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2주년 - 개회사 (Session 1 / 발제) 백학순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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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순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원
Session 1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
1. 한민족과 강대국 중심의 세계: ‘남북한 협력’은 생존과 번영의 길
우리민족은 5천년 역사에서 분단의 시기와 통일된 시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있었고,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통일하고 북쪽 옛 고구려 영토에 발해가 들어서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 말기에는 후백제, 후고구려가 일어나 다시 후삼 국시대를 경험했다. 고려가 다시 통일을 해서 우리는 통일 민족으로 1천년 이상을 지내왔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다시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민족이 통일을 이룩하였을 때는 강력한 국력을 보유했고, 평화를 바탕으로 뛰어난 우리의 문화를 꽃피웠다. 반면, 분단을 겪고 있을 때는 상호 대결과 전쟁으로 인해 국력은 낭비되고 항상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을 걱정해야했다. 해방 후 귀국한 서재필은 1947년 11월 5일 조선산업재건협회서 연설하였는데, ‘조선은 인구로 보아 세계 67개국 중 13위이나 부력(富力)으로는 끝에서 첫째 아니면 둘째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래서야 인민이 잘사는 정치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서재필은 또한 방송연설을 통해, ‘조선사람들은 자신의 국토와 인구의 크기에 걸맞는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서, 세계 13위만 도달하면 다른 문명화된 국민들처럼 풍족하게 살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불러 일이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분단되어 있지만, 반 토막인 남한만으로 세계 11-13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했고, 정치적으로도 경제 크기에 걸 맞는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류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우리민족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처럼 강해진 것은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처음이다. 해방 직후의 우리민족은 인구 크기로 보면 당시 세계 67개국 중에서 13위로서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으나, 경제력으로는 최하위를 면치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위상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중에 미국과 소련 등 열강들의 ‘힘의 외교’의 희생양이 되어 나라와 민족이 두 동강이 나고 또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냉전의 올가미에 걸려 지금까지 신음소리를 뱉어온 지가 벌써 60여 년이 넘었다. 거의 70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민족이 분단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그것을 떨쳐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민족은 전세계에 우리 민족밖에 없다. 이제 남한만으로도 우리가 먹고살게 되었다고 해서, 통일이 되면 통일비용의 부담으로 우리경제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비용을 과장하고, 북한을 외국 취급하고, 허다한 경우 우리민족에게 불공평하고 폭력적으로 부과되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의 영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우리 남한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민족의 운명과 관련하여 남북한이 협력하지 않고서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분단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에서 우리민족의 통일과 자율성(독립성)을 성취해 내는 것도,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미래를 이룩해내는 것은 남북한이 함께 협력하여 노력할 때 진정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남북한에 무력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우리가 이뤄놓은 경제·정치적 위상은 그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금 우리민족이 처해있는 국제환경은 미중양국이 자웅을 거루면서 대결적 구도로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는 21세기 동아시아질서이다. 중미양국 간의 대결적 구도는 동아시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남북한을 분리시켜 각각의 세력권에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엄중하다. 상호 협력하여 그러한 흡인력에 저항하고 우리민족의 공동이익과 통일을 함께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대결을 지속하여 속절없이 그 흡인력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 것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더 통일이 멀어지는 것을 보아야만 할 것인가? 우리민족의 최근세사는 외세의 침략과 민족 분단의 역사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분단과 외세의 영향에 익숙해져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또 다시 21세기 강대국질서에 속절없이 끌려들어가 피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살 수는 없다. ‘민족의 통일과 자율성의 확보’ vs. ‘민족의 분단과 강대국 질서의 추종’이라는 엄중한 선택을 앞에 놓고서 지금처럼 남북 간에 상호대결을 지속하고 무력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남북한 집권자들의 정책은 민족의 희망에 대한 배신이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남북한이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공동이익의 공간을 확립하고 확보함으로써 미중대결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질서가 우리에게 분단의 지속을 강요할 때 이를 거부하고 자주와 통일에의 노력을 통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기약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민족이 강대국중심의 국제사회에 대해 추구하는 ‘자주’는 ‘닫힌 자주’가 아니다. 그것은 김대중대통령의 생각처럼 ‘열린 자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되겠지만, 점진적인 협력의 과정을 통해 남북연합의 ‘사실상의 통일’부터 이뤄나간다면, 통일된 우리민족이 2050년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을 뛰어넘어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전문가의 예측도 있지 아니한가.
