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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1주년 기념식 - 학술회의 기조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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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석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이사, 전 통일부장관)



    기로에 선 한반도 평화: 북핵,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북핵위기의 양상


    북핵문제가 표류하고 있다. 북한 핵능력은 억제되기는커녕 최근 수년간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반도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당사국들이 북한의 핵 보유를 막을 수 없는 추세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2009년 이후 한미정부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거의 포기한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로 한반도 평화가 기로에 서게 되었다는 판단은 북한의 핵 능력 강화 못지않게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의지와 연대가 약화되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현재의 북한핵정세를 특징화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지속적인 핵 능력 강화로 인해 핵 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은 2006년 10월에 이어 2009년 5월,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핵능력을 강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북한은 작년 10월에 농축우라늄 공장을 영변에 건설했음을 공공연히 밝혔다. 북한은 2009년 4월, 우주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주장하며 행한 자신의 로켓발사행위에 대해 유엔안보리가 의장성명으로 규탄하자 “자체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뒤 곧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결정하고 그 첫 공정으로 핵연료를 자체 생산하기 위한 기술개발을 지체 없이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를 입증이나 하려는 듯 미국 측 인사들을 초청하여 농축 우라늄 공장 시설을 보여준 것이다. 서방은 북한의 이러한 행위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구실 아래 고농축 우라늄(HEU) 개발을 통한 핵 능력 강화의도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핵을 개발하는 국가의 핵무기화 단계를 보면 핵시설의 건설 및 가동(1단계) →핵물질 생산(2단계) → 핵폭탄의 제조 및 실험(3단계) → 핵무기화(핵폭탄의 소형화, 경량화, 발사체의 개발 및 장착, 4단계) → 핵무장화(핵무기의 생산 및 배치,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현재 북한은 핵무기화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데, 만약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북한은 곧 완전히 이 단계에 도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북한 핵능력의 강화는 그들의 핵 집착을 더 강하게 만들고 그만큼 핵 포기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 정세는 지금 북한 핵의 포기와 보유 사이에서 중대한 분기점에 와 있다. 그나마도 2차 북핵 실험 후 한미(韓美)가 2년 동안 북한의 핵개발을 사실상 방치했기 때문에 이 분기점에 해당하는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계기로 발효된 유엔의 대북 제제 결의 1874호가 무력화(無力化)되었다. 이 제재안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2009년 가을에 중국은 북한과 탈냉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경제협력 협정들을 맺고 대북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이 때문에 유엔의 대북제재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대한무역진흥공사의 발표에 따르면 제재 국면 속에서도 2010년 북한의 대외교역 총액(41억 7천만 달러)은 전년보다 22.3% 증가했으며, 이 중 중국의 의존도는 83%에 달했다. 이는 대북제재 국면 이전인 2008년에 비해 10%나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북한이 유엔의 대북제재로 서방에서의 인도주의적 지원이 중단되고 일부 교역에 차질을 빌어 경제적 고통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체제에 위협을 줄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북중경제 관계의 확대로 인해 유엔의 대북제재가 무력화된 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북중관계의 변화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그동안 6자회담 의장국으로 북한을 설득하여 6자회담에 복귀시키고 9.19 공동성명과 같은 중요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역할에 일정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중국은 2009년 가을부터 북한 문제를 두고 ‘제재’와 ‘전통적 우의관계 발전’이라는 두 개의 길 중 분명하게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0월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의 북한방문과 2010년 5월과 8월, 그리고 2011년 5월의 세 차례에 걸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중국의 창지투(長吉圖) 개발계획과 라선경제무역지대의 연계 개발, 중국정부의 북한 3대 세습 공식 인정 등 양국관계가 고도로 밀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연장선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시각도 기존의 북한 책임론에서 미국-북한 공동책임론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서방의 압력에 과거보다 훨씬 더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리라는 것을 예측케 해준다. 그리고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가 중국의 협력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서방의 전략 선택폭도 크게 좁히고 있다.


