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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 (Session 2 / 발표 ) 김준형 | 한동대학교 교수

    본문

     


    1. 서론: 광화문의 기적과 신정부 출범

    박근혜가 2017년 3월 10일에 탄핵되었고, 5월 9일 대통령선거로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촛불혁명으로 시작해서 탄핵인용으로 이어진 모든 과정은 국정을 농단해 자격을 상실한 대통령을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끌어내린 민주주의의 진정한 승리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가리켜 선거이후에는 무력한 ‘청중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 즉 주권을 가진 시민보다는 정치가가 만들어 내고 조종하는 이미지에 반응하는 구경꾼의 민주주의라며 비판했던 베르나르 마냉에게 한국의 광화문의 광장민주주의는 확실한 반대 사례를 제공했다.


    문재인정부의 출범은 ‘광화문’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은 이제 “이게 나라다!”라는 답을 줄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헌법 제1조와 제2조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박근혜는 사적 권력을 위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으며, 공공성을 훼손함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국가란 존재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은 돌아온 군주처럼 행동했었고, 집권여당은 삼권분립의 견제기능을 송두리째 포기한 신하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신민이기를 거부하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을 지닌 시민으로써 대한민국 헌법의 유효함을 증명했다.


    탄핵전의 대한민국은 세월호와 다름없는 운명이었으나 국민들이 스스로 침몰을 막아냈다. 대통령은 골든타임을 낭비했었지만, 국민들은 정부의 야만성에 항거했고, 매장당한 공동체의식을 되살려 마침내 침몰을 막아냈다. 오바마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서 “헌법은 미국이 가진 소중한 보물이지만 사실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다”라고 했다. 오바마의 연설은 감동적이지만, 행동으로 보여준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


    박근혜정부의 몰락과 신정부의 출범은 해방이후 오늘까지 이어진 반민주, 친일, 친재벌주의 등의 극복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또 다른 과제가 놓여있는데 그것은 분단체제에 기생하면서 악용해 온 안보장사꾼들의 종북·반평화 프레임에 대한 극복이다. 촛불혁명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4.19, 광주 민주화, 6.10 민주항쟁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대외 및 남북관계에 있어 6.15와 10.4의 평화와 민족화해정신의 계승인 것이다. 이명박·박근혜정부는 탄핵의 직접적 이유인 민주주의 훼손과 국정농단만큼이나 반(反)평화집단이었으며, 분단체제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한 세력이었다. 친미반북으로 국내 이념갈등을 증폭시킴으로써 권력획득과 유지에 골몰했다. 남북한 모두 상호적대감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이른바 ‘적대적 공생’ 구도였다.


    심지어 탄핵인용 이후에도 국방부와 외교부는 황교안권한대행의 비호아래 미국의 군부와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듯한 행보를 계속했다. 뒤늦게 드러난 사드 추가반입에 대한 문대통령 보고누락은 이런 적폐를 드러낸 충격이자 경고다. 권력교체의 가능성이 높은 시점에서 도리어 사드배치를 가속화시켰던 것은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여전히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적폐 행태가 정부가 바뀐 뒤에도 변하지 않았음을 재확인해준다. 사드배치는 결코 끝이 아니다. 미중은 한국을 인질로 갈등격화조짐을 보이고, 일본은 재무장을 가속화하고, 러시아는 호시탐탐 개입을 도모하며, 북한은 도발을 멈추지 않는 극히 어려운 외교환경에서 최선의 자세와 최상의 실력으로도 모자란데 구태의연한 진영논리로 위기에 빠뜨렸다.

    2. 뉴노멀(New Normal) 시대

    오늘의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왔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급격히 힘을 잃으면서 문명사적 전환시대를 맞고 있다. 구미 선진국들은 여전히 규칙에 기초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회복과 준수를 주장하지만 핵심 두 축인 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는 시장 확대를 통해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누려왔지만 공짜는 없었다. 번영의 과실은 전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강요된 희생과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졌다. 세계화에 특화된 기업과 자본은 기회와 이익의 확장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는 지속적 임금삭감과 자산하락으로 고통 받았다. 시장과 함께 민주주의도 정당성을 잃어갔다.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중동의 봄’으로 언뜻 외연을 확장하는 듯 보였지만 중심부가 휘청거리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갖췄지만 집권이후 권위주의와 선동적 참주정치로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훼손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뉴노멀(new normal)’ 담론이다. 뉴노멀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또는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새로운 기준의 등장을 의미한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가 1920년대 말 대공황과의 비교를 넘어, 자본주의경제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몰락을 예견하는 상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자본주의의 고성장과 고소득을 통한 번영의 시대가 끝나고,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의 고착을 필두로 글로벌 경제의 장기침체, 경제적 불안정의 일상화와 빈부격차의 글로벌화로 대표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핵심 고리로 친화적 연결성을 극대화한 반면, 국가와 같은 공적 영역은 축소시켜왔다. 국가는 이러한 자유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취급당해 주변화 되었다. 시장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조정자로서의 국가역할이 축소되었고, 약자와 소수자를 우선해야하는 정치 본연의 기능도 약화되었다.