2. 6.15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김대중대통령이 꿈꾼 ‘한반도와 국제관계’
김대중대통령은 어느 지도자보다도 국제관계에 밝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현상유지적 외교를 한 지도자가 아니라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의 동학을 잘 이해하면서 그것을 이용한 지도자였다. 그는 냉전질서가 붕괴하고 난 후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기까지의 과도기, 즉 ‘탈냉전 시기’라고 불린 기간에 우리민족이 한반도에서 주인으로서 주도권을 확립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동아시아질서 속에서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려는 비전을 가진 ‘능동적’인 전략가요, 한반도에 관한 한 강력한 국제질서형성자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사용한 외교적 수단과 방법은 ‘우리민족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외교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과를 낳았다. 김대통령이 만일 민족화해가 아닌 민족대결을 추구했더라면 중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것은 냉전구도의 지속을 의미했을 것이며 우리민족 자신의 주체적인 활동공간을 만들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의 김정일위원장도 김대통령의 민족 간 화해와 평화정착, 통일을 통한 생존과 번영의 비전에 동의함으로써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이 발표됐던 것이다. 6.15공동선언은 전 세계의 지지를 받았다. 남한과 북한의 동맹국인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남한의 대북정책을 지지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당시 국제 언론의 보도와 해설 내용을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리베라시옹은 ‘남북의 긴장완화의 시작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사건’임을 강조하였으며, BBC와 닛케이신문은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1972년 닉슨-마오쩌둥회담에 비유하였고, 르 피가로는 이를 1970년 동서독 총리와의 첫 만남을 연상시킨다면서 그로부터 19년 후 독일이 통일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쥐트도 이체짜이퉁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남북정상회담은 ‘훗날 한반도 통일의 출발점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즈는 ‘북한을 불량국가로 취급할 근거가 없어질 것이란 희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워싱턴타임즈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가 물려받은 스탈린 체제에서 탈피하려는 대담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 평양을 다녀온 후, 클린턴미대통령에게 전화하고,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을 워싱턴에 보내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설명하였지만, 올브라트 국무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정상회담 결과를 직접 듣기 위해서 1주일 후에 방한하였다. 올브라이트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어려운 시기에 강인한 힘과 지도력을 발휘한 김대통령을 ‘병적으로’(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존경한다. 특히 하나의 정책과 아이디어를 인내심을 갖고 성공시킨 능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제 세계가 김대통령을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메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은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들러 워싱턴으로 귀국하는(2000년 10월 26일) 비행기에서 가졌던 언론브리핑에서 한 기자가 ‘당신은 (1972년 2월 중국에서 마오쩌둥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관계정상화를 논의했던) 닉슨이 중국에서 느꼈던것과 같은 것을 느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올브라이트는 “아니오, 나는 결코 닉슨대통령처럼 느끼지 않았다”면서 북미관계에서 이뤄지는 역사적인 진전을 자신의 공이 아니라 김대중대통령의 공으로 돌렸다. 올브라이트는 “김대중대통령은 비전을 갖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추구했고 전세계가 그가 한 일 위에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허용한 뛰어난 인물입니다... 내가 김정일과 논의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김대중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김대중대통령이 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공로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한 일 위에서 일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웬디 셔먼 미 대북정책조정관의 표현을 빌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사실상 “한국의 역대대통령 가운데서 미국이나 일본이 북한과 직접 교섭하는 것을 찬성한 처음의 대통령”이었다. 이러한 정책변화 덕분에 6.15공동선언을 포함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이 주변 4강 모두와 국제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만큼 우리민족의 주도권과 위상이 국제사회에 높아졌던 것이다. 이처럼 김대중대통령의 한반도문제의 해결과 한반도에서의 국제질서형성자로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 냈다. 클린턴대통령은 김대중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는 ‘한반도정책에 관한 한 김대통령이 운전사요, 자신은 김대통령 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김대통령이 하는 대로 따라가겠다’는 자세에서 잘 드러났다. 한반도문제의 주도권을 남한정부가 쥐고 미국정부가 뒤를 받쳐주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주둔 미군에 대해서 김정일위원장으로부터 ‘한민족은 러시아, 일본, 중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미국이 있어야 균형과 안정 축의 역할을 하고 다른 나라들이 엉뚱한 아심을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것, 따라서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하는 군대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동북아의 세력균형의 유지에 기여한다면’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적으로 주둔해야 하고 통일 이후까지도 주둔해야 한다’는 입장을 직접 듣고 확인한 점이다. 이는 미국 등 주변국들로 하여금 북한과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종합컨대, 김대중대통령이 6.15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꿈꾸었던 ‘한반도와 국제관계’는 강대국들의 이익과 외교가 결합되어 형성된 하나의 국제질서, 즉 냉전질서가 무너지고 이제 또 다른 새로운 국제질서, 즉 21세기 (동아시아)국제질서가 등장하는 과도기에서 우리민족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남북한 간 협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형성에 참여하고 공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대통령은 자신의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성취했다. 참으로 우리 외교사에서 빛나는 시기였다.
