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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4주년 - (Session 4) 박명림 | 연세대학교 교수

    본문

    박명림 | 연세대학교 교수 


    국민합의 대북·통일 인식과 정책의 모색 : '21세기 신간회'는 가능할 것인가?


    문제의 제기


      민주정부 6번을 경과하고 있음에도 대북·통일정책은 대한민국 국가 차원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진보-보수 두 진영, 두 이념, 두 정부, 두 세력, 두 정당이 첨예한 대결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 교체에 따른 ‘정책왕래’의 진폭 역시 항상 하나의 극단에서 또 하나의 극단으로의 전이를 반복하고 있다.


     특별히 사회주의 붕괴(국제), 북한경제의 파탄(북한 내부), 남북한 국력의 현격한 차이(남북)라는 압도적 우위요소에도 불구하고 진보 남한과 보수 남한, 진보 대북정책과 보수 대북정책이 따로 존재하는 ‘평행현상’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로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두 개의 대북정책의 존재는 마치 두 개의 남한, 두 개의 통일정책을 상념케 한다.


     정부와 정당을 넘어 학계, 언론, 종교, 문화, 예술 영역에 이르기까지 남한사회 내부에서 대북인식과 통일정책을 둘러싼 심연한 수직적 분획과 극단적인 수평적 대치는 한 치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돌입하면 인격도 철학도 심미도 미학도 사라지고 벌거벗은 이념대결만이 남는, 인간행동의 최저심급인 일종의 판단정지와 사유중단의 블랙홀인 것이다.


     대북정책이야말로 보수 남한과 진보 남한, 두 남한을 형성하고 가르는 근저요소요 기축요인이 아닐 수 없다. 대북정책에서 진보-보수의 극단적 대결과 교착(gridlock) 현상은 다시 내부 민주화와 사회개혁정책으로 삼투되어 국내문제에서조차 사사건건 이념대립을 강화, 촉진, 고착시키고 있다. ‘수구꼴통’과 ‘친북좌빨’로 상호 낙인찍히면 내부의 교육, 복지, 외교, 경제 정책의 어느 것도 공존, 수용, 중용이 어렵다. 이러한 역(逆)환류고리와 악순환은 현금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제 거의 극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세계사가 경험적 이론적으로 보여주었듯,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강조하였듯 이념대결이 있는 사회에서 민족문제는 가장 휘발성이 높은 발연재이다. 역사는 민족문제로 인해 붕괴된 민주정부와 분열된 국민국가의 사례들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민족문제처럼 신중하고 균형적으로 접근되어야 하는 문제도 없다. 거기에서 성공한다면 다른 거의 모든 것을 성공할 지혜와 능력과 비전을 갖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발표자는 초당적이고 균형적이며 통합적인, 그리하여 진보-보수 정부와 진영을 넘는 일관된 국민합의 대북정책이 나와야할 시점이라고 믿고 이를 고구, 제안하고자 한다.


    진영논리와 대결 구도; 현재의 인식상황 진단과 대안 모색


     



     요컨대 초점은 대북•통일정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산생하는 내부정치의 문제이며, 대북•통일인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내부정치(국민통합)-통일-통일 이후 통합(민족통합)의 3단계를 이상적으로 설정하여 루소와 칸트의 공화주의 평화구상, 민주평화구상을 한반도에 적용하려는 철학적 이론적 실천적 모색인 것이다. 쟁점의 내부합의로부터 발원하는 평화와 통일의 3단계 선순환 비전을 안출해야하는 것이다.



     1. 북한 인식: 북한은 기본적으로 안보ㆍ평화의 대상이자 협력ㆍ통일의 대상이다. 이러한 이중성이 대북정책의 난점을 유발하는 근본 요인인 동시에 선택의 가능공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이중성의 어느 하나만을 양자택일해서는 올바른 대북정책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즉 전쟁을 경험한 상대를 앞에 두고 안보를 소홀히 하는 평화ㆍ협력 정책은 불가능하며, 궁극적인 평화ㆍ통일을 추구할 대상과 현실적 공존 및 협력을 배제해서도 결코 안된다.

       북한은 또한 남한과 통일을 지향하는 분단국가ㆍ특수관계이자 동시에 동등한 유엔회원국가이기도 하다. 전자는 남북 공히 내정간섭배제와 상호존중의 전거이나, 후자는 인류보편 규범과 가치를 존중해야할 국제행위자라는 점을 함의한다. 요컨대 분단국가 사이의 상호존중ㆍ지원ㆍ협력 논리와 국제사회 성원으로서 보편규범의 준수ㆍ요구ㆍ비판의 동시 근거이기도하다.

      

     2. 남북관계 파탄 요인: 이명박 정부 이래의 남북관계 파탄 요인은 북한의 지속적인 폐쇄ㆍ선군주의 강화와 남한의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정책에 대한 전면부정 정책(ABDJ/ABR)이 결합하였기 때문이다. 분단 이래 남한이 가장 온건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던 김대중ㆍ노무현 시기 동안에도 핵개발을 포함한 북한의 선군주의는 계속 강화되어 한편으로는 화해협력관계가,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대치관계가 병존하는 이중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보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선택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화해협력 정책의 기조를 계승하되, 구체적 실천과 합의이행 과정에서 국민적 동의의 확보 및 북한의 약속이행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점을 보완하였다면 내부 통합과 남북관계의 발전이라는 이중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해협력을 향한 남북관계의 기조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심각한 역전현상이 발생하고 말았다.