    국가가 시장의 승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함으로써 누군가를 제압하고 빼앗아야만 가질 수 있는 제로섬게임과 적자생존의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의 극대화는 상식이 되었고, 승리한 자본이 독식하는 메커니즘은 견고한 요새를 구축했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부가 만들어낸 위계적 질서를 통해 밑으로 전가된다. 뉴노멀은 장시복 교수의 지적처럼 ‘위계화된 승자독식사회’의 전형으로 약탈의 먹이사슬과 같다. 성공의 과실은 독점하고, 실패의 고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불평등은 심화‧축적되었다. ‘부의 낙수효과’가 아닌 ‘손실의 낙수효과’가 진행되어왔던 것이다.


    뉴노멀이 1차적으로는 경제담론이지만 국제정치질서의 급격한 변동도 배태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제침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극우포퓰리즘이 부상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슬로건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브렉시트의 ’영국 우선주의(Britain First)‘는 내부의 실패를 외부의 탓으로 돌리기 위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극우포퓰리즘의 전형적 사례들이다. 과거에는 국제정치가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측면이 훨씬 컸지만, 최근에는 국내정치가 국제정치에 끼치는 영향이 훨씬 커졌다. 이런 배경에서 각국은 내부결속을 위해 외부로부터의 안보위협을 과장하고, 군비경쟁을 강조한다. 이런 모습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과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불가리아 자유주의전략연구소의 이반 크라스테브(Ivan Krastev)는 브렉시트는 독일의 통일을 가져온 흐름을 역전시키고, 더 멀리는 1945년 전후 유럽체제가 지향했던 협력과 통합이 해체되는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미주와 유럽대륙도 심상치 않지만 동북아가 문제다. 예로부터 한반도와 그 주변은 ‘아시아의 발칸’ 또는 ‘지정학적 저주’로 불릴 만큼 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다.. 남북의 분단구조는 그대로이고, 탈냉전 도래 사반세기에도 대결구도는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일본의 침체, 그리고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겹쳐지면서 불안정성이 점점 증대되었다. 동북아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민족주의의 발흥과 경쟁적 군비강화는 예외가 없다. 시진핑, 아베, 푸틴, 김정은 등 하나같이 국내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안보포퓰리즘에 의지한다. 트럼프의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네트워크를 재건하는데, 이는 어떤 식으로 포장해도 냉전질서의 재현에 가깝다.

    3. 한반도 및 동북아의 전략 환경

    현재의 한반도와 그 주변은 냉전질서 부활의 양태를 가지고는 있지만 과거의 단순한 진영대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협력과 갈등이 공존하는 역설은 물론이고, 다차원의 중첩성을 띤다. 최소한 3중(글로벌, 아시아, 한반도)이고, 한국의 입장에서 판단하자면 국내정치까지 겹쳐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되어 해법은 난해해졌다. 가장 거시적인 차원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차원의 협력증대와 갈등심화의 패러독스 현상이다. 미국과 중국의 교역량은 2016년 통계로 5,782억 달러에 이르고 있으며, 중국은 (캐나다에 다음으로) 미국의 두 번째 최대 교역국이며, 미국 역시 (EU 다음으로) 중국의 두 번째 최대 교역국이다. 미국은 중국 상품의 최대 수입국이며, 중국은 미국 상품의 제3대 수입국이다. 또한 중국은 미국 국채 1조 2,400억 달러를 보유한 최대 채권국이다. 미국 소비자는 값싼 중국 상품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중국은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세계질서 안에서 경제성장을 이뤘다. 또한 현재 기후변화, 환경, 에너지, 대량살상무기 확산, 북한 및 이란의 핵문제 등에서 서로 협력이 불가피하다.


