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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0주년 기념식 - 학술회의 ( 문정인 교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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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말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새 날이 열리고 있습니다. 55년 적대관계의 종지부를 찍고 민족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2000년 6월 15일 성남비행장에서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귀국인사말이 아직도 내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김 대통령은 겸허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가능성을 보고 왔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김대통령은 그 가능성을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금강산 관광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남북간 교류 협력은 해가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산가족 재 상봉 등 인도적 측면에서의 남북관계도 크게 개선되었고 개성공단 프로젝트도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남과 북 사이에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이 과정에서 우리를 가로 막았던 지뢰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제거하기도 했다. 남북한 간 직통전화 설치를 통해 우발적 위기에 대한 공동 보조를 맞추어 나갔고 남북 당국자 들 간의 활발한 교류와 대화는 신뢰구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에 충분했다. 물론 과도기적 대립과 불안이 존재 했다. “전쟁의 바다” 서해와 “평화와 번영의 바다” 동해의 역설적 공존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순적 대결 공간을 신뢰 구축의 새로운 공간으로 슬기롭게 변모시켜 나갔다. 분명 제 1차 남북 정상회담은 냉전구도를 뛰어 넘어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하는 역사적 쾌거였다. 6.15 공동선언은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총론적 구상을 제시하는 것이었는가 하면 10.4. 정상 선언은 이를 구체화하는 각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1, 2차 정상회담과 「6.15.」,「10.4.」 공동선언을 통해 전쟁도 없고, 적화통일도 흡수통일도 아닌 공존공영의 평화통일의 가능성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6. 15. 10주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낀다. 지난 두 정부가 그렇게 애써 이루어 놓았던 남북 교류협력의 토대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본다. 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최악이다. 이미 금강산 사업은 폐쇄되었고,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 교류협력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남북해운합의서 즉각 파기와 북한상선의 제주해협 통행 차단, 북한 지역에 대한 전단 대량살포와 휴전선에서의 대북 심리전방송 재개, 그리고 대규모 한미연합훈련 및 PSI 해상차단 훈련 실시 등의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 뿐 아니라 북한 주적론이 기정사실화 되고, 일부 보수층의 “전쟁불사론”은 탄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북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다. 북한은 현 사태를 ‘엄중한 전쟁국면’으로 규정하고 전군에 전투태세를 하달했다. 전면전까지도 치를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대결 국면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역사의 반전인가! 그러나 역사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며 되돌아 가서도 안 된다. 바로 그 점에서 6.15. 공동선언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그리고 통일에 주는 함의를 현재적 관점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6. 15. 공동선언과 한반도 평화와 안보


    한 차례 큰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평화처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것인가?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평화를 지키는 것(peace-keeping)”이며, 둘째는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peace-making)”이며, 마지막으로는 평화를 구축해 나가는 것(peace-building)”이다 1)


    여기서 ‘평화를 지킨다는 것’은 분쟁상태의 소극적, 반사적 관리를 의미한다. 적대 당사자간에 전쟁을 막기 위한 군사적 억지(deterrence)전략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 독자적 군사력으로 상대방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지 못할 때 동맹이라는 카드를 쓰게 된다. 동맹과의 연합 전력을 통해 억지력을 구축하고 전쟁 발발을 예방하는 것이 Peace-keeping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억지력을 통한 평화의 유지는 분쟁의 한시적, 소극적 관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담보 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군사적 억지를 통한 평화의 유지는 상호 불신과 군비경쟁을 촉발하여 안보 딜레마를 오히려 심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분쟁당사국들은 가급적 평화의 유지를 넘어서 ‘평화를 만드는데’ 관심을 표명해 왔다. Peace-making의 핵심은 군사적 억지력을 통해 전쟁의 예방을 모색하는 동시에 신뢰 구축을 통해 평화공존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 신뢰구축, 군비통제, 군축, 그리고 평화협정체결 등이 이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정상회담과 각료회담의 제도화에 기초한 정치적 신뢰구축과 군사훈련의 상호통보와 참관, 직통전화가설, 공동위기 통제센터의 설치·운용, 군 인사와 정보 교류, 그리고 공세적 무기의 후방 배치를 특징으로 하는 군사적 신뢰구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Peace-making 역시 불안정한 평화의 한시적 관리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적대 당사국들 간에 불신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 (Peace-building) 할 수 있어야 한다. 임마뉴엘 칸트가 주장했던 영구평화론이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2). 칸트는 영구 평화로 가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째는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 평화론이다. 시장경제를 통해 서로 경제적 상호의존이 높은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민주 평화론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해 대내적 견제와 균형이 제도화된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 평화연방(world pacific federation)과 같은 공동체가 구축될 때 영구적이고 안정적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제한적이긴 하지만 오늘날 유럽은 칸트가 꿈 꾸었던 영구평화론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세 가지 요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갖추지 않아도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이 담보되고 협력과 통합이 제도화 될 때 평화의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점이다.


