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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이희호 여사 생애(민주화 운동과 평화 활동)
이희호 여사는 1922년 9월, 부친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의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부친은 우리나라 의사면허 4호로 전북 남원 도립병원장과 경기 포천 도립병원장을 지냈다. 어머니 이순이씨는 한의사집 가정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 여사는 모태신앙인이 됐다.
이화여고, 이화여전을 다녔으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이화여전 졸업을 하지 못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다시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적을 옮겼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이 여사는 미국 스칼렛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 ‘Foolish’라는 연극을 했는데 내가 시나리오 쓰고, 주연하고, 연출도 다 했다. 나는 항상 웃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학우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던 이의호 여사는 국단 부대장으로 사범대생 800명 앞에서 호령을 하기도 했으며 총학생회에서는 사범대 대표를 맡았다. 강원룡 목사는 ‘내가 만난 이희호’(1997년)라는 책에서 “어느 대학에서 강연 후 학생들과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그의 차례가 되자 “히히호호” 하며 크게 웃는 것으로 ‘희호’라는 이름을 소개했다”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의 이 여사는 이처럼 재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여성리더였다.
DJ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 여사의 인생행로 전체를 흔들어버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71년 대선 패배 이후 남편은 최고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었고, 이 여사의 인생에도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같은 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되었다. DJ의 망명·납치·구금·연금 등이 이어졌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계속됐다. 이 와중에 DJ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됐다.
77년 정월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자 이 여사는 1년 가까운 석방투쟁과 정치활동, 가장으로서의 책무에 시달리면서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짓눌렸다. 건강도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키 172㎝에 몸무게 43㎏.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도지는 관절염은 그녀의 마른 다리를 괴롭혔다. 이 여사는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손에 쥔 채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면서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은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독재와 싸우는 조국의 지도자와 동지로 변해갔다. 이 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차입하는 옷은 속옷까지도 다려 넣었다.
그녀의 내조 중에서도 남편에게 격려가 되었던 것은 편지였다. 이 여사는 DJ가 옥중에 있을 동안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가정사 외에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 남편의 투쟁에 대한 격려 등이 담겨 있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남편이 요구한 책 외에 자신이 직접 고른 서적 1~2권을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여사의 편지는 남편은 물론, 이 여사 자신의 내일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이 여사가 이때 쓴 편지는 98년 <내일을 위한 기도>(여성신문사)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여사는 87년, 92년 대선에서 남편이 연거푸 패배하자 무척 상심했다. DJ가 97년 대선 4수를 결심했을 때도 두말없이 다시 운동화 끈을 잡아맸다. 이를 두고 한 지인은 “김대중 정권 지분의 40%는 이 여사의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ㆍ사회 운동가였던 이 여사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행정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장관들 임명장 수여식 때는 부부가 동반해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관행이 저절로 생겨났다.
이 여사가 영부인이 된 후 가장 먼저 가진 직책은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의 명예회장이었다.
‘사랑의 친구들’이 발족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 여사는 국내 기부시장의 사정을 알아봤다. 강원룡 목사에게는 퍼스트레이디가 여성들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것이 타당한지, 정치적 후유증이 없을 것인지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여성재단’이다. 99년 한국여성재단이 발족하자 이 여사는 한국여성재단 명예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 여사의 가장 뚜렷한 업적 중 하나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독자적인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이 여사의 해외방문은 총 5차례로, 2001년도를 제외하고 매회 1회 이상 단독 해외순방에 나섰다. 이 여사는 특히 역대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2년 5월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 의장국으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여사는 재임 중 소록도를 두번 방문했는데 육영수 여사 이후 영부인으로는 처음 찾는 것이었다. 이 여사의 소록도 방문을 계기로 소록도에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여사는 경호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원 재소자들과 이들의 부모를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또한 소년원을 영어와 컴퓨터 등의 특수교육을 하는 정보특화학교로 변모시켰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키며 퇴임후 활동을 도왔다. 현재도 꾸준히 불우이웃돕기와 기부운동을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김대중 평화센터의 이사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날은 분명 격정의 세월이었지만, 김대중은 다시 하의도의 소년이 되어 멀리 보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고 있다. 세계인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