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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김대중 대통령 주요저작(회견)
 
계간지 《역사비평》인터뷰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946  
계간지 《역사비평》인터뷰
o 일시 : 2008년 7월 3일 오전 10시 30분
o 장소 :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o 대담 : 박명림『역사비평』편집위원(연세대 교수)
박명림 : 김대중 전 대통령님 안녕하셨습니까. 올해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역사와 현실에 대해 비판적 정론을 추구해온 계간 『역사비평』은 대한민국 60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 인터뷰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바쁘신 가운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국민과『역사비평』독자들에게 주시는 인사말씀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김대중 : 저는 국민 여러분의 염려와 사랑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역사비평』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너무 어려운 질문을 보내와 시험 치르느라 무더위 속에 아주 혼났어요. (웃음) 경제도 어렵고, 에너지, 남북문제, 국제관계가 모두 어려워,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걱정이 아주 큽니다. 최근의 촛불시위도 주목해서 보고 있습니다. 시위의 참여자 며 양상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아요. 박 교수는 이번에 촛불시위를 어떻게 봤습니까?
‘잃어버린 10년’담론: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출발
박명림 : 정치학도이자 한 시민으로서 저도 몇 번 시위에 나갔었는데요. 현 장에서 보니까 정권교체 이후 예상보다 너무 급격하게 보수화, 탈공공화 가 추진되면서 국민들이 느낀 집합적 삶의 위기감과 두려움이 표출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실질적 삶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대통령 도 보수후보가 된데다가, 국회도 보수세력이 과대 대표되고 진보개혁세력이 과소 대표되었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거나 삶을 보 호해줄 이가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국민들이 자신의 요구를 직접 주장하고 표출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단지 경제 정책뿐만 아니라 남북관계나 국제관계, 민주주의 등 모든 게 역전이 되고 있어서, ‘ 선진화 원년’이 아 니라 마치‘ 후진화 원년’인 것 같습니다.
김대중 : 동의합니다. 지금 이명박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잃어버린 10년’ 이라는 생각에 있는 것 같아요.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그 전에 한 걸 잃어버렸으니 다시 옛날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국민들이 볼 때 는 위기의식이 생기거든요. 우리가 떠올리기도 싫은 그런 권위주의시대가 다시 오는 거 아니냐, 이거 민주주의의 위기 아니냐, 공포정치라든가 재벌 중심경제, 소외층 도외시, 남북대립 등이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다 대운하나 학교, 의료 등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지 않습니까. 쇠고기 문제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촛불시위를 보면, 누가 따로 선동한 것도 아닌데 평범한 국민들이 유모차 끌고 나오기도 하고, 노인도 나오고, 학생들도 나오고 하는 모습이에요. 그 사람들이 생각을 한 방향으로 정리해서 제시하고, 그걸 비폭력적으로 주장하고, 인터넷을 통해 활발히 토론하고 하는 걸 보면 우리 국민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는 정치가 이런 대중들과 NGO들이 함께 뭉쳐서‘시민세력’이라고 할까, 직접민주주의세력으로 결집하고 이들이 의회정치와 연계하는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의 아주 큰 희망을 봅니다.
박명림 : 남북관계의 역전을 말씀하시니까 대통령님과 관련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2005년 한국이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일 때인데, 독일 현지에서 양국의 저명한 학자, 문인들을 모시고 한독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 학술회의의 한국 측 기획위원장으로서 조직책임을 맡았는데,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님을 기조연설자로 초청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막판에 두 분 모두 건강 때문에 참석을 못하시게 되어 우리 측은 이홍구 전 총리로, 독일측은 겐셔 외상으로 바뀌게 되었지만요. 당시 현지에서 겐셔 외상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독일 통일의 주역 중 한 명인데, 통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한국 국민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때 겐셔 외상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콜 수상이 진보에서 보수로의 정권교체에
도 불구하고 브란트 정부 이래 동방 정책의 기본원칙을 이어받은 것이 독일 통일의 근본 원인 중 하나라고 하면서‘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더군요. 결국 국내 내쟁을 넘어서 온건 포용 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하는 데 한국의 통일 여부가 달려 있을 것이라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자신들도 준비부족으로 통일 이후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한국은 국제관계를 포함해 더욱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첨언하더군요.
김대중 : 나도 독일 통일하고 얼마 안 돼서, 그때가 199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바이체커 대통령을 독일 본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바이체커 대통령은 내가 말하는 햇볕 정책, 3단계 통일론 같은 것들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했어요. 독일은 결국 거기에 실패했다고 말이죠. 자신들은 불 가피한 상황에서 너무 급속하게 원치 않는 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 주변 국가들이 통일을 반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너무 서두르니까 결과적으로 베를린장벽은 허물어졌어도 마음의 장벽은 그대로라서, 갈등이 심하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햇볕 정책과 3단계 통일론은 반드시 지켜나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통일 문제는 사전준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부 수립 60년의 대한민국: 위대한 성취
박명림 : 그럼 이제 준비한 질문을 차례로 여쭤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통령께서는 전직 대통령 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두분으로 평가받고 있고, 특히 생존해 계신 대통령 중 국내외적으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대한민국 60년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내신 분으로서 소회와 느낌이 있으실것 같습니다.