3.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 반민족성, 반역사성, 반평화성
이명박정부는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그와는 정반대의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8∼9개월을 지켜본 모 저명 언론인은 자신의 칼럼 “남북관계, 어디까지 후퇴하는가”를 통해 이명박대통령 그룹을 “한국판 네오콘”으로 명명하였다. 이는 이명박정부의 남북관계ㆍ통일에 대한 ‘정체성’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한국판 네오콘’들이 들어서서 그 동안 남북관계에서 이룩한 민족화해, 평화정착, 통일에의 모든 성과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을 내세웠으나 속내로는 ‘북한붕괴론’에 사로잡혀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은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북한은 물론 남한국민으로부터도 대북정책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이명박정부의 비현실적이고 비전략적인 북한붕괴 시도는 적어도 다섯 가지 면에서 남북관계와 한반도 상황을 1980년대 말이래 최악으로 몰고 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첫째, 남한정부의 북한붕괴 시도로 인해 남한지도부에 대한 북한지도부의 불신이 심화되었고, 북한지도부의 대남 행동을 보면, 남한지도자나 남한정부의 어떤 대북정책 관련 발언이나 조치도 결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남한정부의 진정성에 대해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으로부터의 협력에 대한 기대는 비현실적인 기대가 되었다. 둘째, 북한의 협력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남한의 어떤 대북정책도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또 과거 경험이었음을 상기할 때, 이명박정부의 붕한붕괴 시도는 남북관계 악화와 파탄의 주된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북 정책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은 ‘국내정치용’ 정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명박정부가 아예 그러한 소극적인 입장을 넘어 적극적으로 대북정책을 ‘국내정치용’으로 이용하는, 즉 대북정책이 ‘국내정치용化’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셋째, 남북한 간에 대결정책이 더욱 첨예화됨으로써 남북관계에서 파탄이 초래되면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에 대한 남북한의 관리·통제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에서의 자신들의 국익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였고, 이로써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정치化’되면서 남한정부가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작년 11월 연평도 포격사건 발생으로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이 급격히 상승한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내치에서의 정답은 ‘분열보다는 통합’, 외치에서의 정답은 ‘전쟁보다는 평화’라고 할 것인즉,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 남북한 양국이 긴장완화, 평화회복의 정책보다는, 북한은 무력도발을 하고 다른 한편 남한은 ‘전쟁을 불사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강대국들의 우려를 샀던 것이다. 넷째, 이명박정부는 또한 오마마정부의 대북정책이 ‘전략적 인내’에 기반을 두고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비효과성을 노출하자 오바마대통령의 한반도문제, 대북정책에 대한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북한붕괴론에 기반을 둔 대북 대결정책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북한에 대한 어떤 새로운 정책적 접근도 차단하였다. 한국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발목 잡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명박정부는 오마바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의 리더십의 부재를 이용하여 대북대결적 한미동맹을 주도해나간 것이었다. 이로써 남북 간, 북한과 서방세계 간에 협력이 끊어지면서, 중국이 이를 기회로 특히 대북한 경제적 침투를 급격히 확대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對중국 의존, 특히 경제적 의존을 심화시킴으로써 향후 한민족경제공동체 건설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마지막으로, 이명박정부는 상대적으로 ‘민족’ 개념이 희박하고 국제관계에 대한 중시, 특히 ‘친미’ 일변도의 인식과 정책을 보여주었다. 이는 남한의 국가전략에서 남북문제와 통일 문제를 외교의 하위에 놓음으로써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남북한의 주체적인 노력을 경시하였다. 또 이명박정부의 지나친 친미일변도의 인식과 정책은 한중관계에서 소원함을 가져왔고. 동아시아 국제질서형성자 중의 한 축인 중국과의 협력에 큰 어려움이 조성되었다. 이는 ‘우리는 외교를 잘해야 먹고사는 나라’이며 ‘당연히 동맹국인 미국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주변4강을 소원케해서는 아니 된다’는 김대중대통령의 정책과는 큰 대조를 보였다. 종합컨대, 이명박정부의 북한붕괴론에 대한 집착으로 표리부동해진 대북정책은 남북 간에 깊은 불신을 가져왔고, 그 결과 민족 간의 화해와 평화는 사라지고 대결과 전쟁의 위협이 우리민족 위에 악령처럼 떠도는 참담한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 실로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은 민족의 화해ㆍ협력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문제에 대한 주도권과 발언권을 상실하고, 미중양국으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한반도문제에 개입하게 만듦으로써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의 자주적인 공간을 축소시킨 실로 반민족적 정책이었고, 또 우리가 사는 시대를 대결을 지속하고 전쟁을 걱정하는 냉전시대로 되돌린 반역사적이고 반평화적 정책이 었다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4. 북미관계와 한반도: 2.29합의, 북한의 로켓발사, 긴장완화 시작