     3. 평화체제: 보수정부 시기에 구축된 한반도의 두 개의 안보체제(security regime)인 정전협정체제(1953)와 북핵합의체제(1994)에서 남한이 불참ㆍ배제된 대가는 혹독하였다. 평화ㆍ군사ㆍ북핵 문제에서의 장구한 북미 대결ㆍ대치ㆍ대화 구도의 지속이었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불안정성과 남한의 비주체성이었다. 철학적으로 말해 평화의 주체는 갈등의 주체와 동일하다. 따라서 남한의 한반도 평화체제에의 참여는 당연하며 필수적이다.

     우선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은 남한과 북한을 당사자로 하고, 미국과 중국을 하기 서명자로 하는 2+2 방식이 가장 적절하다.  정전협정 종식을 위한 협상과정 중에 한반도 종전 선언이 합의되거나, 또는 평화협정 체결 이후 남한과 북한은 서울과 평양에 각각 상주 대표부를 설치한다. 미중은 정전협정 당사자이나 이제 남북을 당사자로, 미중은 하기 서명자로 위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로 한반도 평화체제는 북미, 북일 국교정상화가 필수적이다. 이는 북한의 국제사회로의 진입은 물론 북한체제 안전보장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그러나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이후에도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주둔은 지속되어야 한다.

     셋째는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평화체제와의 선순환 연계구조를 구축해야한다. 즉 여전히 양자관계가 지배하는 동북아에 2차대전 이후 최초의 다자안보기구를 구성하고 남북이 여기에 동시에 가입하여 한반도 문제를 국제화ㆍ지역화함으로써 일체의 전쟁 가능성을 제거한다. 동북아 다자안보기구의 참여국가는 남한,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필수로, 확장을 모색한다. 이것은 6자회담과 같은 ‘ 일시적 다자접근’ad hoc multilateral approach)을 넘어 ‘ 제도화된 다자주의’institutionalized multilateralism)를 확고히 지향한다.   


     4. 국제관계; 남북의 적대와 함께 한반도평화문제가 풀리지 않는 또 다른 핵심이유는 북미 적대 때문이다. 전쟁을 치른 적대관계에 대한 세계사적 비교를 통해 볼 때 남북관계 못지않게 북미 적대관계의 지속이야말로 평화정착 실패의 결정적 요인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주요 전쟁 상대나 적대국가와 곧바로 또는 적어도 한 세대 안에 관계를 정상화하여 세계 및 지역질서와 양국관계를 평화와 안정으로 견인하였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지금 정상화해도 너무 늦은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은 사회주의 종주국 러시아와는 러시아혁명 16년만인 ’33년 복교하였다. 최악의 전범국가 일본 및 서독과는 2차세계대전 종전 10년도 안된 한국전쟁 시기 및 직후에 주권을 회복시키고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중국과는 70년대 초반부터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여 미중전쟁 종전 26년만인 ’79년에 수교하였다. 패전의 악몽을 안긴 베트남과는 적극적인 관계정상화 정책으로 패전 20년만인 ’95년에 수교하였다. 동독과는, 서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종전 29년만인 ’74년 수교하였다. 적대관계가 한 세대를 넘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다른 적대 사례들도 유사하였다. 상호 절멸전쟁을 치른 독일[서독]과 소련은 종전 10년만인 ’55년 관계정상화에 합의하였다. 일본과 중국은 종전 27년만인 ’72년 수교하였다. 독일[서독]과 이스라엘은 끔찍한 유태인 인종청소전쟁의 종식 20년만인 ’65년 수교하였다.

        전쟁 상대들에 대한 미국의 동맹-적대관계의 변동과 국제 우적관계 재편에서 장기적 예외는 북한뿐이었다. 미국과 북한의 전후 60년 동안의 제재•봉쇄•적대•외교단절은 세계사상 이례적이고 독특한 것이다. 일본-북한의 적대관계는 미-북 적대의 파생물이었다. 미국에게 한국전쟁 경험이 독일 및 일본과의 세계전쟁 경험, 그리고 베트남 패전 경험보다 더 컸기 때문일까? 또 전후 북한의 국제사회 및 미국에 대한 위협이 소련•중국•아랍•동독의 위협보다 더 컸기 때문일까? 이 세계전쟁 경험 및 대국들의 위협에 비해 한국전쟁 체험과 북한의 위협은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길게는 한국전쟁 정전 이후 60년, 짧게는 냉전해체 후 20년 동안 미국과 남한은 숱한 실기를 반복해왔다. 특별히 미국은 북핵 위기 악화 이전에 적어도 세 번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 즉 데탕트 시기, 사회주의 붕괴 직후, 북핵 위기 타결 시점에 미국은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을 국제사회로 견인하며 한반도평화체제를 정초할 기회를 놓쳤다.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남한정부는 북미관계개선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일부 정부는 강한 견제도 병행하였다. 이제 한미는 세계사적 경로에 입각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일관된 개선정책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남한과 미국과 국제사회의 이익에 부합한다.

       실제로 앞의 관계 정상화들로 인한 주요 이익은 당대 국제사회와 미국이 보았다. 소련과의 관계복원은 훗날 반파시즘 반히틀러 연합전선의 구축으로 연결되었다. 전범국가 서독 및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공산진영을 견제하는 기축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도입을 거쳐 소련의 개혁 압박과 조락, 냉전 해체를 촉진했다. 대만문제의 안정 역시 미중관계 정상화의 산물이었다. 동독과의 관계개선은 독일문제의 안정화, 소련 견제, 서독 중심의 통일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 베트남과의 관계개선은 인도차이나 재진출의 교두보이자 중국 견제의 지렛대였다.  