김대중 : 한마디로 말해 지난 60년은 신라 통일 이래 유례없는 시련이 중첩
된 시기였는데, 우리 국민이 끈기와 저력으로 이것을 극복해냈다고 봅니다. 시련만 극복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전을 통해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낸 60년입니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국민이 큰 역량과 저력을 발휘해서 세계무대에서 주목받는 나라를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먼저 1945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미․소가 이 땅을 분할 점령했고, 곧 좌우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남과 북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었지요. 분할선 이남에는 이승만 박사 중심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는데, 친일파를 처리하지 못해 거기서부터 많은 문제가 틀어지게 되었어요. 그 뒤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벌어지고 독재가 이어졌지요. 4,19 이후 잠시 민주당 정부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곧이어 박정희․전두환의 참혹한 독재가 오래 계속되었어요. 그러다가 끝내 광주학살을 포함한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학살행위로 이어지고…. 당시 정치적으로는 독재체제가 완전히 자리잡았고, 언론이 어용화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 위에 재벌이 비대해지고 있었어요. 그런 한편에서는 점차적인 노동운동이나 여권운동의 신장도 있었지요. 노동운동이 확산되며 노동자의 정치참여도 크게 늘었고요. 남북관계를 보면 냉전체제가 고착된 가운데 동서 대결구도를 앞세우는 그런 시대였지요.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 젊은 학생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저항하고 목숨을 바치고 투옥․고문당하고, 그러면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 투쟁해서 결국 독재자가 굴복했습니다. 1997년을 계기로 건국 이래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했습니다. 경제발전에 이어 민주화의 위업을 성취해낸 것이지요. 많은 진척이 있었습니다. 일례를 들면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또 여성부도 설립되고요.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가 주어지고, 많은 과거사에 대해서 진상규명이 시작되어 억울한 이들의 누명이 벗겨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결국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을 계기로 이제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독재자도, 어떠한 군부도 민주주의를 뒤집을 수 없는 그런 국민의 힘이 형성됐다고 봅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성취해낸 우리 국민들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정권 사람들은‘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처럼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이루어진 이 엄청난 변화, 크게 성장한 국민의 힘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과거로 돌아가려 하고 있어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결국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간다는 얘기잖아요? 그런 것이 지금 촛불시위 앞에서 저항을 받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한민국의 지난 60년은 우리 국민이 전무후무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걸 극복하고 이 나라를 세계적인 모범국가로 세운 시간이에요. 2차대전 이후 독립한 150여 개 신생국가 중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모두 성장시키고 사회정의도 어느 정도 확대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에요. 중국도 아직 민주주의 안 하잖아요. 일본도 말하자면 과거 복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잖아요. 다른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물론 우리만 잘났다, 우리만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해야 할 일들은 대개 성취해냈다는 것, 그리고 21세기에 잘하면 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건국 60년을 맞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의 한국 문제와 남북관계
박명림 : 저는 연구자 입장에서 한국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많은 외 국 학자나 언론인들에게 물어보곤 합니다. 해외 방문도 꽤 자주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도 방금 말씀해주신 것처럼 한국이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게 된 근본 동력이 무엇이냐, 건국부터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까지 선진국들도 수세기에 걸쳐 오랫동안 추구해온 것들을 한두 세대 안에 단박에 이뤄낸 힘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며 함께 심층 연구를 하자고 합니다.
그럼 조금 구체적인 문제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기존의 대북 온건 정책과 한국의 국제관계가 크게 흔들리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권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가 아니라 국제적인 평가인데요. 유럽과 미국의 학자나 언론인들을 만나면, 독일 문제의 근본 성격을 바꾸어놓은 사람으로 브란트를 꼽으면서 이에 비견되는‘아시아의 브란트’는 김대중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햇볕 정책으로 한국 문제의 성격을 바꿔놓았다는 것이지요. 햇볕 정책의 창안자로서 지금 남북 문제나 한국의 국제적 위상 약화 등을 어떻게 진단하고 계시는지, 또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김대중 :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햇볕 정책이라고 말은 안
해도 결국 햇볕 정책을 수용할 거라고 봅니다. 그분이 대통령 후보로서 나를 만나러 왔을 때도 햇볕 정책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어요. 또, 공교롭게도 지난 4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이 나하고 같은 시기 에 미국에 갔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자리에 참가했던 보스워스 전 주한미대사가 하는 말이, 이명박 대통령이 햇볕 정책이라고 말만 안 하지 내용은 똑같은 소리를 하더라는 거예요. 나도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직 일관성이 없어요. 자꾸 흔들리는 것 같아요.
지금은 남북 문제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아주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시기 아닙니까? 탈냉전 이후 최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미관계만 봐도 그렇고요. 이것은 양쪽 다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미국하고 할 것은 해라. 당신들 국가 안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미국과의 관계 형성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럴 생각만 있으면 내가 클린턴 대통령하고 당신 사이에 중재를 하겠다고요. 그랬더니 김정일 위원장은 심지어 미국이 한반도 통일 이후를 주도해야 한다고까지 합디다. 구한말 우리를 병탄하려했던 러시아나 중국,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얘기에요. 미국이 북한을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미국하고 손잡을 의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클린턴 대통령한테 얘기해서, 북미 고위층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조명록, 그리고 올브라이트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수도를 왔다갔다했지요. 그런데 결국 클린턴 임기 내에 매듭을 못 짓고, 부시 정권 시기에 북미 관계가 완전히 후퇴해버렸습니다.
부시는 기본적 입장이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 아니었습니까. 클린턴이 한 건 다 안 된다면서 뒤집어버렸죠. 그렇게 6년을 한 결과가 어땠
느냐. 참담한 실패였어요. 북한이 NPT를 탈퇴했습니다. 그리고 IAEA 요원을 추방했어요.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어요. 마침내 핵실험까지 했어요. 핵보유국가가 되어버렸어요. 부시가 6년 동안에 북한을 그렇게 키워버린 겁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나니까 부시로서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건 전쟁이죠. 그런데 전쟁할 힘이 없잖아요. 중동에 발이 묶여 가지고. 그러니까 결국 6년 만에 내가 그렇게 부시를 붙잡고 설득하던 그 길로 돌아온 거예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길이란 게 뭡니까. 북한과 직접 대화해라. 기브 앤 테이크로 하라는 거죠. 부시는 그 전까지 나쁜 놈하고는 대화할 수 없다, 악을 행한 자에게 보상을 줄 수 없다고 했거든요. 그러는 동안에 북한이 NPT 탈퇴하고 IAEA 요원 추방하고 장거리미사일 발사하고, 핵보유국가가 되어 핵실험까지 하는 상태까지 오니까 이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달리 길이 없어요. 대화하는 길뿐이잖아요. 대화하고,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행동 대 행동,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한 변수는 중국이에요. 미국은 항상 중국의 위협을 염두에 두고 견제하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중국 편이 되면 상황이 중국에 아주 유리해집니다. 그런데 북한이 지금 미국 편이 되겠다,‘ 친미국가’가 되겠다는 거잖아요. 말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나오고 있거든요. 지리적으로만 보더라도 중국 국경 옆에 있는 북한이 미국에 기울면 그 만큼 중국에 대한 견제가 됩니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반도를 타고 내려와 남한과 일본을 위협하는 걸 막아줄 수 있죠. 이런 이점들이 있어서 북미관계는 급격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북미관계가 좋아지니까 일본하고도 점점 좋아지고,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국교 정상화를 바라보고 있지요.