북미양국은 2011년 7월부터 세 차례의 북미고위급회담을 개최하여 반년 여 만에 올해 2.29합의를 만들어냈다. 이는 2007년 가을 6자회담에서 10.3합의가 채택된 이후 거의 4년반 만에 이룩된 북핵 및 북한미사일 관련 합의였다. 2.29합의는 10.3합의와는 그 수준과 성격이 전혀 다른 합의였다. 2007년의 10.3합의는 2005년의 9.19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제2단계 행동조치를 담은 6자회담에서의 공식 합의였다. 그러나 이번 2.29합의는 북미양국 간에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를 목적으로 북미 간에 북핵문제, 북한미사일문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관련 활동의 ‘유예’를 규정한 상황관리적 성격의 합의였다. 그리고 만일 합의가 깨어지는 경우, 양측 공히 각기 자신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어적 조항을 포함시킨 합의였다. 사실상 2.29합의는 북한의 새 지도자 김정은으로서는 3대세습의 완성을 통해 국내정치의 안정화를 이룩한 다음 이제 미국에 일종의 화해 제스처를 취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영양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바마 미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대선과정에서 외교안보 부문의 골치 아픈 이슈로 등장하지 않도록 북한에 대한 일종의 ‘통제 메커니즘’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2.29합의 이후 4월 중순에 인공위성 로켓을 발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즉각적으로 그것은 2.29합의의 위반이며 유엔안보리 결의들의 위반이라면서 북한의 로켓발사 계획의 중단을 요구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계획에 대해 미국을 속이면서 2·29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은 이미 지난해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김일성 탄생 100주년 경축을 위해 인공위성을 발사할 예정이며 이는 장거리미사일 발사가 아니라고 사전 예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북한이 예고대로 로켓을 발사하자 미국 측 협상자들은 북한 측이 고위급회담에서 ‘로켓 발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비공식적 차원의 설명을 했으나, 북한은 그러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렇다면 오바마대통령의 계산은 무엇이었을까? 공화당 측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어 본격적인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기 이전에 북한 관련 문제에서 낼 수 있는 성과를 최대한 내면서 동시에 2.29합의라는 ‘통제장치’가 작동해 북한문제가 대선기간에 주요 외교안보 이슈로 등장하지 않기를 희망하지 않았을까. 그렇잖아도 이란 핵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오바마대통령으로서는 북한문제에 대해 손놓고 있다가 대선 가까운 시점에서 북한의 도발로 큰 상처를 입기보다는 일단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미리 통제장치를 마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북한이 로켓 발사를 한 이후에는 어떤 합의든 불가능하기 때문에 북미 간 합의와 발표 시점은 늦어도 4월 이전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2.29합의로 나타났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라도 여러 의문점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예고한 위성 로켓발사를 일주일 정도 앞둔 4월 7일 미군비행기가 비밀리에 괌을 출발하여 우리 영공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당일 평양을 떠난 일이 있었다. 미국이 북한의 로켓발사를 앞두고 북한이 그것을 중단하도록 마지막 설득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설득을 위해서는 실무채널인 뉴욕채널로는 적당치 않았을 것이고 직접 고위급인사가 특사로 평양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특사는 정보통인 조지프 디트라니 국가정보국(DNI) 산하 국가비확산센터(NCPC) 소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로켓발사 전에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글린 데이비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에게 서한을 보내 위성발사 이후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4월 12일 새벽에 인공위성 로켓을 발사했다. 미국은 북한의 로켓발사를 유엔안보리 결의 1718호, 1874호 위반이라면서 유엔안보리로 이관했고, 안보리는 4월 16일 의장성명에 합의했다. 