    중국의 대북전략변화는 중국과 서방이 바라보는 북한의 비전과 미래가 서로 다른데서 나온 예상된 것이었다. 서방이 바라보는 북한의 비전은 현재의 독재 세습정권이 교체되어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주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원하는 것은 공산당 독재가 유지되면서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유일체제보다 민주화된 북한 체제를 바라지만 북한에 대해서 가지는 본질적인 이익은 공산당 통치의 북한을 유지하는 것이고,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서 중국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중국은 한국정부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북한 붕괴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을 국제사회에 건설적인 방법으로 편입시킨다는 목적 아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유대를 강화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국의 태도 변화는 한미 양국에게 북핵문제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더 높은 집중력과 북한에 앞서 중국을 설득할 수 있는 합리적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셋째, 북한이 9.19 공동성명에 기초한 비핵화 용의를 밝히고 6자회담 복귀의사를 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한미가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내걸며 회담재개를 어렵게 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김정일은 2009년 가을 원자바오 총리에게 조건부 6자회담 복귀의사를 나타냈다. 그 뒤 북한 관리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조건없는 6자회담 복귀를 수시로 밝혀왔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변화는 중국의 요구와 내부적인 필요성이 일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은 북한과의 제반 협력관계를 확대하면서, 북핵문제의 진전을 도모하고 서방과 배치(背馳)되는 자신의 대북접근으로 인한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와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의 개선을 권유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권고는 김정은 후계체제의 원만한 확립을 위해 경제난 해결과 외교적 고립 탈피를 모색하던 북한지도부의 이해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의사 천명에도 불구하고 한미의 전제조건 제시로 6자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이 전제조건은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사태에 대해 한국정부가 북한의 사과를 요구하고 이를 6자회담의 재개와 연계하면서 생겨났다. 현재는 중차대한 북핵문제를 지연시킨다는 내외의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전제조건이 다소 애매해지기는 했으나 그 기조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미국은 남북관계 개선을 6자회담의 전제로 내걸었지만, 한국정부가 북한의 사과가 없는 대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한 그것은 정치적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6자회담은 장기 공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전제 조건의 비현실성과 한미의 도덕적 해이


    현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공론화되고 있지는 않으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핵위기는 가중되고 있다. 관련 국가들의 북핵문제에 대한 피로감이 위기를 위기처럼 느끼고 그에 맞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처를 어렵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가중되는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6자회담을 재개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미가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전제조건을 내걸면서 북핵문제의 표류가 계속되고 있다.


    과연 한미가 전제조건을 내건 것은 합리적인가? 6자회담이 한미가 북한에 대해 베푸는 보상책이라면 한미의 태도에는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북한에게 있어서 자신의 핵 포기를 이끌어 내기 위한 6자회담은 보상이 아니라 부담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6자회담에 대해 기피적(忌避的)인 태도를 보여왔다. 기분 상으로는 북한이 2009년 4월 자신의 로켓 발사를 규탄하는 유엔의장성명에 대한 반발로 6자 회담장에서 뛰쳐나가 2차 핵실험까지 감행했기 때문에 “나갈 때는 제 발로 나갔지만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미는 그것을 가능케 할 실질적인 수단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대북제재가 그 수단이 되리라고 판단했으나 그 한계는 이미 드러난 상태이다. 즉, 한미가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대해 심사위원석에 앉아 ‘예스’와 ‘노’를 판정할 수 있는 경우는 북한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제재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 북한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굴복할 때뿐인데,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사실 2010년 초만 해도 한미 정상이 입을 모아 북한의 조건없는 6자회담 복귀를 요구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이 전제조건 제시가 자기 모순적이며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한편, 한미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북한이 잃을 것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6자회담 복귀를 권유한 중국정부에게 ‘보다시피 자신은 성의를 다했노라’고 할 것이며, 북중 관계는 서방의 대북제재를 비웃으며 발전해 갈 것이다. 그리고 6자회담이 지체되는 만큼 북한은 누구의 제약이나 눈총도 받지 않고 지난 2년 여 개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핵능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사실 북한의 2차 핵 실험 이후 한미 양국이 한 일은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유엔의 대북 제재결의안을 통과시킨 것 이외에 달리 없어 보인다. 강경한 부시행정부 당시에도 미국은 1차 북핵 실험 4개월 만에 북한과 협상 끝에 6자회담을 열고 2.13합의를 이끌어 낸바 있다. 북핵문제 해결의 절박함과 그 중대함을 감안할 때,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를 막고 있는 한미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능력만 강화시킬 뿐이다.