6.15공동선언, 10.4공동선언의 인정 - 올바른 실용주의의 시작
박명림 : 말씀을 들으며 한반도가 지금 아주 결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김대중 : 그렇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노심초사해가면서 만들어놨는데, 문제는 이게 지금 딱 정체되어버렸다는 거예요. 빨리 풀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내가 볼 때, 결국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해요. 뭐냐면,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는 북한의 김정일이 남한에 대해서 직접 서명한 유이한 문서예요. 북한에서 김정일의 서명이 얼마나 신성한 의미냐는 것은 말할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풀릴 수가 없어요. 두 선언을 인정하고, 쌀과 비료를 포함한 인도적 지원은 빨리 재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두 선언을 인정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고 쌀과 비료를 주게 되면 북한은 내심 감사하게 생각할 겁니다. 우리가 비료 30만 톤을 보내주면 북한은 식량을 30만 톤 이상 증산할 수 있어요.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북한은 내심으로는 간절하게 받고 싶겠죠. 그런데 북한은 죽어도 자존심은 안 버리는 나라 아닙니까. 과거 소련하고 중국하고 싸울 때를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문제를 풀려면 지금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빨리 해야 해요. 이게 늦으면 미국 식량이 들어갈 거고, 중국에서도 들어갈 겁니다. 러시아도 주고 있고요. 일본이 합의되면 또 몇십만 톤 들어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북한이 우리도 남한 비료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올 수 있어요. 우리만 고립되는 겁니다.
또 중요한 문제가 개성공단입니다. 개성공단에 2차 공장들까지 입주하게 되면 35만 노동자가 일하게 돼요. 엄청난 대공단이 되는데, 지금 우리가 안 들어가니까 북한에서는 불만이 많거든요. 그런데 중국이 자꾸 와서 기웃기웃한단 말이에요. 북한에서 오케이만 하면 중국은 곧 들어갑니다. 현재는 아직 그럴 가능성이 낮지만, 잘못하다간 개성공단을 뺏길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가 북한을 볼 때 흔히 가난한 사촌을 보듯 귀찮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잘못이에요. 북한이 가난한 건 사실이지만, 엄청난 경제적 잠재력이 있습니다. 텅스텐, 마그네사이트, 우라늄, 금, 동, 석탄, 이런 것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어요. 지금 거기 눈독을 들여 중국이 덤벼들고 있고,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웨덴 모두 덤비고 있어요. 이미 들어가 있는 곳도 많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 기업들도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있다고 해요.
이게 사실은 우리가 제일 좋은 조건이지 않습니까. 요즈음 말로 실용주의, 이거 사실 내가 60년대부터 반복해서 쓰던 말인데 저작권 내야 할 것 같아요. 다만 진짜 실용주의를 하면 저작권료를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웃음) 그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아도 이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북한과 거리 가깝죠, 말 통하죠, 같은 민족이죠. 우리가 제일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중소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했다가 못 견디고 나오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갈 데가 어디 있어요. 남한에서도 안 되는데. 결국 북한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지금 못 가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 남한의 중소기업들이 북한으로 가야 해요. 그래서 북한도 좋고 우리도 좋은 윈-윈의 경제협력을 해야 해요.
그리고 그 외에도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어요. 우리 한국을 ‘한반도’라고 하잖아요. 반도라면 육지도 가고 바다도 가야죠. 그런데 우리는 바다는 가지만 육지는 못 가요. 그건 반도가 아닙니다. 반도가 아니니까 어떻게 됩니까. 북한을 못가니까 시베리아, 몽골도 못 가고 중앙아시아도 못 간단 말이에요. 이 지대는 지하자원의 보고예요. 지금 중앙아시아 같은 경우는 한참 자원 개발붐이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그곳엘 가야 하는데 못 가고 있는 거예요. 또 있죠. 유라시아대륙을 거쳐서 파리나 런던까지 기차가 갈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면 물류비와 시간이 각각 30% 정도 절약돼요. 우리 경제가 도약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통한 진출은 한계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이제 육지가 중요한데, 그게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안 되고 있어요. 국익의 관점에서도 정말로 실용적 접근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은 북한이 우선 식량이나 비료를 지원받고 싶어 하는 게 크지만, 조금만 지나면 북한도 더 발전하게 될 겁니다. 북한은 지하자원뿐만 아니라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합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군대에서 6~7년씩 훈련받은 이들이죠. 아주 우수하고 가치 높은 노동력입니다. 여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 중국이나 유럽 나라들이에요. 우리가 이걸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태 우리가 북한에 무조건 퍼주기만 했다 어쨌다 하지만, 지금 남북관계가 얼마나 평화로워지고 긴장이 완화됐습니까. 예전에는 판문점에서 총소리 한 방만 나도 도망갈 준비를 했는데, 지난번에 보세요. 핵실험을 해도 끄떡도 안하잖아요. 그렇게 안정이 됐거든요. 북한의 민심도 바뀌었어요. 남쪽을 원수로 생각하고 남쪽 사람들은 인정도 없고 민족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비료도 주고 식량도 지원하니까 그 사람들 마음이 바뀔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쪽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동정하고 있구나, 남쪽이 잘살고 있구나, 부럽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마음이 돌고, 마음이 도니까 문화가 돌기 시작하거든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북한에 지금 남쪽의 대중가요나 TV 드라마, 영화 필름 같은 것들이 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동안 우리가 얻은 것이 얼마나 큽니까.
이산가족 문제도 얘기해보죠. 인권, 인권 하는데 이산가족 문제보다 큰 인권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60년 이상 상봉을 못하고 있는데. 국민의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약 2백 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지금까지 만8천 명이 상봉했거든요. 금강산 관광도 계속되었고요.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이것도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늘어날 거예요.(인터뷰 이후 금강산 관광객 피격과 사망 사건이 있었다. 인터뷰의 시점상 이 문제를 반영한 질문과 답변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밝혀둔다..편집자)
이런 등등을 볼 때, 국제 정세를 보더라도 그렇고 우리 내부의 상황을 봐 도 이제는 우리가 그동안 투자했던 것을 거두어들일 단계가 됐단 겁니다. 우리의 미래는 북한과의 관계 여하에 달려 있다, 물론 안전보장 차원도 마 찬가지지만 실리적인 부분에서도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명림 :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경제회생, 자원외교, 실용주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북한과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자원 획득, 물류비용 절감을  위해서도 남북관계 발전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말씀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현 정부 들어 완전히 대립관계로만 설명들을 해왔거든요.