       국제관계의 역사가 보여주듯 북미관계 정상화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은 기우이다. 동맹과 적대 이중구조의 전환, 즉 미-중 관계개선과 미-대만 관계, 미-중 관계진전과 미-일 관계, 미-아랍 관계개선과 미-이스라엘 관계, 미-동독 관계개선과 미-서독관계는 병행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가의 이익을 해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두 동맹국가의 궁극적 이익에 기여한 경우가 더 많았다. 냉전시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적대관계를 비교분석하면 한반도평화체제를 향한 해법은 분명하다. 한반도평화체제 구축의 요체는 북미수교를 통한 미국 안전보장과 북한체제 보장•북핵 포기의 상호교환, 그리고 정전협정과 평화협정, 정전체제와 평화체제를 대체하는 것이다. 다른 사례들처럼 이 때 세계제국 미국의 의지와 결단이 결정적이다.

       정전협정체제가 산생한 기형적인 국제법 질서와 유엔체제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정전협정에 관한 한 중국과 북한은 공식적인 서명 당사자이지만 미국과 한국은 그렇지 않다. 자유진영은 유엔이 서명 당사자이다. 게다가 현재에도 유엔 회원국 중국과 북한은 정전협정으로 인해 유엔과 정전상태에 놓여 있다. 헌장을 준수해야 할 회원국가가 국제기구와 정전 중인 것이다. 더욱이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유엔과 정전상태에 놓여 있는 지독한 모순상황이다. 정전협정 폐지가 필요한 중대이유의 하나이다.

        

     

     5. 북핵문제; 북핵문제 해결의 절대 전제 조건은 평화적 해결의 원칙이다. 외교와 협상을 통한 해결이 확고부동한 근본원칙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북핵 해결과 남북관계는 병행 추진되어 상호상승 효과로 연결되어야 한다. 북핵 해결을 위해서도 남북관계의 중단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남북관계 개선의 궁극적 목적의 하나는 북핵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점을 명확히 추구해야한다. 동시에 한반도ㆍ동북아 안보 위기의 요체로서의 북핵문제는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북미대결 해소 및 동북아다자기구 추진과정과 병행해야 한다. 위기의 크기에 상응하는 위기극복의 대안이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관계절연을 통한 악의 독립은 악의 성장을 의미하듯, 북핵 때문에 남북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북핵문제의 악화를 초래할 뿐인 것이다. 


     6. 전작권 환수: 전시작전지휘권은 환수되어야한다. 첫째는 대북 군사 발언권 및 자주권의 확보를 위해, 그리고 한반도 평화협정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주체로서의 남한에 대한 북한의 지속적인 배제 주장을 무력화시켜야한다. 둘째는 우리의 군사역량 및 자주성의 강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셋째는 국제법상 엄연한 주권국가로서 국가주권의 온전한 확보를 위해 반드시 환수되어야한다. 그러나 전작권 환수가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동맹약화로 해석될 여지를 줘서는 결코 안 된다.


     7. NLL: 군사충돌 문제를 공동안보와 공동경제 구상으로 해소한다. 예컨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방안을 통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


     8. 국민안전과 군사충돌: 여하한 어떤 경우에도 남북접촉에서 상호 인간안전 및 군사충돌 방지의 원칙은 확고하게 견지되어야한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사건 또한 결코 재발되면 안 된다. 군사충돌 재발 및 인명 피해 방지를 위한 남북 상호간의 대화와 신뢰구축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를 위해 북한의 적절한 사과 표명 역시 필요하다. 사과의 공개 여부 및 내용ㆍ수준ㆍ형식은 남북의 대화를 통해 조율될 수 있다고 본다.


     9. 통일방안: 통일방안은 적화통일과 흡수통일 모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또 무력통일 역시 전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점진통일, 민주통일, 평화통일, 국제협력통일이  바람직한 경로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통일은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어야 한다. 남한의 내부통합과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 경제회복, 체제변화에 근거한 상호 변화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촉진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통일과정의 누적을 통해 통일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말을 바꾸면 통일과정은 여러 단계의 사실상의 통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의 급변사태에 대한 대비 역시 필수적이다.] 정부와 국회에서의 논의를 통해, 진영논리를 넘는 합리적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10. 통일체제: 통일체제는 사실상의 통일이 법적 제도적 통일로 비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통일체제는 정의, 인권, 자유, 평등, 복지, 평화의 보편가치가 넘실대는 세계의 모범 국가여야 한다. 우리는 남남통합의 연장인 남북연합을 통해 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연합은 경제, 문화, 언어, 노동, 교육, 보건, 군사, 국제관계, 지방자치, 법률, 제도, 헌법..등의 여러 차원에서의 부분체제(partial regime)로서 이러한 부분체제들의 총합이 보편가치에 바탕한 궁극적인 통일체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1. 통일외교: 통일외교는 넓게는 평화외교의 하위요소이자, 작게는 통일과정의 최후 단계를 의미한다. 즉 한반도문제의 국제접근, 국제적 통일 환경의 조성이 통일외교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통일외교를 소홀히 하여 통일환경의 조성에 실패해선 안 되며,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통일국면에 주체적인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역설적으로 정교한 통일외교는 매우 중요하다. 국제협력은 자주통일의 지름길인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한미동맹과 한중협력, 즉 친미연중을 골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한미동맹을 위해 한중협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한중협력 때문에 한미동맹이 손상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결정적인 국제적 돌파가 필요할 경우 한미동맹과 한중동맹을 병행할 내면 결기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G-2 두 요소를 우리는 겸장의 지혜로서 통일한국의 도래를 위해 함께 활용해야 한다. 이제 통일외교를 구체적이면서도 정교하게 가다듬을 시점인 것이다. 