    미국이 북핵문제를 사실상 방치하는 데는 워싱턴에 만연한 광범한 북한혐오증과 북한 비핵화에 대한 의지 약화 등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에 퍼져있는 북한에 대한 극도의 불신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실익이 없다는 단정적 믿음을 광범하게 생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북한의 로켓발사와 2차 핵 실험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래서 북한이 자신의 비핵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대화에 나오겠다고 해도 그 의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워싱턴 인사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분위기는 산적한 ‘북한문제’를 인내를 가지고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는 협상론자들의 입지를 극도로 좁혀놓았다. 누구도 북핵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미대화조차 터부시하는 워싱턴의 정서가 북핵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황만을 악화시킬 뿐이다. 예컨대, 북한의 농축 우라늄 시설 공개는 북핵 개발을 저지하는 방법으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말해온 오바마 정부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한다고 했으나 그것은 사실상 북핵문제에 특별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고 그럭저럭 끌고 간(muddling through) 것이며, 그 결과는 북한 핵 능력의 강화로 나타났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후보 시절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대화를 거부한 압박정책이 오히려 북한의 핵 능력을 강화시켰다고 비판했음을 상기할 때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도 북한이 농축 우라늄 공장 시설까지 공개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6자회담 재개를 시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과연 어떤 실익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전제를 거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도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핵 포기를 남북관계 진전의 전제로 삼은 ‘비핵개방 3000’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아왔다. 그런데 6자회담 재개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자, 남북관계 사안인 천안함 문제의 해결 없이는 6자회담 재개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냉철히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이명박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북핵 우선에서 갑자기 남북관계 우선으로 180도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자가당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미국의 대북정책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현 시점에서 6자회담 재개가 지체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한미 양국 정부는 북한의 ‘부도덕’을 핑계로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북한 핵능력 강화를 방치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를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해서는 이 도덕적 해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북핵 포기에 대한 한미의 확고한 의지이다. 만약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면, 그리고 이것이 입증 가능한 상황이라면,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당사국은 ‘협상을 통한 북한 핵의 포기’라는 기존의 노력 대신에 북한의 핵 보유를 전제로 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6자회담에 매달리면 그것은 불임(不姙)을 뻔히 알면서도 무엇인가“되는 체”하는 가장연극(假裝演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솔직히 북한 핵 보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맞게 대응책을 세워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아직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이 없고, 관계 국가들이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북핵 포기를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현 단계에서 북한이 최종적으로 핵보유를 결정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르다고 본다. 지금이 분기점인 것은 분명하나 북한의 태도는 아직 핵 포기에 대한 결정을 미룬 채, "이쪽 아니면 저쪽(either or)" 을 선택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인 상황편승전략(Opportunistic tactics)”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핵 포기에 대한 대가가 충분하면 핵을 포기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핵 보유를 공고히 하겠다는 기존의 전략을 바꾸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추가 핵실험과 농축 우라늄 시설 공개를 통해 ‘배가된 핵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핵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핵 문제 당사국들은 이 문제를 대북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다시 한 번 2005년 9·19 공동성명 도출 때처럼 문제해결을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 진전을 위한 핵심 과제들