김대중 : 실용주의란 것은 내가 좋아하건 안 좋아하건 현실을 현실로 인정 하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거기에 필요한 대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 금까지 무슨 소리를 해왔건 바꿀 건 바꿔야 해요. 나는 이 대통령이 결국 바꿀 거라고 보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급박하게 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망원경처럼 넓고 멀리 보고 현미경처럼 좁고 깊게 봐야 한다
박명림 : 이제 역사나 사상으로 돌아가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먼저 대통령님의 여러 가지 사상과 정책, 논리, 구상,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은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동안의 대통령님의 여러 저작이나 연설을 분석하면서 기독교적 소명의식, 도덕주의와 정의감, 실용주의, 이 세 가지가 핵심기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물론 정치인으로서의 권력의지 역시 기본요소의 하나였다고 봅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사상과 정책의 형성에 관한 부분입니다. 저는 대통령님을 보면서 정치 혹은 행동 이전에 정책을 구상하고, 정책 제시 이전에 정교한 논리를 먼저 세우는 일련의 사이클을 발견했습니다. 정치 입문 초기인 1950년대의 기록들을 봐도, 대안을 제시하실 때 당시 정치인들이 말하지 않던 노동 문제를 비롯해 평화 문제, 사회경제, 국제관계 등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신 걸 볼 수 있었는데, 당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또 엄혹한 냉전과 반공주의시대에 어떤 사상가나 책으로부터 이런 문제의 단초를 얻으셨는지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김대중 : 1955년이라고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사상계』에 노동운동에 대 한 원고지 100매 분량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고,『 동아일보』에도 몇 번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
박명림 : 『사상계』1955년 10월호의「한국 노동운동의 진로」라는 글을 말
씀하신 듯합니다.『 동아일보』기고 역시 1955년인데, 9월 14~15일의「노 총분규와 우리의 관심 (상․하)」를 비롯해 여러 편의 노동 문제 관련 글이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지금 읽어도 상당한 수준이라 놀랍습니다. 김대중 그렇게 읽어주니 고맙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라든가 노동 문제, 경제 문제 등을 볼 때 항상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균형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수한 원리원칙에 입각해서 문제를 한번 보고,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현실에 맞는지 다시 생각합니다. 비슷한 얘기로 늘 내가 강조했던 것이‘망원경처럼 넓고 멀리 보고, 현미경처럼 좁고 깊게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학자들은 서생적 문제의식으로 망원경같이 흐름을 멀리 보지요. 정치인들은 상인정신을 생각하고요. 그 둘이 병행되어야지, 한쪽으로 기울면 실패해요.
1950년대 당시 국제정세 얘길 하자면, 그때는 공산주의와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하면 공멸하거든요. 그러니 전쟁은 불가능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하는 의미에서 데탕트 얘기가 간혹 나오곤 했었죠. 그래서 참혹한 전쟁을 치른 분단국가로서의 우리 상황을 떠올리며 평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전쟁은 더 이상 절대로 안 된다고 본 겁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시대적 상황을 멀리 내다볼 때, 나는 결국 기업가와 노동자가 공생공영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했던 말이, 자유 없는 빵도 안 되고 빵 없는 자유도 안 된다.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외국 저작 중에는 라인홀드 니버나 갈브레이스, 토인비 등의 책들에서 여러 가지 배우기도 하고 영감을 얻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자기 고민을 안고 조용히 사색하고, 멀리 내다보고, 현실과 맞춰보고, 이렇게 계속하다 보니 앞서 얘기하신 여러 문제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이 나오고 정리되더라고요. 지금 내가 1955년에 쓴 글을 다시 봐도 별로 큰 모순은 없어요. 그런 식으로 노동 문제를 포함해 현실 문제를 보고 그랬습니다.
자유도 중요하고 빵도 중요하다
박명림 : 1960년대 들어가면 평화나 유럽과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집중적 으로 말씀하기 시작하는데, 저는 그 단초가 1950년대 유럽과 일본에서 발 전했던 2차대전 이후의 세계평화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국내에 이와 관련된 자료들이 거의 없을 때였거든요. 평화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일찍 할 수 있었던 특별한 계기가 었습니까?
김대중 : 별다른 특별한 계기랄 것은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해보니, 앞에 서 얘기한 것처럼 소련과 미국이 전쟁을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한 국전쟁을 통해 경험했듯이 전쟁을 하면 둘 다 공멸하니까요.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참혹한 피해를 당했습니까? 다시 겪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전쟁을 회피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언젠가는 평화적으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어요. 이건 아까 말한 비유로 하자면, 망원경처럼 내다보면 보이는 겁니다. 현미경처럼 보면 당장의 대립만 보이겠죠. 하루 이틀에 될 일은 아니지만 결국은 평화의 시대가 온다고 믿었어요. 결국 왔잖아요.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하나는 자유를 주장하고 하나는 빵을 주장하는데, 그게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유가 있으면 빵이 있어야 하고, 빵이 있으면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구사회에서 사회민주당이 등장한 것이고요. 사회민주당은 자유와 빵을 병행하거든요. 자유 없는 빵도 싫고, 빵 없는 자유도 싫고, 둘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이고 미국의 리버럴한 사람들 생각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책도 읽었지만 내 자신이 사색을 통해서, 즉 서생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고 상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현실을 거기에 맞춰보니까 이게 맞는 것 같았어요.
또, 그때 이미 나는 무슨 사태가 오거나 시대가 바뀌려고 하면 머리보다 몸에 먼저 느껴지는 기운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렇게 느낌이 오면 그때부터 이론을 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요. 말하자면 직관으로 느낀 것들을 이론으로 만들어가는 식이랄까요. 많은 일이 그랬어요.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 3선개헌할 때, 그게 1969년인데, 내가 효창공원에서 연설하면서‘이번에 3선개헌 하면 3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총통제로 간다’그랬거든요.