    반면에 군사적 불신도 함께 커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자신을 포위하는 전략으로 인식하며, 미사일방어체제의 궁극적 표적이라고 인식한다. 이 때문에 중국은 지난 20년간 연평균 10% 이상 군사비를 꾸준히 늘여왔고, 핵잠수함, 스텔스기, 항공모함, 대항모미사일, 중장거리탄도미사일 등의 첨단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왔다. 반대로 미국은 이를 지역안정을 위협하는 행보로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은 최근 미일동맹이 급속하게 강화되고 있는 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바마 집권 2기에 가속화된 미일동맹은 2016년 5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으로 정점을 찍었으며, 앞으로 더욱 긴밀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미중갈등이 심화돼도 실제로 군사적 충돌에 이르기는 어렵다. 많은 전문가들이 미중이 높은 상호의존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소위 ‘투키디데스의 덫(Thucydides' Trap)’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미중이 ‘충돌은 곧 공멸이므로 협력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당위를 수용한다 하더라도 실천여부는 미지수다. 중국의 GDP는 2014년 기준 11.21조 달러로 미국(18.12조 달러)의 2/3에 달하며 구매력을 감안한 국방비 역시 미국의 절반에 육박한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상호불신이 여전한 가운데 상대의 수용과 양보를 전제로 하는 협력과 공존을 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다. 중국의 역내 리더십에 대한 확장욕심과 미국의 기존 리더십에 대한 공세적 방어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미중 양국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불행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지만 상호신뢰가 충분하지 않고, 국제정치를 특징짓는 권력외교의 속성상 갈등을 해소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층위는 동북아지역, 확대하면 동아시아지역이다. 이 지역은 높은 경제적 상호의존도에 비해 정치안보분야의 협력 수준은 낮다. 게다가 영토분쟁, 군비경쟁, 역사왜곡논쟁, 핵개발 등 지역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전 세계가 동아시아를 경제발전의 새로운 엔진으로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중심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의 갈등과 대립은 확대되고 있으며,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은 대중봉쇄 경향을 강하게 띤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붕괴되면서 미소 대결구조가 사라지고, 90년대 말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아시아국가라는 공동정체성과 다자협력 움직임이 확대되는 조짐이 보였다. 또한 지역협력과 다자협력을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들도 활발하게 모색되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과 유럽의 금융위기와 더불어 미국의 침체와 중국의 부상이 겹쳐지면서 지역공동체 논의는 약화되고 세력재편에 따른 갈등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미국 주도의 동북아 지역질서는 쇠락해가고, 미중의 패권경쟁과 함께 중일간의 역내 패권경쟁, 그리고 일본의 재무장 우경화전략들이 지역 안정을 위협하고 역내 협력을 저해한다. 글로벌 차원에서의 미중의 세력전이에 비해 동아시아 차원의 중국과 일본의 세력전이는 이미 많이 진행되었으며, 사실상 일본은 이미 중국에게 지역패권을 넘겨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부상은 미국보다 일본에 훨씬 더 시급한 문제다. 게다가 중일 사이에는 역사논란과 영토분쟁으로 정치지도자들의 대화가 단절되고 악화된 국민감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아베정부는 이를 역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중국의 부상을 빌미로 재무장을 노골화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동맹에 의한 세력균형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동맹국들을 통한 아웃소싱을 원하고, 일본은 중미갈등을 활용해서 재무장을 강화하려 한다. 미중의 갈등과 협력의 이중구조에서 일본이 갈등촉진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미중과 중일 사이에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세력권 편입경쟁도 가시화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서부 중국의 발전과 동남아 경제권을 함께 묶는 전략을 추구하고 미일은 중국의 부상을 부담스러워하는 베트남, 싱가포르, 미얀마, 그리고 인도를 잇는 벨트를 형성해 중국의 남하를 저지하려 한다. 일본은 더 나아가 미국과의 공고한 동맹을 바탕으로 러시아와의 협력도 모색하면서 중국의 부상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다차원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으로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가운데, ‘신동방정책’으로 극동 시베리아 지역 개발을 위한 역내국과의 협력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아세안 국가들은 강대국들의 갈등과 상호 의존의 역설구조 속에서 편승과 헤징(hedging)이라는 이중전략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애쓰고 있다.


    세 번째 패러독스는 한반도에서 작동하는데, 분단의 남과 북이 서로에게 위협인 동시에 화해와 공존,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분단구조의 지속과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로 말미암은 안보위협으로 동맹 강화의 필요성이 증가하는 동시에 남북관계 개선의 요구도 함께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된 지 사반세기가 지났고 남북한의 국력이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는데도, 통일은커녕 평화공존의 가능성조차 낮아졌고 한반도에는 대결과 긴장이 심화되어왔다. 탈냉전의 기회를 바탕으로 초기에는 분단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이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모색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것이 무산된 채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남한은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 이외의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북한과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에도 실패했다. 도리어 압박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위기지수를 높여왔다.