    그러면 6.15. 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 안보와 관련하여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무엇보다 신뢰구축에 대한 공헌이다. 6.15. 공동선언의 채택과 더불어 ‘55년 적대관계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남북관계의 서장이 열리는 것을 목도 할 수 있었다. 6월 14일 김대중 대통령 주최 목란관 만찬에 북측 국방위원들이 대거 참석, 남측 공식 및 특별 수행원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6.15. 백화원 초대소에서 거행된 송별 오찬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첫 마디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방금 전 국방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일부 위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휴전선에서 대남 비방 방송을 중단키로 결정했습니다.” 그 오찬 자리에서 남측 인사들은 조명록 차수, 현철해 대장, 박재경 대장, 장성택 부부장, 강석주 부부장, 임동욱 부부장 등의 지도급 인사들과 허심탄회하게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소위 전쟁을 획책하는 ‘적의 심장부’와의 조우에서 대화와 신뢰 구축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뒤 이어 남과 북의 국방장관 회담도 성사되었고 이를 통해 직통전화설치 등 다양한 신뢰구축 조치가 이루어졌다. 현장에 있었던 필자에게 이러한 사태 진전은 감동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다.


    6.15. 공동선언은 신뢰구축에서 끝나지 않았다. 평화의 공간을 확장하는 쾌거로 연결되었다. 개성공단이 바로 그것이다. 개성지역은 북한의 최전방 전략적 요충지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에 따른 남북 경협이라는 대승적 목표 하에서 북한 군부는 이 지역을 남북 공동 번영의 산업 거점으로 전환하는 데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무장지대의 지뢰를 제거하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면서 단절의 벽은 무너져 갔고 신뢰 구축과 평화 공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2000년 6.15. 공동 선언 이후에도 남북간의 무력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해에서 두 차례에 걸친 충돌이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북의 무력 도발에는 강력히 대처해나가면서도 신뢰 구축과 평화의 끈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해에서는 싸우면서도 동해에서는 신뢰와 평화의 노력을 지속해 나갔다. 55년 적대관계를 일순간에 해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쟁과 평화의 불편한 동거를 인식하면서 적대와 대립을 최소화하고, 신뢰와 평화의 가능성을 높여가는 전략을 채택했던 것이다.


    6.15. 공동선언이 주는 또 다른 함의는 남과 북이 더불어 주체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1999년부터 페리 프로세스가 작동되었지만 2000년 6월 정상회담 당시까지만 해도 북미관계는 원만치 못했다. 이를 반전시켰던 것이 6.15. 정상회담이었다. 회담이 끝나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은 황원탁 외교 안보 수석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내 김정일 위원장의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의 방미 초청으로 화답했고 10월 13일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공동 콤뮤니케를 채택하는데 이르렀다. 그리고 10월 하순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다. 비록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국민의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북미 관계 개선을 가져왔고 이는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구축에 긍정적 기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만일 2000년 11월 대선에서 앨 고어 부통령이 승리했더라면 6.15. 공동선언에 따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보다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남과 북이 공동으로 노력하면 주변 4강을 설득하여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6.15.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함의는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 변화에 있다 하겠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과 밖의 안보 환경을 조성하고, 번영, 자긍심(prestige),행복을 누리게끔 하는데 있다. 6.15. 정상회담은 이러한 국가의 존재 이유를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다. 6.15 이후 대다수 국민들은 북을 주적이 아니라 공존, 공영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고, 안보와 평화에 관한 한, 정부를 믿고 안도감을 가지고 생업에 전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8년 「1.21.」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우리 국민은 ‘안보 공포증’의 포로였다. 남북간에 사소한 충돌만 있어도 쌀과 라면을 사재기 하고, 여유 있고 연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으로 엑소더스를 감행하지 않았던가. 6.15. 공동선언은 그러한 안보 우려를 크게 완화 시키는데 공헌을 했던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이러한 현상을 “안보 불감증”이라고 폄하하고 있는데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안보 불감증’은 국민의 정부 최대 실정이 아니라 최대 업적이라 평가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시민들을 매일 전쟁 공포에 시달리고 안보 걱정하면서 살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안보는 국가의 몫이고, 국민은 국가의 안보 우산 아래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6.15. 공동 선언은 역설적으로 ‘안보 불감증’ 이란 선물을 우리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3. 6.15. 공동선언과 한반도 통일에 주는 함의