    현 단계에서 한반도 정세의 안정과 평화증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북핵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진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핵심과제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가 긴요하다. 북핵 교착국면을 타개하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실효적 방법은 6자회담을 통한 합의와 이행이다. 6자회담의 재개는 북핵 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하는 국제적 기제가 작동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고조된 한반도 위기를 극복하고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북한의 지속적인 핵 능력 강화시도를 견제 할 수 있는 장치가 작동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북한의 핵 실험으로 회의론도 만만치 않으나 6자회담에서 산생된 9.19 공동성명이나 2.13 합의가 북핵 문제의 진전과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를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6자회담에서 이미 동북아 역사상 최초로 관계국들이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과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을 명시적으로 약속하고 관련 실무그룹의 가동을 합의한 바 있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하고 나면 그 힘에 바탕을 두고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체로의 질적 전환을 한다는 비전을 참가국들이 공유한 것이다. 결국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6자회담만큼 유용하고 경험이 축적된 기제를 다시 만들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6자회담 무용론은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를 무너뜨리고 또 같은 길을 뒤로 후퇴해서 되풀이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미는 6자회담 재개를 즉각 결단해야 한다. 한미 양국정부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의 북핵 입장에 변화가 발생하였고, 유엔의 대북제재는 사실상 무력화되었으며 6자회담의 교착 속에서 북한의 핵 능력만 신장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속한 6자회담 재개로 나아가는 것이 문제 해결의 올바른 방향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정부가 6자회담 재개나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의 ‘진정성’을 내거는 것은 북한과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본심을 숨기기 위한 레토릭이라는 의심을 살뿐이다. 상호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진정성은 대화나 접촉을 통한 확인의 대상이고 지향하여야 할 가치이지 관계 개선의 출발점이 되기는 어렵다.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대화가 필요하고 접촉이 불가피하다.


    한국정부가 제안했다는 북미대화 및 6자회담 재개에 앞서서 남북한 비핵 회담의 이름으로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을 여는 문제도 곧장 6자회담을 재개하면 될 것을 체면치례를 위해 일을 복잡하게 만들뿐이다. 아마 이명박 정부는 북핵문제를 주제로 과거정부들이 하지 못했던 비핵화 회담을 했다고 선전하며 6자회담 재개 수용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남북 비핵화 회담을 구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너무 구차한 생각이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6자회담 내에서 이루어지는 관련 국가들 간의 회담은 모두 핵 관련 회담이다. 과거 남북 간 회담이나 접촉 역시 모두 남북한 비핵 회담이며 핵문제 관련 접촉이었다. 심지어 남과 북은 남북대화에서도 북핵문제를 다뤄왔다. 특히 9·19 공동성명 도출직전인 2005년 8월 서울을 방문한 북한의 임동옥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남측대표단과의 회담에서는 남북정상회담과 북핵문제 두 가지만을 의제로 다루기도 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국민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길은 6자회담 재개를 둘러싼 기 싸움이 아니라 조속한 6자회담 재개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 답이 있다고 본다.


    둘째,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 북미 관계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북핵문제가 근본적으로 한반도냉전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냉전적 유물로 아직도 해소되고 있지 않은 남북 대결 관계 및 북미, 북일 적대관계와 연동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변화해야 남북관계 개선이 가능하고 북핵 포기가 이루어져야 북미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은 비현실적 일방주의에 가깝다. 특히 북중관계의 변화로 인해 북한에 대한 서방의 지렛대가 급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선북한 변화론의 유용성은 더욱 낮아졌다. 따라서 양자 간 상호작용 속에서 두 문제를 병행해서 푸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는 무엇보다도 북핵 우선론과 남북관계 우선론을 오가는 자기 분열적 자가당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방법은 북핵문제의 진전과 남북관계 개선을 동시에 병행 추구하는 것이다. 즉, 남북관계의 개선이 북핵문제의 해결을 촉진하고, 북핵문제의 진전이 대결적인 남북관계를 완화할 수 있도록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의 진전을 조건없이 병행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도 북미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적대적인 북미관계가 북한 핵개발의 핵심 배경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은 북미관계 정상화를 북핵문제 해결의 사후적 보상으로 인식하지 말고, 북핵포기를 위한 선제적 유인책으로 삼거나 최소한 '행동 대 행동(action for action)'원칙의 핵심 사안으로 북한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이미 2000년 10월 북미공동 코뮈니케를 통해서 북한과의 적대관계 개선을 천명한 바 있다.