    더욱이 남북관계는 글로벌 및 아시아 패러독스를 강화하는 땔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와 남북관계 악화로 한반도는 때로 분단고착을 넘어 전쟁위기에까지 이르고 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미동맹에서 군사적 요소가 가장 중요해졌고, 남북한은 물론이고 동북아 지역 전체에서 안보딜레마와 군비경쟁이 격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 북한의 핵개발은 저지하지 못하면서 일본의 재무장과 미국의 대중봉쇄의 전위대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세계와 지역의 역설이 낳은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한반도에 투영되어 한반도 패러독스를 증폭시키고, 한반도 패러독스는 다시 상위의 두 패러독스를 강화시켜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내정치까지 감안하면 패러독스는 3중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수정부 9년 반은 외교안보통일 담론을 국내정치에 적극 이용해 왔다. 특히 남북관계를 북한과의 기싸움과 국내보수층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외교를 국내정치의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외교의 기본은 사라지고 국익은 큰 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협상대상국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과대포장 하고, 민족주의적 경향을 앞세워 선명성 경쟁을 해왔다. 또 희망적 사고를 부추겨 과도한 기대를 하게 만들고 알맹이 없는 외교적 성과를 과장했다. 게다가 국정원의 NLL 대화록 공개와 국방부의 전시작전권 환수 재연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국민의 안보불안 심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안보포퓰리즘이 전면에 대두되었다. 과거 유신시대를 연상시키듯 반공이데올로기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며, 통일과 평화 담론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안보를 군사력강화로만 보는 냉전시대의 사고를 되살려 국내정치적 효과로 반북친미 성향의 보수층을 결집시킨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3중의 패러독스에서 핵심변수는 아무래도 미중의 관계설정이 될 것이다. 즉, 2017년 새로 출범한 트럼프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 지속여부와 중국 시진핑 정부의 향후 10년간 외교 전략의 근간이 될 ‘신형대국론’간의 관계설정을 주목해야 한다. 세력권의 경계설정이 관건인데, 한반도, 중국·대만 양안, 동중국해, 남중국해가 그런 지점들이다. 이들 중 한반도는 가장 미중의 가장 치열한 기싸움 또는 기싸움을 넘어 충돌의 발화점이 될 수 있다. 이른바 단층선의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한 지점인 한반도는 경계의 자리에서 이를 강화할지, 아니면 상호 완충의 역할을 할지 기로에 있다. 후자가 우리 국익과 지역의 평화를 위해 취해야 할 바람직한 선택임이 분명하나, 지금까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해 온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핵개발과 한국의 대북강경책은 미중 갈등의 빌미가 되어버렸다. 사드배치 결정은 동북아 단층선을 강화하는 변곡점이 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북한 핵개발을 미사일방어망 구축의 빌미로 활용하는 미국과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한국의 대척점에 설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의 대응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단선적이었다. 북한의 선 변화를 전제로 내걸어 대화에 소극적이었고, 남북관계 개선과 한중관계 모두 한미동맹의 종속변수로 다뤄왔다.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한중관계 개선도 남북관계 복구 실패와 동맹일변도 외교로 말미암아 점점 동력을 상실해버렸다. 특히 근거 없는 북한붕괴론에 매달려 관계개선이나 협상노력은 뒤로한 채 대북 압박의 수위를 올리는 데만 전념해왔다.



    4. 한미양국의 신정부 출범의 함의

    2016년 말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정권을 잡았다. 2017년 초 출범한 트럼프정부는 불가측성으로 국제정치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4월초 트럼프-시진핑의 첫 정상회담 이후 기존의 예상보다는 협력분위기를 보였으나 패권갈등 구조가 쉽게 해소되기는 힘들 것이다. 북핵문제 역시 해결이 난망하고, 동북아 역내의 안보딜레마는 현저해지고 있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으며,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대중압박 기조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문제는 방향인데,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오바마 정부보다 안보와 경제 영역에서 미중의 경쟁 또한 훨씬 더 치열해질 수 있다.