위의 대북제재 의장성명에 따라 미국(17개), 한국(19개), 일본, EU가 추가 제재 명단을 이미 유엔안보리 산하 북한제재위원회에 제출했으며, 상호 협상을 통해 최종적인 리스트를 작성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결국 2개의 단체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4월 17일 북한은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을 배격하는 외무성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 엔안전보장리사회 결의보다 훨씬 더 우위를 차지하는 보편적인 국제법들에 의하여 공인된 자주적인 우주 리용권리를 계속 행사해 나갈 것”이며, “국가우주개발계획에 따라 우주개발기관을 확대강화하고 정지위성을 포함하여 나라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각종 실용위성들을 계속 쏴 올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이 로골적인 적대행위로 깨버린 2.29조미합의에 우리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인공위성 발사는 2.29합의와는 별개의 것인데, 미국이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문제 삼아 식량지원 중단 등 북미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북한은 이제 “조미합의에서 벗어나 필요한 대응조치들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외무성 성명에는 당장 핵실험이나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를 하겠다는 위협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4월 19일자 조선신보의 보도를 보면, 지금의 상황이 “2009년 상황과 같은 대결 구도로 그려져” 있지만, “대화에 의한 사태수습 가능성 없다고 단언을 못한다”는 흥미로운 보도를 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미국의 적대행위로 2.29합의가 깨진 조건에서 조선 측이 약속한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 영변우라늄농축활동의 임시중지조치도 당연히 해제되게 된다”면서 북한은 이제 “조미합의에서 벗어나 필요한 대응조치들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단지 “‘대응조치’가 무엇인지 예단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오바마정부가 “올해의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정권이라면 허세를 부리기 전에 조선이 ‘대응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산생되는 후과부터 고려하는 것이 순리”라면서 “막판에서 강경론을 접고 나선다면 대화에 의한 사태수습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오바마대통령으로서는 대통령선거 중이라는 점이었다. 북한의 핵 정책과 활동에 대해 통제장치로서 합의해 놓은 2.29합의가 비록 이행되기는 어렵더라도 그 ‘정신’을 살려갈 수 있다면 다행일 터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핵실험을 막아내는 것이 필요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위협이 커지는 긴장고조를 막아야할 터이었다. 4월 7일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한 디트라니 특사가 인공위성 로켓발사도 해서는 안되지만 핵실험과 한반도에서의 전쟁위기의 고조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객관적으로 보면 북한으로서도 미국과의 대결을 지속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김정일의 유언에 따라 로켓을 발사했고, 로켓발사 중지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에 대해 정면으로 로켓발사를 감행함으로써 김정은이 젊은 지도자지만 결코 녹녹치 않다는 것을 이미 보여준 셈이었다. 그리고 핵실험,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 등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카드로 보유하고만 있으면 그 효과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 강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미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등장한 미트 롬니의 대북 발언은 조지 W. 부시 시절의 네오콘의 발언과 전쳐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이서 오바마에게 결정타를 날려 선거정국을 조금이라도 롬니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또 오바마가 대통령에 재선된다면, 그가 전향적인 새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북미관계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타를 날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결국 한반도 상황은 4월 중순 북한의 로켓발사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의 발표로 사건이 일단락되면서 긴장완화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북미양국은 로켓발사 이후에도 뉴욕채널을 통해 소통을 지속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월 8∼19일 미국에서 개최된 G8 정상회담이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의 내용을 재확인하자, 5월 2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G8 정상회담의 선언을 비판하면서, 북한은 “경제강국 건설의 필수적요구에 따라 자주적인 위성발사 권리를 당당하게 끊임없이 행사할 것”이라면서 미국의 “적대시정책이 계속되는 한 핵억제력은 순간도 멈춤 없이 확대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대변인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조선반도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철회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에는 언제가도 열릴 수 없게 되어 있다”면서도 “평화적 발전에 총력을 집중하는데 필요한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미국 측에 그들이 제기한 우려사항도 고려하여 우리가 2.29조미합의의 구속에서 벗어났지만 실지 행동은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수주일전에 통지한바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원래 우리는 처음부터 평화적인 과학기술위성발사를 계획하였기 때문에 핵시험과 같은 군사적 조치는 예견한 것이 없었다”고 했다. 