박명림 : 1969년 7월 19일 효창공원에서 열린 3선 개헌반대 시국대 연설회에서 “3선개헌은 국체(國體)의 변혁”이라며“3선개헌 이후에도 영원히 해먹겠다”는 것이라면서 맹공을 퍼부으셨지요. 기록을 보면 대단한 열기의 집회였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 : 그랬지요. 그런데 당시 여당에서는 날 보고 미쳤다고, 국체 변혁이 뭐냐, 영구집권은 꿈도 안 꾼다, 총통이 뭐냐고 했지만 결국은 유신체제를 통해서 그렇게 갔잖아요. 1971년 대통령선거 때도 계속 그 얘기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난 총통이 뭔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랬지만 결국 그렇게 됐죠. 이런 식으로 나는 현실에 대한 체험과 직관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것은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관찰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논쟁의 한 중심: 대중경제론에 대하여
박명림 : 대통령님을 보면 이상과 현실의 긴장과 결합이랄까, 그런 게 늘 느껴졌습니다. 당시에 가장 주목받았던 이론 혹은 정치노선이라면 대중주 체 민주주의론, 대중경제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통령께서 활동하시기 이전의 한국의 정치인들, 특히 야당의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 장면, 윤보선 등의 지도자들은 정책이나 당론 결정 과정에서 국민을 계도대상으로 보고 소수의 당내인사들을 중심으로‘사랑방 정치’라고 할까‘밀실정치’, ‘사전결정’이라고 할까, 아무튼 위로부터 결정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는데, 여러 자료들을 보면 대통령님은 일찍부터 ‘대중’, ‘국민’, ‘시민’ 중심의 정치와 경제를 언급하시거든요. 큰 차이인 것 같습니다. 대중주체 민주주의, 국민 민주혁명 등 구체적인 개념을 제시하시기도 합니다.
대중경제론에 대해서도 지금은 여러 경제학자들이 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요. 한국 사상사 쪽으로 보면 임시정부로부터 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헌법으로 이어지는 균등발전론을 계승한 것 같고요. 또 시대적으로 보면,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초기에 내포적 공업화를 주장하다가 급속도로 수출지향과 개발독재로 나아가면서 야당 쪽에서 대안을 제출하지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런 시기에 대중경제론이 나오고, 또 학계에서는 내재적 발전론, 민족경제론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중경제론은 현실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것이 구체화되기까지 당시의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는 없었는지, 또 박정희의 경제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그리고 대중경제론이 나중에 집권하신 이후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그게 맞는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김대중 : 박정희 정권이 들어와서 경제개발 5개 년계획을 이야기하고, 나중 엔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국민들을 흥분시키고, 경제발전을 추진하는데,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니까 속임수를 쓰고 있더라고요. 결국 실상은 농민들의 곡가를 떨어뜨림으로써 노동자 임금을 낮추는 저곡가-저임금 정책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재벌들이 독점적인 이익을 얻었죠. 그때는 대부분의 재벌기업들이 수입 금지해서 장사하지 않았습니까. 자동차산업이 대표적이죠. 수입차 가격보다 두 배, 세 배 비싸면서 내수용 차에는 재료도 수출용 상품보다 나쁜 걸 쓰고. 철판도 얇은 것, 부속품도 약한 것을 쓰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국민들이 뒤집어썼죠. 이런 예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재벌을 위해 돈을 쓸어 부어 주면서 겉으로는 새마을운동이다 뭐다 하며 농민을 동원하고, 또 경제가 발전해야 배가 부르니까 노동자는 열심히 일해라, 그렇게 강조하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 등 일반국민에게 위기가 온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런 식으로 가면 이 나라가 완전히 재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서, 민주주의도 없고, 사회정의도 없고, 국민생활도 파탄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대중이 참여하고 대중이 공동운영하고 대중이 같이 분배를 받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이, 노동자가 주식을 소유하고, 감사도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사람들이 해서…. 기업회계나 경영도 노동자들이 감시하면 이중장부나 비자금 같은 게 불가능하잖아요. 그때는 이중장부, 비자금 이런 문제들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돈으로 정치자금도 막 주고 했었죠. 이런 걸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 이중곡가제였어요. 농민에게는 비싸게 사서 국민들에게 싸게 파는 이중곡가제를 주장했지요.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결국 당시 내 주장을 한마디로 말하면‘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떠올린 것은 아니고, 대만이 그런 식으로 성공하고 있는 것을 봤거든요. 중산층, 중소기업이 성장해야 고용효과도 커지고 부도 멀리 퍼져나갑니다. 결국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성공하려면 중산층이 튼튼하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중산층이 튼튼하면 하층의 사람들을 먹여 살려요. 고용능력이 커지니까요. 민주체제도 튼튼해지지요. ‘대중경제’의 목표는, 말하자면 중산층을 지원하고 그 밑에 계층을 중산층화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길이고, 경제의 중심이, 허리가 튼튼해지는 길이다. 그리고 대기업 경쟁에서는 우리가 이기기 힘들어도 중소기업 경쟁에서는 우리 국민의 교육수준이 높고 임금이 싸니까 이길 수 있다. 이런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대중경제론을 발표했죠. 그때, 그 선거 때『대중경제 백문백답』이라는 책을 냈어요. 그리고 나중에 하버드대학에서 85년에『대중참여경제론(Mass Participatory Economy)』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이건 내가 하버드 국제문제연구소에 일 년 있다가 돌아오면서 리포트를 냈는데, 대학 측에서 그걸 출판하고 싶다고 해서 나온 거죠.
앞으로 우리 경제가 번영해나가려면 무엇보다 중산층이 튼튼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그냥 중산층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부품․소재를 만드는 중산층이 중요해요. 지금 대기업들이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만들고 있지만 거기 들어가는 중요한 부품들은 아직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거든요. 이건 일본 장사 해주고 있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부품․소재산업을 육성하지 않는 것은 정부 정책이 잘못돼 있는 거예요.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도 이걸 하려고 했는데 제대로 실현은 못했고, 다만 부품․소재산업 육성을 위한 법은 만들어놓고 나왔어요. 앞으로도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지금 디지털경쟁시대가 되고 하면서 문제가 조금 달라졌다고 볼 수는 있지만.