    트럼프는 다른 정책영역과 마찬가지로 대북정책에서도 포퓰리스트적 비일관성을 노정한다. 트럼프는 오바마정부 8년간의 전략적 인내를 실패한 정책으로 규정하고 대북정책을 ‘최대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로 선언했다. 대북정책 근본적 변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노선에서의 차이점은 여전히 모호하다. 중국에 대한 대북압박 강화 주문과 함께 사드배치와 미사일방어망 확충을 포함해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리고 전에 없던 대규모 무력시위와 선제공격 불사론까지 나온다. 반면에 북한정권의 교체는 고려하지 않으며, 조건이 맞는다면 김정은과 대화도 하겠다고 말하는 등 정책의 진폭이 여전히 너무 넓다.


    트럼프 집권 이후 군사적 봉쇄라는 강경책이든 전격적인 대화든 간에 한반도 안보지형에 대한 변화가능성이 오바마에 비해 커진 것은 사실이다. 일단 북한핵문제의 해결이 트럼프정부의 우선순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도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마땅한 묘책은 없어 보인다. 대내외적으로 북핵문제 시급한 해결 요구를 받고 있어 압박감을 느끼지만 중상주의자 트럼프에게 이익을 낼 수 있는 좋은 투자처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이 북핵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북핵 위협을 대중봉쇄를 위한 동맹 강화에 활용할 가능성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미국의 외교안보를 사실상 이끌어가고 있는 군부의 의도와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지던 상황에서 사드배치를 서둘러 진행했던 이유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 트럼프가 심지어 사드배치비용의 한국부담을 요구한 대목도 앞으로 한국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킬 전조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한국의 역할 증진을 강하게 요구할 수 있는데, 사드배치나 분담금 증액을 넘어 MD 참여는 물론이고, 한국이 미국의 아시아전략의 일부를 분담하는 식의 국방 분담까지 압박할 수 있다.


    환갑을 넘긴 한미동맹 역시 겉으로는 격상이라는 과정을 거쳐 왔다고 말하지만 속내를 보면 빛 좋은 개살구다. 지난 수십 년 간 한미관계의 불만과 개선 요구는 대부분 미국에서 나오고, 한국은 여기에 주로 순응하는 방식으로 편중되어있다. 동맹의 미래비전으로 이명박정부에서 시작해서 박근혜정부가 견지했던 한미전략동맹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변화에 대하여는 충실한 반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동맹발전 또는 미래비전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 지금까지의 대미의존적인 관계가 답습될 여지를 남겼을 뿐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라는 허울아래 우리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동맹의 연루위험을 증가시킨다. 지난 60년간 군사안보분야를 넘어 사회규범과 정체성마저 일체화되면서 한미동맹은 어느 순간 실용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신화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한미동맹이 미일동맹을 포함한 다른 비대칭동맹과 비교해도 훨씬 종속적인 관계가 제도화되었던 것이다. 60년은 친미세력의 제도화와 친미인식의 체질화가 관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긴 기간이다.


    트럼프행정부는 불가측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미동맹의 비대칭성의 구조와 관성은 지속될 것이고 이는 문재인정부가 감당해야 할 무거운 부담이다. 미국의 동북아에 대한 전략목표는 분명하며, 한미동맹은 그 목표아래 종속된다. 패권하락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기본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 전략의 성패는 한국과 일본의 참여를 통한 아웃소싱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가능하다면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축하고 싶은 것이다. 이명박정부에서부터 시도되었고, 박근혜정부가 기어코 강행한 한일 위안부합의와 군사정보보호협정체결은 본격적 포석이었다. 한국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이 그렇다고 일본과 이어지는 삼각동맹에 참여할 경우 국내적으로는 여론의 반발을, 국제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가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는 점에서 향후 한국외교가 당면할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다.

    5. 신정부의 대외정책방향


    “안보 위기도 서둘러 해결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겠습니다. 필요하면 곧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겠습니다. 베이징과 도쿄에도 가고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한미동맹은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한편으로 사드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및 중국과 진지하게 협상하겠습니다. 튼튼한 안보는 막강한 국방력에서 비롯됩니다. 자주 국방력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북핵문제 해결할 토대도 마련하겠습니다. 동북아 평화구조 정착시켜 한반도 긴장완화 전기 마련하겠습니다.”