북한이 비록 2.29합의의 구속에서는 벗어났지만, ‘실제 행동은 자제’함으로써 2.29정신을 유지해나가겠다는 차원에서 당장은 핵실험 계획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을 ‘수주일 전’에 미국 측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이제 유화적인 제스처를 통해 양국 간에 긴장완화를 시작하였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협력적 제스처에 대해 즉각 반응했다. 글린 데이비스 미 특별대표 일행이 5월 20∼25일 한국, 중국, 일본 방문에 나선 것이다. 이는 북한이 미국 측에게 ‘수 주일 전’에 당장 핵실험 계획이 없다는 것을 통보해 주었고 미국은 이를 기회로 6자회담 참여국들과 의견을 나누고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여 북한의 핵실험,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 영변우라늄농축시설의 재가동, 한반도 전쟁위기를 막음으로써 한창 대선 중인 오바마대통령을 한반도 문제에서 빗겨나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데이비스 특별대표는 동양 3국 방문을 통해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포함한 도발행위를 강행하지 않는다면 일ㆍ미ㆍ한 3개국이 대화를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방침에 합의”했으며, “북한이 올바른 결단을 내린다면 그 결단에 응답할 준비는 돼 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자 이제 대화환경이 정비되면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의 실시도 검토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는 언론 관측까지도 나왔다. 결국 북한의 로켓발사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도됐다가 북한의 ‘자제’와 ‘핵실험 無계획’통지, 그리고 그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호응으로 이제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의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한편, 6월 3∼4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미중 전략ㆍ경제대화에서 북한문제를 다룰 것인 바, 여기에서 한반도 긴장완화와 6자회담 재개에 대한 기본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5.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 “다시 6.15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다시 6.15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6.15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에서 김대중대통령이 꿈꾼 ‘한반도와 국제관계’, 즉 남북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한반도에 관한 한 우리민족이 주도적으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의 공간을 확보하는 비전과 전략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지난 수년간 이명박정부 하에서 반민족적, 반역사적, 반평화적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으로 고통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정부 하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한반도에 대한 주인의 권리와 발언권을 되찾아 미중양국 간의 대결적 구도로 빠르게 형성되고 있는 동아시아 질서가 남북한을 분리시켜 각각의 세력권에로 끌어가려는 흡인력에 저항함으로써 우리민족의 자주적이고 독립된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민족에 대한 희망’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동아시아 신질서의 형성은 아직 그 초입에 있다. 이는 아직도 우리민족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올 12월 대통령선거를 통해 우리 모두 김대중대통령과 같은 ‘민족의 희망을 다시 세울’ 지도자의 탄생을 고대해마지 않는 이유다. 남북한이 함께 힘써서 해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 민족화해, 평화정착, 통일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나라와 민족의 통일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생전에 국민들이 통일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인식을 갖고 통일에 좀 더 힘쓸 것을 희망했다. 그리고 6.15공동선언의 1, 2항에서 남북한이 통일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한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통일한국의 미래는 어떠한가? 통일을 통해 우리민족이 얻게 될 서너 가지 혜택을 생각해 보자. 첫째, 무엇보다도 통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민족의 ‘온전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문제에서 한민족의 ‘주인 정체성’의 회복이 이뤄질 것이다. 이는내부적으로는 한민족공동체 확립, 대외적으로는 ‘열린 자주’와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김대중대통령이 생각한 자주성은 배타적인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였다. 