     12. 경제협력: 남북경협은 기본적으로 정경분리 및 당국-민간 분리가 기조가 되어야한다. 경제와 민간부문의 협력이 정치군사 및 당국관계에 직접적으로 규정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치ㆍ군사 및 당국 부문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라도 경제ㆍ인도주의ㆍ민간 부문의 협력ㆍ접촉ㆍ대화는 더욱 강화되어야한다. 이제 경제협력은 지원방식을 넘어 상생과 공영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 생활경제부문의 협력으로부터 기간산업의 협력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노동, 물류, 생산, 유통, 철도, 항만, 무역, 사회간접자본의 거대한 통합경제권을 형성하는 한반도 경제공동체, 한반도 물류공동체, 한반도 생산 공동체, 한반도 복지공동체를 건설한다. 이를 위한 한 방식으로 동일 산업을 중심으로 남북 경제인과 노동자의 교차 근무를 추진한다. 북한노동자의 남한 연수도 중요하다.

     DMZ 평화지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정책의 거부가 아니라, 금강산관광-개성공단-서해평화협력지대를 서단에서 동단까지 연결하고 광역화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의 인식과 역할에 따라 파상적인 효과가 가장 커질 영역이 바로 경제 부문의 협력이다.


     13. 인권: 북한인권문제는 남한에서 남남갈등과 진보-보수 역전 의제의 핵심요체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북한인권문제는 지구상 최악이며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북한인권 개선은 남북을 넘어 인류 보편의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남북 신뢰구축, 경제협력, 인도적 지원의 3중 접근을 강조하고자한다. 당국 간 신뢰 구축을 전제로 인권문제는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해 당국 간에도 신중하고 조용하나 꼭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당국 간 문제에서 배제된다면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때 내정불간섭의 원칙과 인권문제의 과잉정치화 방지를 견지하면서도 한반도인권체제(human rights regime) 차원에서 남북관계 특수성과 국제 인권가치의 보편성을 결합하려 노력해야한다. 보편주의 관점에서 남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다 상황주의 관점에서 북한인권문제에 갑자기 침묵하는 남한진보와, 상황주의 관점에서 남한인권문제는 외면하다가 보편주의 관점에서 북한인권문제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남한보수는 각각 보편주의와 상황주의의 교차 결합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 보수 각각에게 초점이 북한인권문제가 아니라 국내정치이기 때문이다. 남한 인권과 북한 인권을 넘는 ‘한반도 인권’ 개념의 구축이 절실한 것이다.

      


     14. 탈북자: 탈북자 정책은 조용한 적극적 외교가 필요하다. 탈북자 문제는 이미 국제적 난민문제이자 인권문제요 소수자문제가 되었다. 이런 국제인권 문제를 마냥 방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탈북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해외 체류 탈북자들에게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조용한 적극성을 통해 이 문제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단다. 서독처럼 남한체제가 인권·평등·복지체제를 구축하여 탈북자가 늘어날수록 통일에 접근한다는 발상을 남한보수가 할 수 있기를 희원한다.  


     15. 인도적 지원: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인도주의의 발현인 동시에 통일비용 축소, 통일준비의 일환이라는 관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가장 확고한 인도주의에 입각해 북한 아동과 노인, 병약자에 대한 지원을 포함한 인도적 지원은 결코 중단되어서도 축소되어서도 안 된다. 여기엔 의료지원도 포함된다. 식량지원의 경우도 분배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을 전제로 중단되고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한반도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국가-시장-시민사회의 협치가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16. 문화협력: 공동 사전편찬, 공동어휘조사, 공동 유적조사, 공동 방송프로그램 제작, 공동영화제작, 국제경기 공동 스포츠 팀 구성 및 참여, 체육교류, 공동 공연, 순환 공동전시회 및 전람회 등의 문화교류협력은 전면적이고 활발할수록 좋다. 시민사회의 역할이 크게 증대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사례와 경로;