     


    이것은 대선승리 다음날 약식으로 진행된 취임식에서 발표한 12분짜리 연설 가운데 외교안보통일에 대한 부분인데, 문재인대통령의 핵심철학이 녹아있다. 공약집 주요내용과 더불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외교는 국익우선의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하지만, 방법은 국제사회와 협력하겠다는 것이고, 안보는 국방능력 증강을 통해 북한도발 및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관리하는 책임안보를 하겠다는 것이다. 또 대북 및 통일정책은 제로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의 복원을 통해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평화체제 및 경제통합에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내세우는 협력외교는 미중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안보의 대미편중과 경제의 대중편중의 기형적 구조를 국익에 철저하게 기초하면서도 주변국과의 협력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미동맹 일변도나 미중사이의 기계적 균형외교나 경직된 원칙외교를 탈피하고, 국가별 및 사안별로 실용적인 유연성을 발휘하겠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우선주의가 만연하는 동북아에서 양자외교와 동북아 다자외교를 적절하게 병행하는 외교를 하겠다는 의미다. 한미동맹을 중심축으로 하되 미중갈등 국면에는 완충을, 미중협력 국면에는 촉진을 위해 동북아 다자외교를 적절하게 병행하는 외교이다. 또한 정부간 트랙 I 외교와 민간의 트랙 II 외교를 필요에 따라 혼합함으로써 미중 갈등이 한반도에서 충돌하지 않도록 다양한 층위의 전략적 소통을 통해 협력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시급하고도 중요한 주변 4강 외교는 한미동맹의 재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미국은 쇠퇴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제질서 표준과 아젠다 설정의 능력을 가진 초강대국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유일한 군사동맹이자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유지에 필수적인 국가로 인식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동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되 다원적 전략동맹으로서 글로벌 차원의 협력을 확대하는 미래 지향적 한미동맹을 정립하고자 한다. 또한 사드, 주둔 분담금, 한미 FTA 재협상 등 민감한 현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동맹관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해결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에 대해서는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한국의 최대 교역국에 걸 맞는 전략적 외교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안보협력의 수준 제고와 실질협력 확대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실현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북핵 및 북한의 개혁개방, 통일 등 한반도문제 관련 전략적 소통을 한층 강화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사드배치와 관련된 중국의 제재국면을 경험하면서 지나친 대중 경제의존도를 중장기적으로 감소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인식한다. 한미일 군사협력으로 인한 한중갈등이 안보문제를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될 가능성 차단하는 등 사드배치문제를 포함한 주요현안들에 대한 창의적 해결 방안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일본과는 한일위안부합의와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놓고 갈등의 소지가 많다. 일단은 재검토를 하고 필요하다면 재협상과 폐기를 진행하겠지만 일본이 응하지 않을 경우 '투트랙(two track)'으로 간다는 입장이다. 즉, 북한 핵문제에 대한 전략적 협력과 한국의 제2의 교역대상국으로서 경제협력 등에서는 실용적인 입장을 견지하되 위안부, 독도, 과거사 문제들은 원칙으로 대응하되 중장기적으로 일본의 변화를 촉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인데, 유럽과 아시아에서 강화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관계발전을 모색할 계획이다. 러시아는 북핵문제 해결 및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여건 조성을 위한 주요 파트너이며, 에너지 등 자원 협력과 기초산업과 미래 산업 육성에 필요한 기술협력 대상이다. 박근혜정부의 실패한 유라시아이니셔티브의 경험을 참고삼아 새로운 북방정책을 펼쳐갈 예정이다.


    주변 4강 외교와 함께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 것이 동북아 지역비전 및 다자외교 공약이다. 미중 대결구조가 심화될 경우 진영대결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동북아다자외교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카드로서 진영을 초월하는 다자외교가 시급하다는 인식하에 ‘동북아플러스책임공동체’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동북아가 우리 생존의 영역이라면, 이를 뛰어넘는 한국외교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플러스가 가지는 의미는 3중적이다. 먼저 공간적으로는 동북아가 대한민국의 생존이 달린 핵심지역임을 인정하고 최우선 순위로 대처해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동시에 동북아의 틀에 갇혀버릴 경우 생존문제에만 급급할 수 있고, 안보딜레마와 진영대결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러스로 확대한다는 의미다. 플러스의 범주에는 아세안, 몽골, 인도, 호주, 러시아, 유럽까지 포함되어있다. 또한 이슈영역의 플러스인데, 정치적 생존을 넘어 경제적 공영, 그리고 사회문화의 영역까지 확대하자는 의미이며, 가치외교와 공공외교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세 번째 함의는 참여정부 당시의 ‘동북아시대’를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이다.