김대통령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위원장에게 우리민족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자주가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주는 배타적인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배타적인 자주는 국제사회와 연결하고 협력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지만, 열린 자주는 얼마든지 국제사회와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통일이 되면 우리는 분단시대에 보여주었던 전쟁국가와 전쟁민족의 이미지를 벗어나 ‘평화국가’와 ‘평화민족’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이 되면, 우리는 최소한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평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분단시대에서처럼 미국이나 중국 등 국제사회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며, 적극적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수동적 행위자를 탈피하여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는 ‘적극적 행위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하나의 국제모범의 평화국가와 평화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통일의 중요한 편익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혜택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여 한 단계 새로운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확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리적 분단 극복을 통해 한민족경제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한국은 토지도 인구도 거의 두 배로 확대될 것이며, 여기에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게 되면 8천만 내수시장을 확보함으로써 독일, 프랑스, 영국과 같은 인구 8천만의 중견국가로 등장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인용했지만, 골드먼삭스 애널리스트는 2050년 통일한국의 GDP는 세계 8위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참고로, 경제의 크기가 중국(약 70 trillion dollars)-미국(약 40trillion dollars)-인도(약 33, trillion dollars)-브라질(약 11 trillion dollars)-러시아(약 8trillion dollars)-인도네시아-멕시코-“통일한국”-영국-터키-일본-프랑스-독일 순으로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통일한국이 누리게 될 통일편익에 대한 골드먼삭스의 분석은 우리민족이 통일비용이 과도하게 들어간 독일식 통일 모델이 아닌 비용도 최소화되고 경제통합 이후 성장률도 월등한 ‘중국-홍콩식’ 모델을 따를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중국-홍콩식 모델은 한 국가 안에 두 개의 경제체제와 정치시스템이 공존하는 모델이다. 또한 동아시아 경제권의 한 가운데 위치한 통일한국은 환황해경제권과 환동해경제권의 양 날개로 구성되는 인구 6억4천만, GDP 7조 달러 시장의 한 가운데 위치하여 새로운 도약을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또한 통일한국이 되면 ‘철의 실크로도’가 구체화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이 주창했던 철의 실크로드는 남북한, 중국, 러시아의 이익을 공동으로 아우르는 동북아와 유라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윈-윈의 정책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한반도와 동북아, 유라시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정치와 외교, 군사와 안보, 경제와 무역, 인적 및 물적 교류를 동시에 결합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전략으로서 나온 것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원대한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통일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그 위상이 급격히 높아질 것이다. 한민족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회복하여 열린 자주 하에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와 평화와 협력을 추구하면서 세계의 모범이 되는 민족과 국가, 그리고 새로운 경제 중견국가로 등장하여 동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 세계로 뻗어나가며 또 그것의 긍정적인 영향을 적극 수용해 가는 통일한국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국제문화 속에 우뚝 서게 하는 우리의 모습은 분단시대에 보아왔던 국가와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이 모든 성취들은 우리에게 그냥 자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민족의 정치리더십이 어떤 뛰어난 전략적인 사고와 능력을 갖고 정치,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문화 분야를 이끌어 나갈 것인지에 달려있다. 결국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 리더십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리더십을 선택하는 우리 국민의 능력의 문제이다. 올 12월 대통령선거를 통해 우리민족과 국제사회에 대한 탄탄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전략적이고 유능한 리더십을 발휘할 대통령이 탄생하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