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10주년 기념식 - 특별강연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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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1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한반도 미래
2000년 6월 15일에 평양에서 발표된 남북공동성언은 한반도 지역의 현대사 위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일이었다. 흔히 1945년 8.15 해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구분하는 한반도 지역의 현대사는 불행하게도 남북 분단과 대립의 역사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분단시대의 역사는 바로 남북사이의 전쟁으로, 나아가서 유엔군과 중국군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3년여의 전쟁 끝에 휴전이 되었지만 그 휴전상태가 반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다.
흔히 한반도 지역의 남북분단은 3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그 첫 단계는 1945년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도선의 획정으로 인한 국토의 분단이며, 그 둘째 단계는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인한 국가의 분단이며, 그 셋째 단계는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인한 민족의 분단이다. 수천 년 동안 동족으로 살아온 한반도의 남북주민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이제는 동족이 아닌 적이요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6.25전쟁 후 한반도의 남북주민들이 동족이 아닌 적으로 살아온 지 꼭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지역 남북주민들의 상호관계를 적대관계로부터 다시 동족관계로 되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가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이며, 이 선언으로 인해 반세기동안 싸우고 질시하고 대립하던 남북관계가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고 내왕하는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수천 년 동족이었다가 반세기 동안이나 적이 되었던 한반도의 남북주민들을 다시 동족으로 만든 6.15 남북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둘째로 6.15 남북공동선언은 반세기 이상 분단되어온 한반도 지역에서 ‘한반도식 통일’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대전 후의 세계사 위에서 분단된 대표적 지역으로는 한반도와 독일과 베트남을 들 수 있었다. 그 중 한반도와 베트남 두 지역에서 전쟁통일이 기도되었고 베트남은 통일되었으나 한반도는 전쟁통일이 되지 않았다. 두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문제의 차이가 그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또 하나의 분단국가 독일은 이른바 흡수통일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흡수통일도 불가능했다. 흡수통일과 전쟁통일이 방법은 다르다 해도 그 결과, 즉 흡수한 쪽이 흡수당한 쪽을 지배하게 되고 흡수한 쪽의 체제가 흡수당한 쪽에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은 전쟁통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베트남식 전쟁통일도 독일식 흡수통일도 불가능했던 한반도 지역에서는 ‘한반도식 통일방안’이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협상과 타협과 조정의 방법에 의해 통일을 모색하는 길이었다고 하겠는데,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에 의해 이 같은 한반도식 통일방안이 실천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베트남식 전쟁통일도 독일식 흡수통일도 아닌 한반도식 ‘협상통일’이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베트남식 전쟁통일은 사이공이 함락됨으로서 바로 이루어졌고 독일식 흡수통일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짐으로서 그날로부터 실현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식 ‘협상통일’은 그렇게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니며 긴 과정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곧 한반도식 협상통일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또 후속정권의 정책에 따라 그 진행이 다소 지체될 수는 있다 해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한반도식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6.15 남북공동선언은 구체적으로 종래 한반도의 남북 두 분단국가들이 각기 평화통일방안 및 협상통일방안으로 제시했던, 그러면서도 두 통일방안의 합치점을 이루지 못한 채 오래 동안 대립하기만 했던 국가연합통일방안과 연방제통일방안의 합치점을 구함으로서 한반도식 통일방안 자체를 한층 더 진전시킨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6.15 공동선언은 현명하게도 종래 북측이 내세웠던 연방제통일방안의 단계를 낮춤으로서 남측이 내세웠던 연합제 통일안과의 합치점을 구한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분단시대 한반도의 남북 분단국가들이 각기 주장한 평화통일방안의 합치점을 처음으로 실현한 선언이었다 할 것이다. 통일방법론의 합치야말로 평화통일의 출발점 그것이기도 했다.
넷째 6.15 남북공동선언은 당연하게도 좁게는 동아시아의 평화, 넓게는 세계평화의 정착에 크게 이바지한 서언이었다. 한반도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리고 6.25전쟁 후에도 계속 ‘극동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세계에서도 전쟁위험이 높은 곳의 하나로 알려졌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분단된 한반도지역의 남북이 계속 불화와 대립상태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기 그 배후에 국제세력을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은 냉전시대를 통해 동아시아 및 세계 분단의 하나의 초점이기도 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동아시아분단, 세계분단의 핵심의 하나였던 한반도분단을 평화적으로 해소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세계사는 바야흐로 지난 20세기적 냉전시대를 극복하고 21세기의 탈냉전 평화주의시대를 지향하고 있다. 20세기적 냉전의 초점의 하나였던 한반도지역에서 남북문제를 화해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생산되었다는 것은 이제 ‘극동의 화약고’라는 오명을 씻고 전체 한반도 주민들로 하여금 21세기 세계평화주의 실현의 주역으로 행세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거사였다 할 것이다.
지난 20세기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동서냉전이 계속되었던 세기였던데 비해 21세기는 세계사가 지역공동체 발달을 통한 평화주의 정착을 지향하고 있다. 6.15 공동선언을 성사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아시아공동체 문제에도 관심이 컸고 그 성립을 위해 노력한 정치인이었다. 동아시아공동체가 성립되고 발달하려면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평화통일이 불가결한 요건의 하나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다섯째로 6.15공동선언은 21세기 세계사적 지향의 일환으로서의 동아시아지역공동체 발달을 위한 하나의 기초 작업이 되었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사가 직선으로만 나아가지 않기도 한다. 인간의 역사가 직선으로만 나아갔다면 그 많은 희생을 바친 역사가 아직도 이 단계에 있겠는가. 인간역사의 진행에는 정체도 있고 요철도 있고 지그재그도 있게 마련이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역사 위에도 분단 상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정치세력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분단 상태를, 남북대립상태를 유지해야만 그 정치적 입지가 강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정치세력도 있을 수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역사의 이상은, 인간역사의 기본방향은 궁극적으로 이 지구덩어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평화공동체로 만들어 가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역사의 전체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문민정권이건 군사정권이건 반민주주의적 반평화주의적 성향의 정권은 역사의 엄정한 신판을 받게 마련이었다.
바야흐로 21세기에 들어선 한반도의 경우, 남북문제 민족문제를 호혜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함으로서 ‘화약고’의 오명을 씻고 세계사적 지향인 지역공동체 발달에 공헌하는 것이 역사의 길인지, 지난 20세기적 냉전 상황, 즉 대립과 분쟁상태를 그대로 견지하는 데서 정권의 존재이유와 권익을 유지하는 것이 역사의 길인지 냉철히 생각해 봐야 한다.
전 세계의 양심세력이 한결같이 지지한 6.15남북공동선언이 그 10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그 기능과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된다면, 한반도 지역은 불행하게도 인류사적 여망을 외면하고 지난 20세기적 냉전체제를 유지하려는 21세기 세계사의 하나의 후진지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지난 세기를 통해 분단과 상잔으로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 불행한 역사를 겪어야 했던 한반도 지역 전체주민의 투철한 역사의식이 요구되는 시점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