박명림 : 학계에서 궁금해 하는 것은, 대중경제론이 등장하면서 박정희의 성장지상주의, 혹은 개발독재의 대척점에서 사회경제적인 대안으로 주목을 받았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 당시는 내재적 발전론이나 민족경제론 등이 나오던 때이기도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또 내외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셨고요. 그래서 대중경제론을 만들면서 혹시 젊은 학자들과 한국 경제의 대안 모색을 위한 세미나나 긴밀한 교류를 가지셨던 건 아닌지, 그런 점도 궁금한데요.
김대중 :  박현채 교수하고는 같이 좀 했어요. 책 내는 것도 도와줬고. 내외
문제연구소 할 때는 남덕우 당시 서강대 교수 같은 분들도 초청해서 얘기 를 듣기도 했죠. 여러 분야에서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마 지막에 틀을 짜고 방향을 잡는 건 제가 했어요. 최종적인 정책대안을 만들 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독서와 토론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정치인은 공부를 하는 만큼 국가 에 봉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4대국 안전보장론과 한반도 평화구상 : 1동맹-3우호체제
박명림 : 4대국 안전보장론 역시 대중경제론 못지않게 오랫동안 화제의 중
심이자 논란의 초점이 되었지요. 대통령님의 훗날의 평화와 통일구상에 결정적인 단초를 형성했던 계기이도 하고요. 분단국가로서 격렬한 남북대치상황에 있었고, 또 한미동맹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상황에서 4대국 안전보장론을 말씀하시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엄혹한 냉전 상황에서 어떻게 4대국 안전보장론을 제안하게 되셨는지, 또 혹시 그 시점에서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같은 것은 없었는지요. 사실 노태우 정부 당시의 북방 정책과 관련하여 중국․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한 아이디어 중 하나가 대통령님의 4대국 안전보장 부전조약 제안이라는 얘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대중 :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의 압력 같은 것은 없었어요.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반미를 한 일이 없거든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내가 얘기하는 것은‘1동맹-3우호체제’입니다. 미국하고는 군사동맹을 해야 하고, 나머지 중국․러시아․일본하고는 우호체제를 해야 한다,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이 4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선왕조 말엽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4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야 돼요. 그게 외교죠. 우리나라같이 외교 천재가 필요한 나라가 없어요. 우리나라 같이 국민이 외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나라가 없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부족해요. 조선왕조 말엽에 일본은 결국 우리를 병탄했고 러시아와 중국도 그러려고 했잖아요? 그때 미국이 만일 안 된다고 했으면 일본은 못했어요. 그런데 미국이 동의하고 지지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쉽게 당한 거예요. 그렇게 외교가 중요해요.
태국 주변 나라들이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전부 식민지화됐는데 태국만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국끼리의 이해관계 조정도 원인이 되었지만, 이건 태국 자체가 외교를 잘해서 가능했던 거예요. 영국하고 프랑스 사이에서, 그러니까 인도차이나 쪽으로 들어오는 프랑스와 그 외의 지역, 예를 들어 버마에 들어오는 영국 사이에서 우리 태국이 완충 역할을 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붙지 않을 테니까 우리를 가만히 둬라, 우리가 중립을 지키겠다, 이런 것이 먹히더라고요. 외교 덕택으로 식민지가 안 됐다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못했거든요. 역사책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에 독일공사가 한반도를 중립화하자고 했는데, 일본도 거기 동의를 했어요. 다 동의를 했는데, 그때 우리 정부대신들 가운데 친청파들이 중국은 우리 상국(上國)인데 그걸 놔두고 중립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대를 했다고 해요. 이만큼 우리가 외교에 대해 깜깜했다는 말이에요. 물론 식민지가 된 것이 그 원인만은 아니지만요.
내가 1971년 대통령선거 때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을 얘기했는데, 세계에서 소련, 중공 그때는 중공이죠. 그리고 일본, 미국, 이 4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에요. 세계에 없어요. 세계에 없는 상황이면 세계에 없는 정책이 나와야 해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게 미국입니다. 미국은 우리와 거리가 머니까 직접적 이해관계가 좀 약하고, 그래서 우리에 대한 영토적인 야심은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도 없어요. 물론 미국이 아무 이유 없이 여기 있는 것은 아니고, 이해관계는 있죠.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견제라든가, 일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좀 억울하긴 하지만 미국이 우리나라를 보호하는 데는 일본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크게 작용하고 있거든요. 그건 현실이니까 현실대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실용주의죠. 인정하고 해나가야 돼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보니까, 미․소전쟁의 시대는 가고 데탕트가 오고 있는데, 그 물결을 타야 하지 않습니까? 물결을 탄다는 것이 뭔가. 그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이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대선 때 대놓고 했다가 아주 혼이 났죠. 나의 주장에 대해 당시 박정희 후보는‘중공과 소련은 우리 적성국인데 그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공격했는데, 나는‘우리의 적성국이니까 평화를 보장하라고 하는 것이지 이미 평화를 보장하고 있는 우방국에 대해서는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반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일관되게 주장했어요. 적성적인 입장이 있기 때문에 보장하라는 것 아니냐, 우방국가한테 새삼 보장하라고 할 필요 없지 않느냐, 그렇게 반론을 했는데. 결국 그것이 지금 오늘날 남북 합쳐서 6자회담인 거예요. 그리고 6자회담에서 동북아시아 안보체제를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때 말한 그것이 실현되고 있는 거죠. 우리는 당분간 1동맹-3우호체제로 나가야 해요.
한반도 문제의 본질, 햇볕 정책, 그리고 한미관계
박명림 : 그렇다면 대통령님께서 생각하시는 한반도 문제의 본질, 우리의 대처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햇볕정책의 인식적 토대라고 할까, 그 런 것을 여쭤보고 싶군요.
김대중 : 우리 민족은 20세기 초에 독립을 상실했고, 1945년에는 분단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강대국의 영향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독립을 유지하고 민족이 발전해나가려면 주변에 있는 4대국에 대한 대책이 성공적으로 마련돼야 해요. 평화와 통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안으로는 남북이 단합하고 밖으로는 4대국과의 관계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나는 이 점을 1970년대 초부터 주장했어요.