     내부의 진영극복[진보보수공존=연합정치]에서 동서 대결극복[동서독공존=>통일]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크게 배우려 시도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패전국가 독일은 전후 연립정부 구성을 반복하며 예술에 가까운 정치연합의 기술을 보여줬다. 결과는 민주주의, 성장과 복지, 외교·안보·통일 모두의 성공으로 나타났다. 아데나워-에르하르트-키징거-브란트-슈미트-콜-슈뢰더-메르켈 정부로 이어지는 전후 정부 구성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모두 연합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교체를 뛰어넘는 정책원칙의 일관성이었다. 지속성에 바탕한 정책 성공은 무엇보다 기독교민주연합,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기독교사회연합 사이의 정치연합의 교체 반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컨대 ‘사회적 시장경제’와 ‘동방정책’, ‘독일통일’의 성공은 각각의 핵심주역인, 서로 다른 정당 소속의 에르하르트, 브란트, 겐셔가 정치연합을 통해 서로 다른 정부에 연속 참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후 독일의 부흥, 안정, 복지, 통일, 유럽통합 주도의 제일동력은 정치연합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유럽통합과 독일통일을 가능하게 한 독일정치의 핵심요체는 한마디로 연합정치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건국 이래 지금까지 독일은 모든 정부가 연합정부였다. 아데나워, 에르하르트, 키징거, 브란트, 슈미트, 콜, 슈뢰더, 메르켈 총리에 이르기까지 23번이나 정부를 구성하는 동안 단독정부는 한 번도 없었다. 단독정부가 가능할 때조차 독일은 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무엇이 이러한 법칙과도 같은 연합정치를 가능하게 했는가? 좌우 극단주의와 내부분열이 초래한 국가적 대실패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주도, 바이마르공화국 실패, 급진혁명 위기, 나치전체주의, 제2차 세계대전 도발, 분할 점령, 독일 분단으로 이어진 현대독일의 비극은 교만과 적대, 가치독점과 분열, 상대 배제, 극단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연결되었다. 자기와 자기집단의 가치가 틀릴 수 있다는 자아성찰과, 타자와 다른 집단의 주장이 옳을 수 있다는 타자인정이었다. 자기 오류가능성에 대한 집합적 성찰은 겸양·관용·양보·대화·타협·공존의 정치로 연결되었다. 곧 연합정치였다.

     ‘연합’은 어원적으로 ‘함께 양육한다’ ‘함께 기른다’는 라틴어로부터 나왔다. 정치는 ‘자유시민 전체의 공동사안’ ‘공동체의 일’을 뜻한다. 정치 자체가 이미 연합을 필수요소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합정치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함께 공동체를 발전시키려는 겸허의 자세로부터 발원한다.

     그렇다면 연합정치의 효과는 무엇인가? 우선 최고성이다. 연합정치는 연합을 위한 협상의 과정에서 당대에 제출된 대안·지혜·정책·인물 중에 최선의 것을 선택하게 한다. 한 당에서 고른 정책과 인물보다는 여러 당의 그것들 중에서 고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공동체를 위한 가장 좋은 것의 선택’, 여기에 연합정치의 궁극적 목적과 비밀이 숨어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마키아벨리를 거쳐 매디슨과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철학과 이론들이 하나같이 ‘혼합정체’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강조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제도로서의 혼합정체는 오늘날 실제 정치에서는 연합정치를 말한다. 실제로 전후 독일의 여러 핵심정책들은 연립정부의 구성 과정에서 ‘주고받기’와 ‘합의’를 통해 채택된 것들이었다.

     둘째는 일관성, 지속성, 예측가능성이다. 연합의 결과 한번 채택된 국가비전과 정책은 장기간 지속되며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한다. 즉 정부 교체에 따른 정책의 급격한 폐기와 전환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전후 독일을 상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라인강의 기적, 복지정책, 동방정책, 과거 사과,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은 정책과 인물의 장기 지속성의 산물이었다. 전술했듯 라인강의 기적, 동방정책, 독일통일은 에르하르트·브란트·겐셔가 그들 스스로 각각 경제장관·외무장관·부총리·총리로서 여러 내각에 걸쳐, 또 후임 정부 역시 연립정부로서, 장기간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독일 정치의 양보와 타협 역량은 예술의 수준에 가깝다. 그것은 민주정부를 구성하는 핵심 요체인 인사와 정책 모두에서 그러하다. 주요 정당들은 국민의 지지를 초월하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을 뿐더러 종종 국민의 지지보다 적은 권력 배분을 수용하기까지 한다. 권력을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군림’이 아니라 ‘책임’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권력을 실체로 볼 때 정치인과 정당들은 독점과 배타적 장악을 추구하나, 관계로 볼 때는 분산과 공유를 추구한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책임정치는 권력 독식과 독점이 아니라 분산과 공유로부터 발원하기 때문이다.

      즉 연합정치와 공동책임은 권력 나누기의 산물이다. 권력은 독점될 때보다 분산될 때 훨씬 더 넓게 작동된다. 또 선거 시점의 지지 범위를 넘는 권력 행사와 정책 선택 역시 당선 이후 연합정치와 공통정책으로부터 산생된다. 권력 나누기에 대해 권력 나눠먹기라는 편견 아래 권력 독점을 추구해 온 한국사회가 깊이 성찰해야 할 요소인 것이다.

      가능의 예술로 불리는 정치가 자기 역할을 다할 때 현안은 해결되고 갈등은 완화되며 국가는 발전해 시민들은 비로소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타협과 연합을 통한 한국 정치와 한국 사회의 일대 도약을 희구하고, 또 실현하기 위해  정치영역에서 21세기 신간회(新幹會)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 이는 통일과 복지와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현재의 한국사회의 문제상황과 과제, 정치능력과 국가리더십에 비추어 한 진영의 파당적 지도자와 정당이 국제관계, 통일준비, 복지국가건설과 같은 시대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해답은 아니다 이다. 건국연합=국가형성연합이나 산업화연합-민주(화)연합에 걸맞는 복지(국가)연합, 또는 통일(국가)연합 없이 과연 바람직한 복지와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까? 전연 불가능하다.



