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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타운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연설 - 1998. 6. 10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국의 장래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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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타운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연설 - 1998. 6. 10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국의 장래

존경하는 윌리엄 쿠퍼 총장 대리,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어제 내가 만난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을 이끌어 가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낸 명문 조지타운 대학으로부터 인문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작년 4월, 나는 당시 한국 제1야당의 총재로서 이 대학을 방문하여 ‘한반도와 태평양지역의 미래’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때 자리를 함께 했던 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시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그때 나는, 1997년 한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50년만의 민주적 정권교체 여부를 판가름하므로 한국 정치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라고 강조했으며, 그 결과에 대해 낙관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당시 내가 내렸던 낙관적인 전망 그대로 한국 국민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루어냈으며, 나는 오늘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정도면 나의 예언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하다고 자부해도 괜찮겠지요?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은 최근 아시아의 경제위기와 관련하여 ‘아시아적 가치’ 라는 화두를 가지고 일부 논쟁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핵심적인 논점이 4년 전 「Foreign Affairs」지를 통해 나와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 총리가 벌인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이광요 전 총리는 아시아에서는 서구 민주주의 제도가 근본적으로 맞지 않고 유교적 전통에 근거한 가부장적인 체제가 적합하다면서 “이질적인 제도를 적용할 수 없는 사회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말라” 는 주장을 폈습니다. 나아가 개발도상에 있는 아시아에 있어서는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는 철학적 전통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습니다. 2,000년 전 중국에서는 통치자를 천지(天子)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위대한 철인(哲人)인 맹자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지 않을 때 백성은 하늘을 대신해 그 천자를 몰아낼 권리가 있다” 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내가 제일 존귀하다’는 장엄한 인권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시아에는 예로부터 풍부한 민주주의적 사상의 뿌리가 풍부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고 나는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부터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시행된 군현제도, 고급공무원을 국가시험에 의해서 뽑는 과거제도, 임금과 고관의 행동을 감시・비판하는 제도 등 오늘날 민주사회의 제도와 상통하는 전통이 서구사회 보다 훨씬 앞서서 실현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아시아의 고대사상들은 17세기 말의 존 로크의 사상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서 일부 민주적 제도는 서구보다 훨씬 앞서서 아시아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시아와 서구 사이의 차이는 사상과 전통의 차이가 아니라, 누가 먼저 민주주의 제도를 발견하고 실천했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분명히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인들에게 동양인에게 없는 특수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구가 아시아 보다 기회를 먼저 잡은 것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의 강물에 수력발전기를 장치하면 전력이 나오듯이 아시아의 강물에서도 전력을 발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날 아시아 각국의 경제위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발전시키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며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는 두 가지 모두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되고 발달되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 그라고 많은 서구나라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수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큰 성공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 독일과 메이지 일본은 시장경제만 받아들이고 민주주의는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시장경제는 독점과 침략으로 왜곡되어 참답한 재난과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패의 결과는 경제적 근대화를 구실로 권위주의 체제를 강요해 왔던 아시아 각국이나 중남미 여러 나라의 역사와 현실이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경제가 실패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시장경제는 자율과 경쟁의 바탕 위에서만 자랍니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는 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권위주의는 시장경제의 벗이 될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 정부는 경제와 금융을 지배합니다.

기업인도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에 의해서 성공하는 것보다 권력과 결탁하여 일확 천금의 이권을 얻음으로써 손쉽게 치부하려고 합니다. 금융기관의 장(長)은 정부에 의해서 그 임명이 좌우되며, 그에 따라 은행대출도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많은 대출이 부실기업에게 주어져서 금융기관 역시 부실화되고 맙니다. 이러한 여건을 가지고는 무한경쟁의 WTO체제 아래에서 경제가 실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아시아는 경제난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경제가 다시 성공의 궤도에 오르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서구사회에서와 같이 병행발전되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한국의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이를 한결같이 요구하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나의 충고를 외면하였으며, 결국 한국 경제를 파탄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위기의 한가운데서 대통령에 선출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전례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병행되어야만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21세기의 경제가 20세기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20세기는 공업화 사회였고 눈에 보이는 물질, 즉 자본과 노동과 원료 등 하드웨어가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정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 즉 ‘소프트 웨어’가 경제의 핵심입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승리하려면 자유로운 창의가 샘솟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정보에 접할 수 있고 정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민주사회만이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한편 20세기는 국민국가의 시대였습니다. 각국은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 경제적 장벽을 높이 쳐놓고 외국경제의 진입을 막을 수 있었고 자국경제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벽은 오래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21세기의 WTO체제 아래에서는 경제적 국경이 사라집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체제, 즉 완전한 시장경제체제가 필수불가결합니다.

이제 한국의 철학은 바뀌고 재정립되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발전시킬 때만이 지금의 경제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에게는 위대한 우리 국민과 더불어 이 국가적 목표를 성공시킬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반세기만에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듯이, 민주주의의 햇불을 수호하고자 하는 아시아인들의 열망이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지금 도처에서 이러한 성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하루빨리 정착시키는 일이야말로 아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위기를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발전시킨 아시아의 모범이 되어 지금의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날, 대통령으로서의 나의 과업은 끝난 것이다”라고 여러분에게 감히 말씀드립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국민의 땀과 눈물, 그리고 고통에 대한 인내가 요구되는 경제위기의 한가운데서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난 1985년 내가 「대중참여 경제 - 한국을 위한 민주적 대안」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이래, 나는 줄곧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발전시켜 한국 경제를 새로 일으켜세우겠다고 결심해 왔습니다. 내가 이러한 과업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국 국민과 나는 이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에게 있어서 현재의 경제위기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보다 발전된 국가를 향한 절호의 기회’를 부여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IMF의 강력한 개혁요구는 우리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IMF의 이러한 요구가 지금 우리 경제와 금융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으며,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공기업의 구조도 크게 혁신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한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노사정위원회의 활동처럼 각 경제주체의 민주적인 토론을 통한 합의가 힘차게 국정전반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정치의 안정과 개혁을 위한 거국적 노력도 지금 한창 진행중입니다.

신사 숙녀 여려분!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머지않아 확고한 뿌리를 내릴 것으로 나는 굳게 믿습니다. 이런 나의 믿음의 근거는 첫째, 한국에서는 이제 문민우위의 전통이 굳건히 자리잡은 데 있습나다. 둘째는 여야간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루어낼 정도로 국민의 민주역량이 성숙했다는 점입니다. 셋째로는 남북대치상황에서 민주주의만이 승리 할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무엇보다 민주주의 발전을 뒷받침할 역동적인 시장경제체제가 지금 한국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한국인들은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귀중한 교훈을 배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발전시키는 것만이 이같은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나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이와 같은 교훈을 배워서 새로운 성공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서 이러한 길을 닦고 성공한 미국 국민이 한국과 아시아인의 노력을 통반자의 입장에서 전폭 지지해줄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과 아시아를 위해서 지금 가장 적절한 구호는 ‘앞으로 전진’ 일 것입니다. 성공적인 전진의 대열에서 여러분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료출처 : 김대중대통령연설문집. 제1권/ 대통령비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