앞에서도 얘기했는데, 19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때‘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주장했고. 또 내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에 보니까, 미국․일본과의 관계는 냉담했고 러시아와 중국과도 별 진전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국제적으로는 4대국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면서 남북 간에는 햇볕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햇볕 정책은 대립하는 사이에서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양쪽 모두의 공동 승리로 이끄는 것을 말해요. 남북관계를 이런 햇볕 정책으로 끌고 가려는 것을 당시 4대국이 모두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취임 후 불과 반 년 사이에 엉클어져 있던 4대국 외교를 성공적인 우호관계로 전환시키고 그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지요.
박명림 : ‘4대국+남북’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외교 상대인‘4대국’축과‘남북’축의 핵심인 미국과 북한은 우리를 중심으로 적대관계인데 동맹인 우리가 적대국가에게 온건 정책으로 나간다고 했을 때 미국과의 긴장이나 충돌은 없었나요? 상세하게 들려주시겠습니까?
 
김대중 : 내가 1998년에 대통령 취임하고 6월 달에 미국에 국빈 방문을 해 서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거기서 클린턴이 나에게 당신이 말하는 햇볕 정책이란 게 뭐냐, 설명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햇볕 정책은 모든 분쟁을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거다. 우리 한국에는 햇볕 정책의 3원칙 3단계가 있다. 3원칙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이다. 통일의 제1단계는 남북연합, 아주 느슨한 연합이다. 제2단계는 남북연방이고 제3단계가 완전통일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10~20년이 걸릴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했어요. 그랬더니 클린턴 대통령이 앉은 자리에서‘당신의 평화와 화해를 통한 공동 승리의 햇볕 정책을 미국은 적극 지지하겠다. 당신이 앞장서서 대응해나가라. 그러면 우리가 뒤에서 밀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임기 말까지 지켰어요. 이 양반이 그때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을 우리는 지지한다, 우리가 도와준다, 이렇게 선언하더라고요.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 때는 아주 순조롭게 갔는데, 그 양반이 1년만 더 했어도 해결될 것을, 아니면 고어 부통령이 당선되었어도 해결되는 건데, 어떻게 부시 대통령이 당선돼서 이게 아주 틀려졌죠. 부시도 6년 동안 하다하다 안 되니까 다시 우리가 말한 소위 햇볕 정책으로 돌아간 거예요.
박명림 : 우리로서는 크게 안타까웠지만, 클린턴 정부와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은 완전히 정반대였죠.
김대중 : 방금 말했듯이 내가 취임 후 처음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햇볕
정책을 지지한 이후 클린턴 대통령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지지를 표했어요. 미국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북한에 보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해나갔습니다. 클린턴 대통령과 북한 관계가 거의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나갈 즈음 미국의 정권이 바뀌어 부시 정부가 출범했는데, 부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클린턴이 한 정책은 모두 반대하는 정책을 해서 북한과 모처럼 이루어졌던 관계개선의 전망을 일거에 뒤집어버렸어요. 그리고 악을 행한자에게는 보답할 수 없다고 하고.
내가 2002년 부시 대통령 방한했을 때 부시를 붙잡고 얘기했습니다.‘ 대화는 악마하고도 하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악마의 제국’이라고 했지만 대화하지 않았느냐.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하게 하려면 당신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북한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밖에 없는데 전쟁을 하면 한반도는 잿더미가 된다. 미군의 추계에도 전쟁이 나면 2~3일 만에 수백만 명이 죽는다고 했다. 그런 전쟁을 우리가 어떻게 용납할 수 있나. 우리는 전쟁을 절대 반대한다. 전쟁을 하지 않고도 공산주의와 대화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소련과 동유럽이 증명했고 중국과 베트남이 증명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설득해서 결국 부시 대통령은 공개적으로‘전쟁을 하지 않겠다. 그리고 북한과 대화하겠다. 식량지원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부시는 북한에 대해서 적대적 정책을 계속했어요. 그렇게 6년이 지났습니다. 그 결과는 앞서 말했지요. 북한은 NPT 탈퇴하고, IAEA 감시요원 추방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쏘고, 마침내 핵무기를 실험했잖아요. 6년 동안 부시의 대북강경 정책은 얻은 것은 없고 문제만 더 어렵게 만들었어요.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제재를 지금까지 해봤지만 효과를 얻지 못해서, 남아 있는 유일한 길로, 북한과 대화하고 주고받는‘행동 대 행동’의 협상의 길로 돌아섰죠. 6자회담이 성립되고 그 길로 가게 된 거예요. 결국 우리의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 햇볕 정책이 미국 역대 대통령의 정책을 이끌었고, 세계적 지원을 받게 된 거라고 봅니다.
햇볕 정책의 골간: 모두를 친구로
박명림 : 말씀에 연결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브란트나 콜을 평가할 때, 서독의 적과 적을 서로 친구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 다는 얘기를 하곤 하는데요. 우리의 경우 대통령님의 시기가 바로 그랬다 고 생각합니다.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이 그렇게 적대적이었고 일본과 중국도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요. 어쨌든 당시 클린턴 정부 때 워싱턴이나 도쿄, 베이징을 가보면 이 사람들이 놀라는 게, 김대중과 남한을 중심으로 적대국가들이 서로 연결되는 현상이 처음으로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주목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네 나라가 각각 다 자기 정책을 가지고 일대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왔는데, 김대중이 집권을 하고부터는 남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이런 측면은 훗날 6자회담이 되면서 참여정부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지요. 어떤 특별한 외교적 구상이나 기술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4대국 안전보장론부터 연결되는 한국 문제에 대한 비전이 있으셨던 건지 궁금합니다.
김대중 : 첫째는 4대국과 북한, 다섯 나라와 우리의 믿음이에요. 예를 들어 일본과는 그 전에 김영삼 정권 때 극도로 관계가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문화 개방 문제를 놓고 문화인들이 굉장히 반대를 했거든요. 문화 식민지가 된다고 하면서. 그때 내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일본문화 들어온다고 우리가 식민지화될 것 같으면 우리 문화는 없어져도 된다고. 그런 우려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 조상은 중국으로부터 유교, 불교 같은 고급문화를 받아들여서, 다른 주변국가들이 중국화되는 와중에도 우리는 중국화되지 않았다. 조선 말엽부터 서양문화가 들어왔지만 서양화됐느냐.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문화는 우리 문화, 중국문화, 서양문화 받아들여 합쳐진 것인데, 왜 우리가 일본문화에 동화되고 우리 문화가 말살된다는 거냐. 그런 정도의 문화라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다양하게 접하면서 그중에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서 살아남고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말하자면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그것이 일본에 한류가 일어난 하나의 큰 원천이 됐어요. 그리고 일본 국회에서 내가 연설을 했던 것이 지금도 일본 사람들이 얘기할 정도로 큰 인상을 남겼고,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신임, 신뢰를 얻었어요. 신뢰뿐 아니라 존경심도 받았어요.