    남북관계의 거시와 미시, 구조와 주체; 정권의 남북 조합과 정책 선택


     남한과 북한의 관계, 즉 남북관계를 거시-미시, 구조-주체의 동시 고려 속에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단 이래 남북관계가 작동해온 두 개의 기저지반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정전체제”(armistice regime=53년체제)와 “북핵체제”(North Korea's nuclear regime=94년체제)를 말한다. 후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의 지반 위에 놓인 체제였으나, 북핵문제의 심각화, 첨예화와 함께 부분적으로 전자의 무실화와 병행하여 자주 전자를 대체하는 중요성을 띠기도 하였다. 이른바 산아의 모태 극복을 말한다.

     정전체제가 “냉전시대” 남북관계의 기저구조요 요인이었다면, 북핵체제는 “탈냉전시대” 남북관계의 기저구조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근간을 정초한 두 체제인 정전체제가 한국전쟁의 산물이요, 북핵체제가 북핵문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남북관계가 놓인 구조의 근본성격은 군사(체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동시에 한국전쟁과 핵무장을 모두 북한이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두 군사(화)체제의 이니셔티브 역시 북한이 선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기저체제의 정초과정에서 남한 정부들이 택한 선택은 자기족쇄적이었다. 이승만은 한미동맹 유일주의 및 반공반북주의로 인한 북한괴뢰 부인- 중앙정부로서의 대등서명 거부 정책에 따라 정전협정에 불참하여 한국문제-정전체제의 국제법적 당사자성을 둘러싸 고 오히려 부인당하는 논란을 야기하는 일방, 북한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 역시 한미동맹 유일주의 및 북핵문제의 본질 판독에 실패하여 제네바 북핵(합의)체제에 불참함으로써 전후 및 탈냉전 시대 최대의 안보문제에서 한국의 당사자성을 상실한 채 경제적지원 역할에 머물고 말았다. 이승만과 김영삼의 선택은 정전체제와 북핵체제에서 한국을 배제시키고 소극적 위치와 역할에 한정하는 부정적 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제도적 이해를 넘어 또 다른 중요한 거시적 지평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정전체제에 대한 국제법적 불참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의도하지 않은 산물로서 그 체제 아래에서 북한에 비해 더욱 발전하였듯, 북핵체제의 북한주도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 아래에서도 남한이 더욱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군사주의가 야기한 한국문제와 남한발전-북한쇠퇴, 남한승리와 북한패배의 조합을 말한다. 

     북한의 관점에서 볼 때 정전체제는 김일성정권의, 그리고 북핵체제는 김정일•김정은 정권의 기본지반을 뜻한다. 공교롭게도 김일성정권은 정전체제에 조응하였고(즉 북핵체제의 시작시점에 종식되었고), 김정일정권은 북핵체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남한의 관점에서 볼 때 특별히 중요한 점은 전술했듯 두 기본체제 모두에서 이승만 정권과 김영삼 정권의 불참으로 인한 남한배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남한배제로 인해 두 체제 모두 미국과 북한(·중국)을 기본대립구도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정전체제와 북핵체제 논의의 제도적 공통 지반과 구도에서의 남한부재가 초래한 문제는 이후 오래도록 매우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접합요인은 남북관계 조합의 불일치 문제이다. 요컨대 김일성 사망과 김영삼 정권, 김정일 사망과 이명박 정권의 만남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포르투나(fortuna) 내지는 “역사의 간지”를 상념케 하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정통성을 다투는 두 한국에서, 반북이념이 압도할 때는, 북한에서 아무리 좋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김정일 집권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시기를 이념주의로 일관했기 때문에 남한에게 완패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러하다.

     이 문제는 남북관계의 실용성이 왜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보수정권에서는 실종되었는지를 확인하는 한 중요한 준거가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준거, 즉 군부정권들의 대북 온건정책과 비교하거나, 남한에서 대북온건정책을 펴는 진보개혁정부 집권 시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사망했을 상황을 가정하면 이 불일치가 초래한 부정적 효과는 매우 심각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영삼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건국 이래 대북정책에 관한 한, 북한 최고 지도자의 급작스런 사망이라는 호조건을 맞았으나, 북한의 단결-북한의 생존-남북관계 악화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6.15정상회담 이후 김일성이 사망하였거나,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또는 9.19 북핵문제 합의 이후 김정일이 사망하였을 때를 상정하면, 구조와 주체의 조우나 접합문제는, 단순한 이론적 분석 차원을 넘어, 한국의 통일문제와 남한의 대북정책에는 너무도 중요한 현실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놓쳐버린 김일성 사망과 김정일 사망과 같은, (대북화해나 관계개선, 또는 정책전환이나 통일준비를 위한) 결정적 계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북한의 군사주의나 대남군사공세 역시 남한의 대응과 관련하여 “정책(의 누적)”이 어떻게 “구조”를 바꾸는가를 고려할 때 매우 예리한 판독이 필요하다. 