            6. 15. 공동선언은 평화와 안보 못지않게 한반도 통일에 주는 함의도 크다. 이 선언의 2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라는 대목은 참으로 획기적이라 하겠다. 일부 보수적 인사들은 공동선언 2항을 북한의 연방제를 그냥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김정일 위원장이 종래 북한의 연방제안을 크게 양보하여 우리측의 연합제 방안을 전향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3)


     ‘국민의 정부’의 햇볕 정책은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다. 첫째는 북한의 어떠한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는 흡수통일을 모색하지 않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류 협력의 활성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사실상의 통일을 추구한다. 여기서 사실상의 통일이란 바로 남북이 평화 공존하고 사람과 물자가 서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간의 이질성을 감안할 때 1국가, 2체제, 2지방정부의 연방제 방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남과 북 정상이 만나 정치적 신뢰를 구축하고 정상회담, 각료회담, 국회회담 등을 정례화 하는 동시에 모든 분야에 있어서 남과 북 간의 교류 협력을 강화해 나감으로써 유럽 연합과 유사한 남북 연합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남과 북의 주민들이 연방제 또는 단일 민족 국가 형태의 통일을 국민 투표와 남북간 합의를 통해 실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함의가 도출될 수 있다. 그 하나는 통일 과정의 장기성과 복합성이다. 남과 북이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넘어야 할 대내외적 과제가 많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평화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의형 통일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쉬운 과제부터 해결해 나가고 어려운 것들을 차후에 단계적으로 해결한다(先易後難)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 구상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 한반도 통일을 논함에 있어 최근 부상되고 있는 것이 1990년대 초 풍미하던 흡수 통일론이다. 일부 보수학자들은 흡수 통일의 비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을 고립, 봉쇄하고 김정일 체제의 내부적 붕괴에 따른 흡수 통일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이 그러한 경로를 밟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흡수통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김정일 체제가 사라진다고 해서 북한 주민들이 주권을 포기하고 남에 투항한다는 보장이 없다. 북한 주민과 엘리트들은 독일 통일 과정을 통해 흡수된 자신들의 미래를 너무도 분명이 인식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게는 1조에서 많게는 5,000조 이상이 드는 통일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독일처럼 경제 기반이 탄탄한 국가도 통일 비용의 후유증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한국이 북한을 흡수하고 관련 비용을 전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엄격히 말해 독일 통일은 흡수형 통일이 아니었다. 호네커 정권의 붕괴와 더불어 동독에서는 민주정당들이 출현했고 이들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만들어 낸 합의형 통일이 독일 모델인 것이다.


    일부에서는 무력형 통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한의 급변 사태와 개념계획 5029 에 따른 북한 안정화 계획이다. 북한 지도부에 유고 사태가 발생, 내부적 혼란이 심화되고 대량 살상무기의 행방이 우려되는 상황 하에서 한미 연합전력이 군사 개입을 통하여 북한 지역을 안정화시키고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통제를 확보한 후 궁극적으로는 흡수 통일을 실현 한다는 것이 이 구상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 개연성이 희박할 뿐 아니라 비용 또한 매우 클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형태이건 남북한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이것이 확산될 경우, 그에 따른 인명 및 경제적 희생과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Garry Luck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의 미 의회 증언에 따르면 한반도 전쟁 발생 시 초기 단계에서 미군 52,000명, 한국군 490,000, 민간인 백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쟁 비용 1,000억 불, 그리고 전후 복구 비용은 1조 억 불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2009년도 GDP 1조 억불 기준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시 들었던 전쟁 비용 등을 감안하여 전쟁 비용을 개략적으로 재 추산 해 보면 전쟁비용 3조 억불, 전후 복구 1조 억 불, 통일 후 재건 비용 2조 7천억불 등 총 6조 7,000억 불이 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4)


