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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기고문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385  
   이태영_선생님_탄신_100주년_기념문집_기고문.hwp (18.5K) [1] DATE : 2017-07-19 22:40:48

이태영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기고문

 

2014618일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지금은 하느님 품에 계신 이태영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집에 담을 글을 쓰려니 이태영선생님이 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진다.

인생의 길을 걷다보면 대낮과 같이 환한 길을 걸을 때도 있지만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도 있다.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내가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손을 잡아주고 등불을 비춰준 분이 계셨다. 바로 정일형박사와 이태영박사 내외분이 바로 그 분이시다.

 

나는 이태영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이태영선생님은 이화여전과 서울대 동문 선배이셨다. 서울대 재학시절 이태영선생님은 두 아이를 둔 주부학생이셨다. 실력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많은 학생들에게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분이었다.

 

이태영선생님은 황신덕, 박순천 선생님등 여성지도자와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설립했다. 1952년 부산에서 발조하여 여성지도자들은 피난 상황이었지만 여성운동에 대한 열성을 가지고 이 연구원을 발족시켰다. 이때 이태영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

나는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어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남녀동등이었으나 실제는 차별이 많았다. 6.25 전쟁에서 최대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의 현실은 차별이 많았다. 나는 여성문제연구원간사로 참여해서 발기문 작성에서 회원 등록까지 실무를 맡아 일했다. 힘들고 고됐지만 여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보람을 가지고 선배 여성지도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기뻤다. 이때 이태영선생님은 나를 따뜻하게 지도해주셨다.

 

여성문제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법률강좌와 상담이었다. 매달 강좌를 열어 여성의 법률상 지위, 민법상 여성의 권리를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고 무료상담을 하셨다. 이 강좌와 상담은 많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 1961여성법률무료상담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이태영선생님이 이끄는 가정법률상담소가 탄생했고, 이 단체는 1989년에 이루어진 가족법 개정을 선도했다.

 

나는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공부를 더하기 위해 1954년 서른 두 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585월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맡았는데, 이때 이태영선생님도 미국의 남가주 법과대학에서 수학하고 돌아오셨다. 나는 이태영선생님을 다시 기쁨으로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처음에는 교수와 사회봉사 및 사회운동가 사이에서 내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미국 유학중 흑인 인종차별을 직접 목격했고, 사회복지, 농촌계몽, 여권신장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대한YWCA연합회에서 총무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사회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것이다. 이때 이태영선생님을 비롯한 선배 여성운동지도자들의 조언이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YWCA 총무직은 내게 참 보람 있는 일이었는데, 이 때 남편을 만나 결혼한 것은 일생 최대의 축복이었다.

 

이태영선생님과의 인연은 남편의 일로 더욱 깊어졌다. 1971년 남편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는 야당 후보를 돕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야당 후보를 지지할 찬조연사가 필요했는데 좀처럼 사람들이 나서지 않았다. 그때 이태영선생님은 이화여대 법대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야당 찬조연사가 되기 위해 학장직을 내놓으셨다. 당시 신민당에 입당까지 하셔서 남편을 도왔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시며 유세를 다녔다. 당시 이태영선생님은 가장 인기 있는 찬조연사였다. 남편 김대중씨를 위해 희생과 수고를 한 이태영과 정일형 박사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훌륭한 선생님 두 분이 곁에 있는 것이 마음 든든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유세 도중 참으로 희한한 사건이 발생했다. 정일형, 이태영 박사 내외분이 살던 집에 화재가 난 것이다. 당시 정일형 박사는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계셨다. 이 화재로 정일형 박사 댁 아래채가 전소되었다. 그리고 많은 양의 선거자료와 장서가 불탔다. 이때 이태영선생님이 집필중이던 한국여성운동사원고가 불타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원고는 이태영선생님이 20여년 동안 모으고 간직한 여성운동자료 및 기록들을 토대로 쓴 원고였다.

당시 이 사건은 고양이 방화사건이라 불렸다. 수사기관이 화재원인은 고양이가 추워서 아궁이에 불씨를 물고나와 불을 냈다고 발표한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상대 후보, 즉 박정희 공화당측에서 저지른 일이라 추정했지만 수사당국의 조사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해외 토픽감으로도 올라 국제적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와같이 정일형, 이태영박사 내외분은 군사정권의 위협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셨다.

대선이 끝난 다음해인 197210유신이 선포되었는데, 마침 일본에서 1972년 총선 유세 중 테러로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위해 일본에 있던 남편은 그 다음날 유신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했다. 이후 남편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해외 한인들을 조직해서 민주화 투쟁을 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정권은 1973년 동경에서 남편을 납치해서 살해하려고 했다. 후에 드러났지만 이 납치 살해시도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한 짓이었다.

남편은 동경호텔에서 납치되어 처음엔 토막살해 당할 뻔 했다가 나중에는 현해탄에 수장될 뻔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도움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나서 서울 동교동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에게 남편이 납치되어 집으로 돌아오기 까지 5일간은 참으로 불안한 암흑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살아서 돌아오자마자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도 정일형박사님과 이태영선생님이 큰 위로와 힘이 되셨다.

남편은 연금상태였고, 긴급조치의 억압적 상황이었지만 재야지도자, 종교계 민주인사들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남편은 김수환추기경과도 의논하고, 문익환목사 등 재야인사와 긴밀하게 문서로 의견을 나누어 19763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미사 때 ‘3.1민주구국선언을 했다. 이 선언문은 남편이 초안한 것과 문익환목사의 초안을 정일형, 이태영,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등 재야인사들이 검토한 것을 서로 교환해서 검토해 최종 정리한 것이다. (기고문집에서 이어짐)



* 기고문의 최종원고는 파일을 첨부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