      냉전시대로부터 남북관계를 돌아볼 때 현명한 북한 관리 방식은 정면대응·보복하지 않고 한발 떼어놓고 견인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남한의 선택의 누적으로 북한은 나가떨어졌고 패배하였다. 이 점에서 이념주의, 도덕주의에 집중한 이승만과 현실주의, 실용주의로 남북문제의 중심 이동을 단행한 박정희 및 그 이후의 차이는 매우 컸다. 1·21사태, 랑군사태, 대한항공(KAL)기 피격 이후 남한은 분노가 극에 달했으나 즉각 대응·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8·15평화통일선언, 남북접촉, 6·23선언과 7·4남북공동선언(박정희 시기), 북한 제안의 수용, 남북교류와 회담, 접촉 증대(전두환 시기), 7·7선언과 북방정책(노태우 시기)으로 북한을 견인·제압해갔다. 특히 박정희는 미국과의 비밀회담에서는 미국과의 긴장을 불사하면서 전시작전권을 환수받아 즉각 보복하려는 강경한 의도를 드러내면서도, 북한에게는 선언과 제안과 비밀접촉을 통해 공동성명을 끌어내는 이중 국가책략을 보여주었다. 수해물자 제안에 대한 전두환의 예상 밖의 전격 수용에 북한은 당시 몹시 당황하였다. 노태우의 7•7선언은 대한항공 피격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특별히 한미동맹과 한중수교 병행, (북한 후원국가와의) 한중•한러수교와 남북관계 개선 병행, 남북관계 개선과 여야협력 병행이라는 3중3변관계(三重三邊關係)를, 미국-북한-내부의 어느 하나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 자기 쪽으로 당겨내어 이룩해낸 노태우 정부의 성취는 가장 크고 오래 동안 빛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속적인 대결기도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온건대응으로 군사대결이 빗나가자 북한은 패배하였고, 남북관계는 대역전으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명박 정부 하의 사태들이 위에서 예거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기의 시간들보다도 크고 막중했던가? 더구나 오늘날은 국력이나 국제조건에서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는 상황이 아닌가? 이명박 정부의 이념주의 대북정책은 냉전시대 군사정부들의 대북정책보다도 훨씬 더 하지하책이라는 점이 증명되는 것이다.  

      ‘비핵·개방·3000’ 정책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정치적·역사적 불일치를 확인하게 된다. 만약 노무현과 김정일의 10·4 정상합의가 국민적 합의를 통해, 보수정부 등장을 계기로 부분적 수정을 거쳐 이어졌다면 남북관계는 어떠했을 것인가? 동방정책의 원칙적 승계와 부분적 수정을 통해 냉전 해체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통일을 달성한 독일 ‘보수’세력의 지혜에 비춰 이명박의 실패는 더욱 자기모순적 반실용적이다.

     다시 말하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 이용’ ‘개성공업지구 1단계 완공 및 2단계 개발 착수’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 수송 시작’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 이용’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 건설’…. 10·4 남북 정상 합의에 나와 있는 이들 지역에 남북 주민들이 ‘함께’ 활동하며 거주하는 상황에서 오늘을 맞았다면 북한은 누구의 도움 속에 어떤 미래를 구상할 것인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닫게 된다. 과연 한국의 보수세력이 남북관계를 실용적으로 다룰 능력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국내정치 활용, 안보상업주의의 유혹을 넘어 결정적 시점에서 상황을 실용적 실익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느냐는 점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이념 우선 정책이 초래한 결과를 볼 때, 김일성 사망과 김정일 사망이라는 호재의 돌출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이니셔티브의 선취나 북한인민 마음의 장악, 또는 통일의 조건을 놓지 못한 것을 볼 때 냉전-미국-군부라는 세 핵심요소가 사라진 상태에서 남한 보수세력은 북한문제를 다룰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거의 증명되지 않았나 싶다. 안타까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유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여전히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서독과 대만의 보수세력과 비교하여도 이점은 남한 보수세력의 치명적인 허약성 반실용성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통념과는 달리 남한보수세력은, 국가경영 능력면에서 심각하게 무능하다. 경제와 남북관계라는 두 개의 기축 국가운영방책(statecraft)에서 김영삼 이명박 두 보수 정부는 냉전 해체 이후 어느 정부보다도 최악의 지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잠정 결론: 연합의 정치, 국가이익의 구별, 남북관계 공준(公準)의 창출

     -- 헤라클레스의 기둥(Columnae Herculis)을 넘어 


     남북문제에 대해 발표자가 오랫동안 구체성, 실익성, 실용성을 최고 준거로 삼자고 강조해온 소이는 이념성이나 진영성이 갖고 있는 문제와 폐해가 갈수록 심각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현실문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북한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북한이 옳으냐 그르냐” “김정은을 증오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도덕적, 이념적 또는 선험적 판단은, 최소한으로 말해 “정책판단”의, 그리고 최대한으로 말해 “가치판단”과 “개인이념”의 전제요인 또는 내면가치는 될 수 있어도 냉혹한 국가책략(statecraft)과 정책 선택 자체를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제일(第一)원인(prima causa) 또는 제일요인(movens primum)이요 제일 실질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책략과 국가정책선택에서 이념이 현실을, 관념이 실질을 직접 규정해선 안 된다. 또 이념이 현실을 이긴 적도 결코 없다. 북한의 세습독재, 반핵, 인권, 민주주의, 공존, 평화 ...등에 대해 “접근방법”은 약간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을 향한 남한 보수와 진보의 “근본시각”이 이렇게 정반대로 다를 수는 없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한계가 있었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는 두 정부의 모든 대북 정책을 실패와 오류로 규정하고 정반대 이념 차원에서 극단적인 대안을 찾은 것이 결국은 실용적인 해법을 전혀 찾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는 너무 좋은 계기를 놓쳤던 것으로서 실용적 차원에서 두 진보정부의 화해협력정책을 원칙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정책집행 및 국민동의 과정에서의 한계를 수정하여 남북교류 증진과 북한인권 개선을 함께 추구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국제협력을 병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독과 대만이 성공하였고, 노태우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상당 정도로 달성하였던 정책을 완전 부정하고 실패한다는 것은 역사의 오만과 역사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내부에서의 공존과 수렴을 통한 공준(公準)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책적 양극화를 넘기 위해서는 이념적 담론적 양극화를 넘는 것이 선제적이고 필수적이다. 한국사회는 전자 못지않게 후자가 더 심각한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인류의 극단의 시대에 많은 지성들이 심각히 경고하였듯이 언론과 지식이 주도하는 담론의 양극화야말로 사실은 정책의 양극화를 풀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장애요인인 동시에 그것의 원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특정 이념을 대변하던 일부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정부 고위직에 임명되면 과거의 이념성과 진영성을 반영하여 정치인과 관료들 보다 더 이념적이고 더 관념적이며 더 파당적인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공준은 단순히 중용이나 통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최소 필수 요건으로서의 현실성과 실용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간) 이념성과 (내부) 진영성의 압도로 인해 객관적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수(정부)는 진보와, 진보(정부)는 보수와 완전히 다른 반대 정책을 펴야 된다는 국내 진영 논리의 연장으로서 남북문제를 보기 때문인 것이다. 즉 파당적 이념성의 연장으로 국가책략을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공동체의 이익증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념적 진영적 접근은 일종의 재앙이랄 수 있다.

