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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주년 노벨평화상 13주년 기념 - 특별강연 - 와다 하루키 | 도쿄대학 명예교수

    본문

     


    오늘 동북아시아 위기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걸쳐 한반도에 생긴 위기다.

    1987년 6월 대한민국〔이하 ‘한국’=역자〕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시작됐고, 미소냉전이 끝나면서 소련 체제가 격변했다. 한국에서는 노태우 정권이 소련과의 국교수립을 노렸다. ‘신사고외교(新思考外交)’로 방향을 잡은 소련은 북한과의 사회주의적 동맹관계를 재검토하고 1990년 9월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나아갔다. 그 결과 북한은 소련의 핵우산을 잃게 됐고 동시에 소련과의 특혜적 무역관계를 상실했다. 그리고 북한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와 안보 상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45년에 일본 전쟁이 끝난 후 동아시아에서는 신(新)아시아 전쟁이 30년 동안에 걸쳐서 지속됐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오랫동안 일본 전쟁 시대의 청산을 요구하지 못 했다. 1972년 일중공동성명을 통해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됐고 냉전 종식이 이뤄지면서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1990년, 한국은 ‘위안부’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한일관계는 새로운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한의 이중적 위기, 한일관계의 긴장―이것이 1990년 지역적 위기의 두 가지 요소였다. 이 위기적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북한은 세 가지 방책을 택했다. 첫째는 남북의 접근, 즉 남북고위급회담의 개최이며, 둘째는 자력으로 핵무기를 생산함으로써 소련의 핵우산 상실을 커버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본과의 국교수립, 나아가서는 미국과의 국교수립이었다. 첫째, 셋째 방책과 둘째 방책은 모순되고 있어서 동시에 실현시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맨 처음에는 첫째와 셋째 방책이 선행되었다.


    일본 안에서는 1980년대에 식민지 지배의 반성과 사죄에 대한 국회결의를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990년 9월 카네마루(金丸)・타나베(田辺)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이 방북을 준비했다. 자민당의 전 부총재 카네마루 신(金丸信)은 평양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고 북일국교협상 개시를 실현시켰다. 협상은 1991년 1월에 시작했지만 납치문제와 미국에서의 핵개발에 대한 반발로 인해 1992년 11월, 제 8차 협상을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은 소련에 이어서 1992년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했다. 1991년 9월 남북 양국의 유엔 가입은 실현되고 남북고위급회담으로 1991년 12월에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도 조인되었지만 북한은 일본, 미국과는 국교를 맺지 못한 채였다. 교차승인(Cross Recognition) 방식이 절반밖에 실현되지 못 하고 한반도는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93년과 94년에 북한과 미국 간 핵사찰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전쟁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까지 진행됐다.


    같은 시기 일본정부는 한국의 ‘위안부’문제 제기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응해서 1993년 코노(河野) 관방장관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1995년 8월에는 무라야마(村山) 총리 담화가 발표되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입은 손해와 고통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표명되었다. 전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국가가 역사인식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죄와 속죄(atonement)의 국민적인 사업을 시행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무라야마 총리가 퇴임한 이후에도 자민당 총리에 의해 코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는 유지되어 아시아여성기금은 계속 활동했다.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에 대해서는 한국과 대만에서는 일본정부의 책임회피라는 비판이 쏟아지며, 피해자들에 의한 수급거부도 일어났으나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서는 기본적으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동안의 북미 간 위기는 1994년 6월 카터 방북에 의해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되어 1994년 ‘북한과 미국 간에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米朝枠組み合意 Agreed Framework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 성사됐고,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KEDO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봐온 김대중은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북정책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서해에서 충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동요하지 않고 이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우선 1998년 6월 미국을 방문해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구했다. 더불어 동년 12월에는 일본을 방문해서 일본과의 관계를 조정했다. 무라야마 담화를 인정하고 한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는 아시아여성기금 이상의 조치를 요구하지 않고 이것을 받지 않는 피해자에게는 한국정부가 지원금 300만엔상당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본문화 개방으로 향했다. 이런 식으로 화해연대를 진행시키면서 일본정부에 북일관계 개선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한 준비를 바탕으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정삼회담을 실현시켜서 6.15 선언을 맺었다. 이것은 남북관계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정책은 아니지만 남북관계의 화해를 향한 전환이 북미, 북일의 관계 정상화로의 전환을 이뤄내고 그것과 연결함으로써 커다란 진전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2000년 10월 클린턴 정권은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인 조명록(趙明祿) 국방위원회 제일 부위원장의 방미를 받아들이고 대통령의 방북 초대장을 받았다. 같은 달에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국무장관이 방북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실현됐더라면 북미 관계 개선의 불가역적인 진전이 이뤄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치명적인 차질이 생겼다.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고어(Al Gore) 후보가 공화당 부시(George W. Bush) 후보에게 패했기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2001년 9월부터 북한과 비밀리에 협상을 계속 진행해왔다. 2002년 9월 고이즈미(小泉) 수상이 드디어 방북해서 평양선언을 발표하며, 북일국교정상화를 향한 신속한 진전을 약속했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에 의해 촉구되어 성취한 성과였다. 회담 중 고이즈미 수상은 ‘이 지역의 신뢰를 양성(釀成)하기 위해서 6자 협의에 의한 대화의 장이 정비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했으며, 김정일 위원장은 그러한 ‘대화의 장에 참가하는 준비가 돼 있다’고 응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수상의 노력은 곧바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나는 일본 안에 있는 음모적인 움직임 탓이며, 또 하나는 미국에서의 북한 핵개발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기도 하다.