    따라서 흡수 통일이나 무력 통일은 대안이 되기 어렵다. 최근 한국 정부가 북측과의 교류 협력을 단절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증대이다. 북한 경제의 대중 의존도가 심화되면서 북한이 동북 3성에 편입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 사실 중국 정부는 최근 장춘, 길림, 도문 (장길도) 을 중심축으로 한 대규모 동북지역 개발 프로젝트를 착수 한바 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북한 간 경제관계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 미국, 일본이 북한을 외면하고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전개하면서 야기된 현실이다. 어떤 이들은 북한이 중국의 신탁 통치 하에 놓이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 북한이 중국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 될수록 한반도 평화 통일의 가능성은 더 멀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6.15. 공동선언의 빛나는 함의가 있는 것이다. 교류, 협력을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신뢰 구축의 토대 하에 평화 공존을 확실히 하여 사람과 물자가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사실상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 그 이상 바람직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상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이를 제도적으로 담보해 주는 남북 연합은 자동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렇듯, 6.15. 공동 선언이 한반도의 평화 안보, 그리고 통일에 주는 함의는 매우 긍정적이고 전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형국을 보면 한반도의 미래를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천안함 사건 이후의 남북 관계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 문제 인가. 무엇 보다 북한의 변하지 않는 자세가 문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시 행정부 1기의 “네오콘의 망령”이 한국에 되살아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미국의 네오콘은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외교 정책을 전개해 왔다. 그 첫째는 도덕적 절대주의다. 미국만이 옳고, 미국적 가치만이 절대적이라는 신념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 또한 다른 가치와의 공존을 배격하는 동시에 미국의 도덕적 우월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을 불량국가나 악의 축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둘째는 패권적 일방주의다. 이는 유엔을 포함한 다자 협력기제를 무시하고 미국의 외교 정책을 국제 사회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외교 양상을 의미한다. 특히 다른 국가의 주장과 불만을 경청하지 않고, 자국의 입장 만을 강조하는 것이 그 대표적 행태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공세적 현실주의다. 공세적 현실주의의 핵심은 선제타격론에 있다. 즉, 미국에 대해 직접적 군사 행동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 의도에 의심이 가면 선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바로 이러한 네오콘 원칙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은 이미 잘못된, 정의롭지 못한 전쟁으로 낙인이 찍혔고, 아프간 침공은 아직도 완전한 승기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둘러싼 여러 인사들이 이들 「네오콘」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사실 현 정부에서 외교 안보 정책을 주도 하고 있는 인사들의 발언이나 행태를 보면 다분히 도덕적 절대주의 경향을 보인다. 북한 체제를 악의 축으로 간주하고 잘못을 저지른 북한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도덕적 사명감을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다. 게다가 북한 김정일 체제가 종식되어야만 북핵 문제는 물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해결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역지사지의 자세는 찾아 볼 수 없고 일방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엄격히 말해 “비핵 개방 3,000”이나 “그랜드 바게닝” 제안 모두 북한의 의향과 관계없이 우리의 일방적 제안인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부분은 북이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일방적으로 내걸고 북이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국제사회에 대북 제재를 위한 공조를 요청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러한 정부 입장이 다자주의, 국제공조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으나 엄격히 말해 이는 일방적 압력의 우회적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지난 두 정부에서 이미 잘 구축해 놓은 양자 채널이 있는데 이를 활용하지 않고 북을 배제한 가운데 국제 사회에 대한 호소를 통해 지지를 획득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라 하겠다.


    또한 천안함 사건 이후 우리 정부는 북한을 “주적”으로 재 규정하고 “공세적 억지(proactive deterrence)”를 새로운 전략 강령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 명분을 자위권 행사에 두고 있다. 자위권은 국제법이 허용하는 주권 국가의 고유 권한이지만 ‘공세적 억지’는 다분히 네오콘이 주장하는 선제공격론과 맥을 같이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현 정부에 있어 이러한 발상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선제공격은 국제법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히 하자. 미국의 네오콘은 실패했다. 패권력을 가진 미국도 실패한 정책을 우리 정부가 성공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까? 의문이 앞선다. 북한을 고립, 봉쇄하고 북한 체제를 변환 시키기 위한 국제적 응징을 전제로 한 패러다임 변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위급한 상황 하에서도 냉정과 신중으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관성 속에 안주하는 자세로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지혜를 가질 수 없다. 지혜는 기존 사고 유형, 즉 “프레이밍”을 재구성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6.15 10주년을 맞아 이제 고리타분한 보수의 프레임을 벗어 던지고 실사구시에 기초한 중도 실용주의의 정책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잘 다듬어지고 확실한 남북 관계 개선의 길이 있는데 왜 나지 않는 길, 불확실성의 길을 애써 찾아 걸으려 하는지 다시 한번 깊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1)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임동원, 「피스메이커」(서울: 중앙 books, 2008) 참고 바람.


    2)Immanuel Kant.Perpetual Peace (New York : Liberal Arts Press. 1948).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서울 : 서광사 1992); Michael W. Doyle.Ways of war and peace : realism, liberalism, and socialism (New York : W. W. Norton & Co.1997); Bruce Russett. Graspingthedemocraticpeace:principlesforapost-ColdWarworld(Princeton,N.J.:PrincetonUniversityPress).


    3) 이 시각에 대해서는 임동원, 피스 메이커, pp.93-106 참고 바람.


    4)Don Oberdorfer, heTwoKoreas:AContemporaryHistory(NewEdition)(BasicBooks,2001),p.324;USCongress.SecurityImplicationsoftheNuclearNon-ProliferationAgreementwithNorthKorea,HearingbeforetheCommitteeonArmedServices,UnitedStatesSenate,104th Cong.,1stsess.,January26,1995,p.22;문정인, 이상근, “남북한 통일 비용- 시나리오별 분석” (미발표 논문,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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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센터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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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7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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