    6. 외교정책 제언

    새로운 정부의 대외정책은 기존의 잘못된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난 9년 반의 이명박·박근혜정부의 외교·안보·국방 정책은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정책결정시스템이 붕괴되었다는 판단 하에서 전적 쇄신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친미 편중의 냉전·분단 프레임 외교, 남북관계 파탄, 그리고 대내외적 안보포퓰리즘으로부터의 전환이다. 핵심 문제의식은 중미패권경쟁이 격화되고, 한반도 주변 상황이 진영대결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하는 일과, 북한의 비핵화는 멀어지고 핵무기의 고도화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는 상황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미중의 전략적 이해 충돌의 잠재적 발화점 중 가장 위험한 지역인 한반도가 한국전쟁 이후 전쟁 위험이 최대치로 높아졌기 때문에 군사충돌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시급히 마련하고, 군사행동이 아닌 대화와 외교로 해결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배타적 민족주의 기류에 동조해서는 결코 안 된다. 특히 대중봉쇄를 겨냥한 미일동맹이 일본의 재무장을 강화함으로써 지역패권대결로 치닫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급변하는 국제환경과 악화된 한반도 상황에 적응하는 것만도 쉽지 않지만 북·중·러와 미·일의 갈등구도에 밀려 한 쪽 진영을 배타적으로 선택하거나 반대로 모호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일은 결코 현명한 길이 아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상황을 개선하고 돌파해 나가야 한다. 남북회담의 추진은 물론이고, 북미회담의 중재와 6자회담 재개를 통해 9.19공동성명에서 마련한 비핵화와 평화협정체결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른 주변국들과 함께 협력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는 동북아 지역안보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드배치와 한미일 군사협력으로 동북아 군비경쟁이 본격화됨으로써 협력안보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상황에 제동을 걸고, 협력외교를 통한 역내의 공동번영과 평화를 주도해야 한다.


    현 역내상황에 대한 대안은 결국 진영을 초월하는 다자협력이지만, 실효성 있는 대안을 찾고, 그것을 구현하기란 쉽지 않다. 세력전이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한편, 상호의존과 취약성의 증가로 공동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하지만 다자간 조정기구의 부재로 매우 제한적인 대처만 가능한 상태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정세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딜레마적 상황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수사나 이상주의적 외교담론으로 현실을 극복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기능주의의 낙관적 주장과는 달리 연성이슈에서 협력이 일어난다 해도 경성이슈로 ‘확산(spillover)’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활용해볼 틈새가 없지 않다. 그 중 하나가 평화, 민주주의, 협력 같은 가치외교의 부활이다. 미중이 점점 가치를 외면하고 권력경쟁에 몰두할 때 한국은 중견국가들과 함께 오히려 가치외교를 내세울 필요가 있다. 특히 평화와 경제성장의 담론은 매력적인 동시에 긴요하다. 우리를 둘러싼 패러독스의 협착구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국가는 한국이라는 엄중한 인식과 함께 당면한 복잡성, 불안정성,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화주도국가로 발돋움이 필요하다.