    일본정부도 납치문제를 핵문제 해결의 전제로 내세우는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북핵은 동북아 국가들에게 사활적인 안보문제이며 이러한 인식은 일본에서도 보편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도 이에 맞게 과거 납치문제를 북핵문제보다 우선시하며 이를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자민당 시절의 정책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북핵 문제에 집중하고, 북일 관계 개선과 핵문제를 동시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지난 3월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인류에게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새삼 깨우치게 했으며 그로 인해 동북아 국가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원전 건설 반대 여론을 비등시켰다.


    이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재검토는 인류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후쿠시마 원전의 영향을 가장 민감하게 받는 동북아지역에서 이러한 재검토가 공론화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연장선에서 6자회담 참가국들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자제에 동의하고 북한에게 그들이 핵 개발의 명분으로 삼은 자체적인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에 대신하여 대체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을 제기해볼만 하다. 즉, 북핵문제 진전 시 반드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북한에 대한 경수로 제공문제를 비원자력 발전방식의 전력으로 바꾸어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봄직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경수로 발전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여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해왔기 때문에, 대체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논의를 늦출 필요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북한의 수용 여부인데, 북한이 보상을 전제로 한 핵 포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원자력을 고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 포기와 더불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한다면 그 대가로 기존의 북한 원자력 분야 종사자들의 지식과 기술을 전환하여 활용할 수 있는 대체 산업 단지 건설을 약속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이 경우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북한의 원자력 에너지를 포기하는 대내외적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유용한 전범(典範)과 원칙들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서 새로운 합의나 원칙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미 그동안 당사국들이 공들여 만들어 낸 전범도 있고, 논의 진전을 위해 지켜야 할 합의된 원칙들도 있다. 이 전범과 원칙들을 잘 지켜나가는 가운데 추가로 필요한 합의들을 해나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첫째,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핵문제 해결의 전범이 2005년 9월에 공표된 9.19 공동성명이라는데 다시 한 번 합의할 필요가 있다. 9.19 공동성명만큼 관련 국가들이 합의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담은 해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현재 북한과 미국 모두 공개적으로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방법들이 포괄적으로 담겨있으며, 그 해법의 실현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둘째, 북핵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이미 그 한계가 명백히 드러났고 국제역학 관계의 변화로 실효성이 의심되는 대북 봉쇄와 압박을 포기하고 협상과 대화를 통한 해결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9.19 공동성명 발표 직후 단행된 미국의 대북금융제재와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실시된 대북 유엔의 대북제제 조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만 더 부추겼음을 경험하였다. 반면에 어렵지만 합리적인 대북협상과정이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억제하고 북핵문제를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측면이 있음도 경험하였다. 더욱이 지금은 서방이 대북봉쇄나 제재를 단행하고 싶어도 중국의 협조를 얻는 것이 지난한 일이 된 상태이다.