그리고 중국의 경우, 과거에 대만과 중국이 대립하고 있을 때 우리가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일관되게 국교를 중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했거든요. 그런 걸 중국이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북한과 화해 정책을 하니까 중국이 아주 쌍수를 들어서 나를 지지하더라고요. 러시아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미국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클린턴 대통령 만나서 설명하니까 김대중 햇볕 정책 지지한다고 했고.
남북관계, 그리고 2000년 정상회담
박명림 : 4대국을 한국의 입장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웃음) 마지막 남은
관문인 북한을 열었던 것이군요. 분단 이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해서요.
김대중 : 그래요. 그러면 남은 건 북한인데, 북한은 처음에 내가 대통령선거 나올 때 상당히 나를 방해했어요. 기억하겠지만, 그때 북한에서 내가 북한하고 협력을 했느니 하는 소리도 나왔거든요. 그리고 내가 햇볕 정책이야기하니까 그럼 우리 공산주의를 말살한다는 거냐고 반발하고.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일관되게 내 진실을 설명했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2000년 3월에 내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했던 연설이에요. 소위 베를린선언이라고, 북한에 화해와 협력을 제안하고 우리는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이죠. 그때는 독일의 흡수통일을 우리가 북한에 적용하려고 한다는 우려가 컸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흡수통일 안 한다,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게 얘기한 것이 북한에게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준 것 같아요.
그래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게 됐는데요. 사실 남북 정상회담을 할 때 김정일 위원장이 뭘 이야기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갔어요. 사전에 공동성명 초안하자고 해도, 오면 다 잘된다고, 오기만 하라고 해서 그냥 갔어요. 공항에 김정일이 나온다는 말도 있고 안 나온다는 말도 있고 그랬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려고 아래를 보니까 그 양반이 와서 서 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인사하고 같이 출발했는데.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많이 묻는 게 있어요. 둘이 차를 타고 50만 군중 앞 을 한 시간 이상 걸려서 돌았는데, 그때 차 안에서 무슨 얘기를 했냐. 근데 얘기를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웃음) 얘기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 첫째 이게 처음 만나고 상대방을 모르니 무슨 속얘기를 할 수도 없는 것이 고, 둘째 더 중요한 것은 군중들이 밖에서 만세 부르고 꽃을 흔들고 하는 데 거기 손을 흔들어줘야 하잖아요. 게다가 차창을 내려놓고 있으니까 환 호소리가 높아서 악을 쓰지 않으면 서로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상황이에 요.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한테‘저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그 말 한마디 들은 이후엔 말을 못했어요. 나도 이 양 반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니까 말을 할 생각이 없었고.
그때 정식 회담이 시작될 때 내가 모두발언을 했는데, 그것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김정일 위원장한테 그랬어요. 누구나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고 권력의 자리에 영원히 있는 사람이 없다. 지금 당신과 나는 남과 북을 통치하고 있는데, 우리가 마음 한번 잘못 먹으면 우리 민족이 공멸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바로 먹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경쟁적으로 풀지 말고, 서둘지 않고 양쪽이 만족할 수 있는 통일을 하면 우리 민족과 후손들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그건 뻔 한 게 아니냐. 그런데 이렇게 말만 해서는 안 된다. 첫째, 당신네는 남쪽을 공산화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버려야 한다. 만일 공산화한다고 하면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우리도 절대 북한을 흡수통일 안 한다. 그럴 능력도 없다. 우리는 서독이 아니다. 그런 경제력도 없고, 서로 이질적으로 50년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하나가 되면 정신적 갈등을 견딜 수 있겠어요? 독일을 봐라, 그거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3단계 통일론 일찍부터 주장하고 있지 않냐. 거기서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에 대해서 마음을 놓게 된 거예요.
박명림 : 북한과 미국이 서로 적대적이고 일본과 중국도 한반도를 놓고 서
로 경쟁하는데, 지금 국제정치학자들이 주목하는 게, DJ 때나 노무현 때는
이들에게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대해 다 호의적인 정책을 갖게 만들었는 지 하는 점입니다. 이게 열강의 이해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한반도 역사에 서는 매우 드문 사례거든요.
김대중 : 거기에 대해서는 첫째로, 4대국이 각자 이해가 다르지만 한반도 에서 평화가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점에서는 공통되거든요. 그 때문에 내가 북한하고 평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다 지지할 수밖에 없어요. 둘째는 우리에 대한 신뢰이지요. 내가 4대국에 대해서 각각 절대 당신네들 나라에
불리한 짓은 안 한다, 우리는 당신네들과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 를 믿어라. 이런 설득을 아까 일본에 대해 했듯이 다 했거든요. 내 행동이 나 말하는 것을 다 봐도 틀림없으니까, 4대국이 나를 신임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셋째로 북한과의 신뢰입니다. 북한이 나를 신뢰하게 되니까 일이 순조롭게 간 것입니다. 그래서 클린턴도 퇴임 이후 여기 우리 사무실에 와 서, 자기가 일 년만 더 있었으면 다 해놓고 나왔을 텐데 아쉽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이 제일 중요하다
박명림 : 언젠가는 상세히 연구해봐야 할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냉전주의자들, 이념주의자들이 보기에는 한미동맹을 강화하려 하면 남북관계가 적대적이 되고, 남북화해를 하면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한․중이 가까워지면 일본이 견제를 하고, 그런 식으로 늘 제로섬으로만 보거든요.
김대중 : 아, 그게 그렇지 않아요.
박명림 : 네. 그런데 대통령님 집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
건 뭔가 중요한 요인이 있을 것 같다고 봅니다. 다섯 모두랑 친했거든요?
김대중 : 무엇보다도 나는 원칙을 감추지 않았어요. 미국이 제일 중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