    일단 신정부는 촛불혁명의 계승과 정권교체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상당한 정책추진력을 가지고 출범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또 대북여론 악화도 현실이지만, 남북관계 파탄으로 인한 긴장과 위협을 대화를 통해 타개하기를 원하는 국민들이 많다. 게다가 취임 직후 미중을 비롯한 주요국 정상들이 빠르게 접촉하면서 한국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다. 한미양국의 초기 소통과정과 정상회담의 조기개최에 합의한 것도 나쁘지 않다. 중국 역시 한국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고, 한일위안부합의안을 놓고 재협상 절대불가의 이견을 드러내왔던 일본도 신정부 출범 이후에는 유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 판단하긴 이르지만 최근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소위 ‘코리아 패싱’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이 역할을 발휘할 여건과 공간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외교공백으로 인한 손해보다 후발주자의 이점을 충분히 이용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예측불가능한 대외정책기조가 주는 스트레스가 매우 높지만, 역설적으로 미국발 동맹조정 또는 변화 시도는 적절한 대응을 통해 그간의 동맹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미의 비대칭동맹구조에서 동맹의 범위가 모호한 것은 곧 미국의 요구와 압박에 취약하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해왔다. 따라서 동맹의 범위를 한반도 방위를 주목적으로 하고, 지역동맹의 역할을 보조적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즉 한미안보에 위해가 되지 않는 특정국을 겨냥하는 동맹은 회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아시아전략의 핵심인 대중봉쇄를 위한 한미일 3각 동맹 구축이나 지역 미사일방어망 참여는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한다. 이 외에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은 한국의 사전 동의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부분도 확실히 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신정부의 대외정책은 지금까지 살펴본 부담과 악조건을 최소화하고 기회요인을 최대화하는 방안 마련에 성패가 달려있다. 이를 위해 연계전략이 필수적인데,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북핵, 주둔분담금, 사드배치, 전작권 환수 등 한국이 당면한 외교현안들의 상호 연관성이 매우 높다는 점, 그리고 매우 정치 이념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우리보다 강한 주변 강대국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슈별로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치밀한 연계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제재와 압박을 강화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대화유인을 증가시키고, 대화국면이 가능해지면 사드배치 속도조절 또는 중단문제로 연계시키는 것이다. 방위비분담 문제도 사드배치와 심지어 FTA 재협상문제와도 연결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정책결정시스템을 반드시 정착시켜야 한다. 박근혜정부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이 정책결정 시스템의 부재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심기에만 의존한 것이었다. 또한 한미동맹 절대론 또는 친미파의 패권적 양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여기에 대외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국익과 민생을 고려하지 않는 비실용적 근 본주의 정책성향도 문제다. 우선순위와 장기 전략이 결여된 대증요법으로 점철돼 온 것이다. 차기정부는 이 같은 점들을 엄중히 인식하고 대증적 의사결정 구조를 혁파하고 종합적 국가전략을 수립하여, 이를 상시적으로 점검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7. 결론과 전망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뉴노멀 담론과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 환경이 예견하듯이 1920년대 말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위기상황에 비견되는 시대가 현실화되고 있다. 불확실성, 불안정성, 불평등성, 그리고 복합성의 증대 속에 저금리, 저성장, 저소득의 경제적 측면과 민주주의의 위기, 사회불안, 대결적 국제정치를 일종의 ‘디폴트’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일을 해서 버는 노동소득이,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는, 즉 자본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현 체제 하에서 불평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국제정치적으로는 미중 세력전이와 극우포퓰리즘에 따른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대외정책에 대한 국내정치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안보담론이 평화담론을 크게 위축하고 있다. 내부단결과 권력공고화를 위해 강경하고 민족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우선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 및 지정학적 변수를 함께 내포한 미국 패권의 하락과 중국의 부상에 따른 불안정한 동북아와 한반도의 역학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민족의 미래가 국내정치적으로는 기득권의 인질이, 그리고 국제정치적으로는 패권경쟁의 인질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강대국들의 권력재편의 소용돌이에 속수무책으로 함몰되지 않도록 남북관계개선을 통해 미중관계가 나쁠 때는 갈등의 완충자로서, 좋을 때는 협력의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미국의 전략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외교 전략에서 벗어나 미국을 설득해 유연한 대북 및 대중관계를 이끌어내는 영민하고 실용적인 외교를 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북미관계 정상화이다.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는 안보포퓰리즘에 대항해 평화담론을 적극적으로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평화결손의 한반도가 오히려 그 결손을 메움으로써 세계에 희망을 던질 수 있다. 2016년에 서울을 방문한 평화학의 대가 요한 갈퉁 교수는 안보를 통한 평화보다, 평화를 통한 안보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전쟁이나 무기에 의한 폭력적인 수단으로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일평생의 지론의 연장이다.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대외정책을 견지함으로써 대결을 조장하는 극우 민족주의에 적극 대응하는 논리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새로운 정부를 맞았다. 정권교체가 모든 문제의 자동적 해결은 결코 아니지만 1차적인 필수 관문인 것은 분명하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촛불의 의미를 심장 깊이 새기고, 촛불이 태워버리고자 했던 분단체제와 종북프레임의 극복에 나서야 한다. 분단의 현실 안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렵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만큼 시급해졌다. 내부적으로는 촛불에도 타지 않고 좀비처럼 되살아나 여전히 분단체제에 기생하며 기득권을 유지해온 안보장사치들을 정리하고, 외부적으로는 극우민족주의 강경파들이 득세하는 한반도 주변 국제질서에서 중심을 잡고 주도적인 외교로 평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미국을 우리 국익보다 더 우선시하는 동맹중독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초한 사면초가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되, 현실감과 균형감을 지니고 미중갈등에 휘말리지 않고, 남북관계개선을 통해 운신의 폭을 만들어내야 한다.


    생존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과 공포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야 외교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는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값싼 방법이며, 평화는 안보가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다. 두 가지 갈림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하나는 여전히 세계최강인 미국이 무분별한 무력행사에 나서고 부상하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맞대응함으로써 파국의 소용돌이로 치닫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의 집단지성이 저항하고, 양극화와 저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최대위기를 민주주의와 국제협력의 회복을 통해 풀어내는 길이다. 후자로 가야 하는 당위성은 분명하지만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광화문의 기적’을 등에 업고 후자를 위해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가 함께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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