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2주년 - 개회사 (Session 1 / 토론) 김종대 | 디펜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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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 디펜스21+ 편집장
Session 1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
헤밍웨이는 “평화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는 반드시 무너진다. 사례를 한 번 살펴보자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70년대 제4차 중동전쟁의 영웅이다. 그런 그가 소련과 동맹을 유지하면서 미국을 관리하는 능란한 외교로 마침내 중동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평 화협정을 체결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3년째 되던 해인 1981년 그는 군 사열 도중에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의 평화주의자는 라빈 전 총리다. 그도 역시 1, 2차 중동전쟁의 영웅이었는데요르단 강 서안을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하기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정을 이스라엘 의회에서 단 2표 차이로 간신히 성사시키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아라파트를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이스라엘 전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난다. 국민을 직접 설득하기로 결심한 이 노 정객은 대중 집회에 참여하여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가사가 적힌 종이를 양복 윗주머니에 넣었는데, 총알이 날아와 바로 그곳을 뚫었다. 2차 오슬로협정 3년만인 199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80년대 후반부터 일방적 군축과 평화노선을 채택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3년째 되던 1991년에 군사 쿠테타로 실각한다. 임기의 마지막 순간에도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정치적으로 실패한다. 전 서독 총리인 빌리 브란트는 1968년에 신동방정책으로 동독과 화해협력을 도모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그로부터 3년 후인 1971년에 자신의 비서가 동독의 간첩이라는 이유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남북협력과 통일국가를 외치던 백범 김 구 선생은 김일성 만나고 온 지 3년째 되던 해에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종파간의 화해를 외치다가 암살당한 때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3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20세기 지난 백년의 역사에서 평화를 구현하려던 정치지도자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임기를 마친 사례가 있었을까? 그런 만큼 20세기는 평화 지도자들의 수난사였던 유례없는 폭력의 시대였다. 에릭 홉스 봄에 의하면 20세기 전쟁으로 사망한 총 인원이 1억8천만 명에 달한다. 그 이전에 선사시대로부터 모든 전쟁의 사망자를 다 합쳐야 이 숫자가 나온다. 전쟁을 하는 기계로서 발명된 정부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대량살상을 자행함으로써 대량생산과 대량살육이 공존했던 매우 특이했던 백년이다. 그런 만큼 폭력의 1백년을 거쳐 온 인류가 각종 대립과 반목을 부추기는 광신주의, 분열주의,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자유를 빼앗겼고, 이에 저항을 하면 어김없이 죽임 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사다트, 라빈, 고르바초프, 브란트, 간디가 추구했던 평화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는 20세기 마지막 평화정책이자 21세기의 첫 번째 평화정책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반도의 특수한 정책이 아니라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20세기 모든 평화정책의 특징을 담은 보편정책이다. 그랬던 햇볕 정책도 2000년의 6·15 남북정상의 공동선언 이후 줄곧 시련의 길을 걸었다. 정권 말기에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이 붕괴되었고, 김대중대통령의 레임덕이 급속히 확산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대한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저항과 방해는 이전의 20세기 역사에서 나타났던 평화 지도자들에 대한 수난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평화를 기반으로 분단된 남과 북이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지향하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향을 제시한 것인 동시에,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하는 대전환의 시작이었다. 숱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이 유지되고, 그 후임자가 정책을 계승함으로써 무려 10년이나 일관되게 진행된 평화정책은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이런 관점에서 백학순 교수께서 햇볕정책의 성과를 올바르게 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침체된 남북관계에서도 그 정책의 장기적 비전은 지속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고, 또한 호소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지난 이명박 정부 4년 동안 평화가 무너지고 남북관계가 극단적으로 훼손된 결과를 보면 그 이전 10년 간의 대북정책도 막아낼 수 없었던 일이고, 그런 점에서는 지난 햇볕 정책의 한계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햇볕정책이 북한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난도 마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더 업그레이드된 대북정책을 구상하는데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남북관계가 발전되는 상황에서도 남북 간에는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으며, 현재도 남북관계는 안보문제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1999년의 제1 연평해전은 최초 대치상황이 벌어지던 6월 6일부터 9일 사이에 남북이 교전을 할 어떠한 의도도 없었기에 얼마든지 예방이 가능했던 군사적 위기였다. 그러나 미묘한 해역에서 돌연 군사작전의 실효성이 없는 대형 수송함과 구조함을 현장에 투입하라는 잘못된 지시가 북을 크게 자극하여 매우 위험한 상황이 6월 13일부터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6월 15일에 교전이 발생하였다. 언론에는 북한군 30명이 사상되었다고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격파된 북 함정 6척에서 1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참상을 북에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완전히 격침시키지도 않고 반쯤 격파된 상태로 북에 보내주었다. 이에 북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이 3년 후에 제2 연평해전이라는 북한의 보복 군사행동으로 연결되면서, 아무리 남북관계가 개선된다 하더라도 군대와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들이 만들어 내는 위기상황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제2연평해전의 경우 북의 공격에 대비하여 해군본부는 4km, 해군2함대사령부는 3km의 거리를 유지하라고 했음에도 돌연 합참이 150m 거리까지 근접하도록 우리 함정에 지시하여 북의 포격에 우리 해군 6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두 번의 해전은 햇볕정책과 무관하게 군사적 위기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전문성의 부족에서 비롯된 사건인데, 당시 잘못된 지시를 내린 군 고위층은 이를 햇볕정책 탓으로 몰고 갔다. 당연히 군사적 전문성 부족에 대한 책임이 면책되고, 대북정책이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쓴 것이다. 이것이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현저하게 약화시키고 극단적 이념논쟁을 불러온 핵심 이유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대북정책을 복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은 위기를 관리할 줄 아는 유능한 정부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진보적 대북정책 전문가들조차도 남북관계만 개선된다면 모든 안보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한편으로 북한과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협상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성숙되고 전문화된 위기관리 그룹을 준비함으로써 안보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능력을 균형 있게 추진해야 한다. 보수와 안보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에서도 위기관리능력이 발전하기는 커녕 더 후퇴하고 있음은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떠올린다면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특히 연평도 포격사건 당시에는 전투기를 동원하여 북한 포격원점을 타격하는 것이 미군에게 물어보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극심한 혼란에 빠졌음을 볼 때, 당시 확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현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때문이 아니라 무능력 때문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합참이 그토록 무능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군사적 위기도 얼마든지 초래될 수 있었다. 안보에 있어 위기관리 능력은 보수 안보를 표방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잘 관리하는 정권이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을 잘 관리하고 협상하는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