    남북 화해에 이어서 북일국교정상화가 진행된다면 6자 협의라는 장도 만들어질 것이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도 외교적으로 해결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위기 극복의 전망이 보였던 순간이었다. 그 길을 갈 수 있게 된다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1980년대 말부터 생긴 위기를 타파할 길도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북아시아 협력이 유례없는 차원까지 높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2002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후계자가 된 노무현이 200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동북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강조하며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실현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달성될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시대위원회를 설치하고 문정인 선생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준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 제안에 확신을 얻고 2003년 8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 신지역주의 선언(東北アジア共同の家 - 新地域主義宣言)』이라는 책을 썼다.


    “지역은 자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지역들을 연결한다고 해서 세계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하나의 지역을 자신의 인식 대상으로 삼거나 자신이 속한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지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서 나는 ‘동북아시아’를 생각했다. 지리적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동북아시아에는 러시아, 중국, 북한, 한국, 일본, 몽골이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안전보장 문제 해결, 평화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미국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미국을 포함해서 7개국으로 동북아시아를 바라봤다. 지리적으로도 이 사고방식은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시도로서 나의 책에는 동북아시아 전도(全圖)를 실었다.


    지역을 묶어서 공동의 집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중심이 필요하다. 한반도, 한국이 중심에 서겠다고 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내세운 개념이지만 더불어 나는 이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조선족, 한민족이 지역을 연결하는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이 지역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 지역에 있는 큰 섬의 네트워크이다. 일본열도를 제외하면 타이완, 오키나와, 사할린, 쿠릴열도 그리고 하와이가 있다. 이들 섬에 사는 사람들도 동북아시아를 연결시켜줄 것이다.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은 안전보장의 층(floor)에서 건설을 시작해서, 이어서 환경보호의 층으로 가고, 그 다음에 경제의 층으로 진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진, 쓰나미, 수해 등 긴급사태에 대처하는 협력체제나, 원자력의 안전성과 폐기물의 처리에 대한 고찰이나 대처법도 공통된 과제이다.


    동북아시아 공동체라는 꿈이 논의되었을 때에 발맞춰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한 6자 협의가 현실화되었다. 중국, 미국, 한국의 움직임이 북한도 끌어넣는 것에 성공하여, 2003년 8월 6자 협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회의도 난항을 겪었다. 진전이 보였던 것은 2005년 9월 19일의 협의를 통해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던 일이다. 그것은 장래 문제해결에 도달한 경우에 실현될 것을 열거한 꿈의 프로그램, 즉 희망의 청사진이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포기한다. 미국은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모든 국가는 유엔헌장과 국제 규범을 준수한다. 북미는 국교정상화를 실행한다.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에너지 지원을 약속한다. 6자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한 공동노력을 약속하며, 한반도의 평화체제에 대한 관계자 협의를 포함해서 ‘동북아에서 지역의 안전보장에 대한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방책’에 대해서 탐구한다.”


    위와 같은 내용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이 공동성명은 실현되지 않고 6자 협의도 폐회된 채로 있다.

    냉전의 종언에서부터 오늘까지의 25년 동안은 희망에서 환멸로, 전진에서 후퇴로 오가는 역류가 부단히 소용돌이치고 흘러나가는 역사였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위기 극복이라는 점에서는 그야말로 잃어버린 25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남북정상회담에서부터 조명록-올브라이트 상호방문과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 방문, 북일 평양선언까지는 뚜렷하게 연속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시아 공동체 제기와 6자 협의의 9.19 공동성명은 고립된 두 개의 점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오늘 동북아시아의 위기에 맞서는 체계적 정책 프로그램의 중요한 구성요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이며 일관된 남북화해를 향한 제스처(gesture)와 정책, 북미, 북일관계 정상화의 중단 없는 진전을 촉구하고, 그것이 성공한다면 6자 협의로 동북아시아 안전보장의 틀을 구성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북아시아 공동의집, 공동체를 지향해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김대중 시스템이며, 김대중 대통령이 남겨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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