    셋째, 북핵문제 해결에서 “행동 대 행동(action for action)”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준수할 필요가 있다. 이 원칙은 9.19공동성명에 규정된 것으로서 북한과 6자회담에 참가한 미국 등 다른 5개국이 각각 상대방에 대해 합의상의 의무를 동시에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부시행정부의 선핵 포기론이 실패한 전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은 미국과 관련국들로부터 북핵 포기의 대가를 받기 전에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원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유념할 것은 북핵문제에서 미국과 다른 참가국들이 취해야 할 조치들은 가역적(可逆的)인데 반해, 북한이 취해야 할 조치들은 궁극적으로 비가역적(非可逆的)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이 테러리스트 지원 국가 명단에서 북한을 제외시키고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한다든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하는 행위들은 만약에 합의이행과정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깨뜨리면 얼마든지 철회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에 북한의 핵 포기는 일단 그것이 실현되고 나서 다시 재생시키려면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 북한보다는 미국과 나머지 나라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넷째, 미국과 관련국들은 북한과 한 약속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행해야한다. 어떤 경우에도 북한과 한 약속을 지킴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합의사항을 비틀고 싶어하는 북한에게 일탈할 수 있는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은 6자회담의 고비마다 이 중요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예컨대, 미국은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에 관계정상화와 경제적 지원, 경제교역의 확대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명 발표 직후부터 재무부를 통해서 불법거래 혐의로 북한에 대해 전면적인 금융제재를 가했다. 미국의 이 모순된 행동은 6자회담 수석대표들의 서명에 잉크도 마르기도 전에 9.19공동성명의 기본 틀을 뒤흔들었으며, 북한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와 급기야 북한이 핵실험으로 나아가는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9.19공동성명의 이행을 마비시킨 재무부의 조치는 2007년 2.13 합의 이후 미국이 동결시킨 방코 델타 아시아(Banco Delta Asia)의 북한자금을 북한에 돌려줌으로써 의문만 잔뜩 남긴 채 유야무야 끝났다.


    2008년에는 부시행정부가 북한에게 북핵 2단계 불능화 과정을 끝내기 위해 핵 신고에 대한 검증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지만, 정작 그 시점에 일본은 납치문제를 이유로 북한과 약속한 20만 톤의 중유제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서방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상태에서 북한이 합의사항을 지키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맺음말


    지금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각국의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시급한 시점이지만, 상황은 그 반대이다. 미국정부는 여전히 ‘전략적 인내’와 ‘남북관계 개선 우선’이라는 허울에 기대어 사실상 북핵문제를 방치하고 있으며 한국정부는 아예 6자회담 재개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중국만이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이 역시 북중관계의 변화로 인해서 일정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권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응해서 우리도 핵을 개발하자거나 혹은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다시 들여오자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것들이 국가 현실이나 한반도 안보상황을 무시한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의 핵 개발은 도덕적 논란을 떠나서 기존의 한미관계와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한미관계의 파탄과 그로 인한 경제적 압박, 국제사회로부터의 견제, 동북아 안보 정세의 악화 등을 초래할 것이다. 한미동맹 문제는 차치하고 무역의존도 85%인 비정상적 통상국가인 우리의 처지로 볼 때 불가능한 대안이라는 뜻이다. 주한미군의 전술 핵무기 도입도 기본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중국을 자극해서 한반도 안보정세를 악화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남북한의 핵 비대칭 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도 없다.


    여하튼 북한이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이 장기간 재개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전례에 비추어 보면 6자회담이 재개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이번에는 그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는 데, 여기에는 2008년 이후 6자회담 내 한국의 역할변화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2년 10월에 북핵 위기가 발생한 이래로 2007년까지 6자회담 참가국들 간의 역할구도는 미국과 북한을 대립 축으로 하여 의장국인 중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고 한국이 교착국면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관계 국가들을 설득하는 촉진자(facilitator)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은 중국만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할 뿐 한국의 촉진자적 역할은 소멸되었다. 대신에 한국은 6자회담 재개에 전제조건을 내걸어 결과적으로 상황진전을 가로막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소극적 대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정부의 이러한 부정적 역할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라는 중대한 국익을 훼손할 위험성마저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북핵 포기라는 관점에서 북핵문제를 다룰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조속히 자신의 촉진자적 역할을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서 미국이 대북협상에 적극 나서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중국과 긴밀히 협력하며 상황진전을 위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만약 정부가 이러한 역할 부활을 위한 노력을 거부한다면 국민의 강력한 요구를 통해서라도 이를 실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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