     정말로 대한민국과 한반도 문제를 보편적 가치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이념적 낙인찍기와 내부적인 상호적대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남남갈등이 남북갈등 못지않게 심각하고, 내부적 상호 증오로 인해 서로 간에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불구대천(不俱戴天) 지간처럼 인식하고 있는 상황은 결코 정상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종종 한반도에 세 개의 한국이 있다고 듣곤 한다. 북한이 있고 진보 남한, 보수 남한이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남한(Two South Koreas)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인 것이다. 이제 두 번의 보수-진보 정부를 경과한 현금에는 반드시 극복할 때가 되었다. 내부 통합 없는 균형적 통합적 대북정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준의 합의, 창출, 추구, 실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 사회가 대북문제에 관한한 1) “사활적 필수적” 이익과 원칙 2) “중대한” 이익과 원칙, 3) “차요의” 이익과 원칙 4) “부차적” 이익과 원칙을 구분한 뒤 진보-보수 간에 명확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합의 가능한 공준을 창출, 확대해 가는 것이다. 하나의 공화국이자 분단국가로서 남한이 대북정책 및 남북관계에서 “필수” “중대” “차요” “부차”적 이익과 원칙을 구별한 뒤 민주적으로 합의를 도출해낸다면 현재와 같은 거대한 내부 쟁론과 갈등, 증오, 대북실패는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이 발표의 궁극적 결론이자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는 남북관계의 공식화,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는 중요한 점이다. 북한 당국 및 민간과의 접촉과 대화에서 위의 차등적 이익들과 원칙들의 위계를 정하여 “공식적” 의제로 제도화하고 정면으로 다루어야한다는 점이다. 진보는 핵심문제의 공식적 제기와 돌파를 외면하고, 보수는 증오 때문에 북한 인정과 접촉 자체를 거부한다. 또한 단일요인(이를테면 비핵화) 때문에 다른 모든 부문에서의 국익을 거부하거나 파탄낸다. 인정하고 접촉하면서도 핵심의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상호 조정하고 해소해나가며, 사안별 의제별 위계와 비중과 순서에 따라 국익을 증진하는 인내와 지혜가 필수적이다.

     그럴 때 남북관계의 기저 공준으로서 최소한 평화공존, 화해협력, 반핵, 세습비판, 인도적 지원에는 합의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공준에 바탕해 특정 “이념”과 “정부”를 넘는 “국가”와 “공화국” 차원의 일관성이 핵심이다. 진보정부-보수정부를 넘는 근본원칙의 확립과 일관성의 추구가 절실하다는 점이다. 셋째는 앞서 말한 필수 중대 차요 부차 이익에 대해 중요도가 높을수록 합의하고, 떨어질수록 갈등을 회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활적 국가이익에서는 차이를 가져서는 안 되며. 좌우 양극단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북정책에서 현재처럼 극단적으로 충돌할 요소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럴 경우 한국사회는 큰 성취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새 땅을 개척하는 동시에 옛 땅을 지켜내는 헤라클레스의 기둥(Columnae Herculis, Pillars of Hercules)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의 어귀에 있는 바위이다. 헤라클레스는 지중해를 빠져나가는 길목이 거대한 바위들로 막혀 있자 맨손으로 그 바위들을 부숴버리고 길을 만들었다. 바다로 나아가는 새 길을 열고는 바위들을 양쪽으로 쌓아 지중해를 지키게 했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스페인 국가 문장에도 나오게 된 연원은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카를로스1세)의 신세계 발견을 향한 야망 때문이었다. 후세들에게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Nec plus ultra = Non plus ultra, 즉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상징하는 표상이었다. 당대인들에게 이베리아 반도의 끝은 세계의 끝을 의미했으므로 이는 항해자와 선박이 지브롤터 해협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좌우명 “이상을 행해 보다 더 멀리 나아가라”(Plus ultra)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신세계를 발견하려는 야망을 대표하였다.


     오늘날 누가 과연 플루스 울트라를 통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깨고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통일의 신대륙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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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4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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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4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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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4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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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4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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