문제를 핵문제에만 집착해서 그 줄을 당기면 오히려 더욱 조여지고 헝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난 25년 동안 경험했다. 지난 4반세기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리는 '상호보복구조(tit-for-tat)'를 푸는 것은 한쪽의 붕괴가 아니라면 과감하고 관용적인 양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화처럼 전자에만 매달리는 한국정부가 후자로 전략을 바꿔야 한다.


    그런 면에서 북한이 7차 당대회 이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재래식 무기 군축회담도 거부하지 말고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 역시 핵경제 병진노선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 보유를 통해 국방비를 줄이는 측면이 있겠지만 북한의 근본적인 경제역량이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동원해야 하고, 그러려면 국제사회의 투자가 필수적이다.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제재국면에서 당분간은 소위 자력갱생에 의해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협상테이블에 나올 동기는 존재한다.


    2016년 초 대북제재 국면 이후 진행되었던 일련의 대화모색은 제재만으로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수 없으며,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국 협상을 통한 외교적 해결밖에 없다는 증언과 다름없다. 비핵화 원칙을 버릴 필요는 없다. 북한 비핵화도 의제에 함께 올리면 된다. 대미 평화협정 공세가 먹혀들지 않자 북한은 남한을 향해 대화공세를 벌이고 있다. 당장은 군사회담이지만 모든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했다. 대미접촉에서 미국이 비핵화를 병행논의하자는 요구 때문에 거부하고 핵실험에 나섰던 북한이 한국과는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 틈새를 파고들어야 한다. 당장 결실을 보기 쉽지 않고, 또 북한의 지연 또는 기만전술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요구를 들고 가서 북한의 입장을 듣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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